수요) 신자의 죽음(소요리문답 37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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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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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300장(내 맘이 낙심되며), 287장(예수 앞에 나오면)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우리를 지키시고, 수요 기도회로 불러주셔서 예배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부활의 산 소망을 갖게 하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애쓰는 주의 백성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예배드림을 통하여 주님 홀로 영광 받으옵소서.
본문: 고후 5:1-10 (1-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죽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 죽으면 좋잖아요.
기독교인도 삶을 긍정해야 니다.
살고 싶어요.
그게 정상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는 게 좋다. 사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죽는 게 더 좋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는 것은 좋다, 그러나 죽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말했나요?
내가 사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죽는 것은 더 좋다.
그게 빌립보서, 1장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사는 것도 좋지만,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합니다.
*오늘 신자의 죽음이라는 주제인데요.
소요리 37문입니다.
제37문 : 신자가 죽을 때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유익을 받습니까?
답 : 신자는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쉽니다.
소요리문답은 특이하게도
신자가 죽을 때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죽는 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나요?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쓴 셀리 케이건 교수는,
죽으면 끝이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분이 예일대학교 교수님이신데,
이 사람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영혼은 없다.
사람은 육체만 있다.
그러므로 죽으면 끝이다.
육체가 소멸되면, 사람이라는 존재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 사람이 하는 강의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비리그 3대 명강의로 뽑힌다고 해서,
이 사람 강의가 책으로 출판되고 번역된 것이죠.
이 사람의 강의가 명강의랍니다.
우리 삶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죽으면 끝이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좋은 것이 아니다.
죽음은 나쁜 것이다.
이런 사람의 강의를 명강의라고 듣고 있는 것이죠.
또 이 책을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번역되어서,
한국사람들도 읽고 있으니
안타까운 것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 대학 청년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영혼은 없구나. 우리는 육체로만 존재하는구나. 그러니 죽음은 나쁜 것이로구나.’
이런 생각 하겠죠?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37문을 읽었는데
다시 보시면,
신자는 죽을 때에,
일단 영혼이 어떻게 되나요?
완전히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즉시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영혼은 즉시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이 끝이 아니지요.
죽음 이후에 영혼은 완전히 복된 상태가 되고,
더 이상 하나님과 단절이 없는 완전한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자의 몸은 어떻게 될까요?
신자의 몸은 일단 무덤에서 쉰다고 합니다.
그런데 버려진 몸이 아닙니다.
신자의 몸도,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신자의 몸이 죽어서 썩는 것은 맞지만,
화장이 되어 흩어지는 것은 맞지만,
신자의 몸도 그리스도 연합되어서,
부활할 때까지 잠자고 있다가,
부활의 날에 완전히 거룩한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죽는 게 당연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죽음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이야기하지요.
로마서, 6장 23절을 보시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지,
하나님이 본래 주고 싶으신 삶은,
영생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부자연스러운 것,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없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죽음이 없죠.
사탄 마귀가 없죠.
모든 고통과 염려와 아픔이 없죠.
이런 것들은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서부터 생긴 ‘부자연 스러운 것’들이죠.
그러니, 죽음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이 죽은 다음에 부활할 수가 있느냐?
어떻게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이 지났는데 다시 살아나실 수가 있느냐?
믿을 수 없다. 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부활은 당연한 것이다.
왜요?
죄 문제가 해결되었으니까, 당연히 죽음이 아니라 영생인 것이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영생인 것이죠.
죽음이 아니라, 영생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은 확실히 안다고 말합니다.
그는 힘든 상황이었어요.
고린도후서, 4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장 8-10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역하는 것이 정말 힘들다.
사방으로 꽉 막힌 것 같다.
답답하다.
고통스럽다.
인생 자체가 아래로 내던져지는 것 같다.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고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짓눌리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폐기처분 되지 않는다.
나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내가 고통을 당할수록,
내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할수록,
내 안에서는 예수의 생명이 더욱더 역동적으로 활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겉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낡아지고, 무너지지만,
내 안에 속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나는 지금 받는 고난이 두렵지 않다.
내가 지금 받는 고난은 가볍고 작은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너무도 크고 무거운 것이다.
이 무겁고 크고 영광스러운 은혜를 생각하면,
이 땅에서 받는 환난이나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부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도 달려가고, 또 달려갈 것이다!
이게 고린도후서, 4장에서 바울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고백이 가능할까요?
죽으면 끝이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나,
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안 믿는 사람도 멋있게 살고,
죽음을 극복하고 살고,
그럴 수는 있지만,
우리들처럼,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죽는 것이 더 낫다!
사는 것도 좋지만, 죽는 것은 더 좋다!
왜냐하면,
우리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더 좋은 집, 하늘에서부터 오는 집, 영원한 집으로 이사갈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땅에 있는 우리 몸이 무너지게 되면은,
우리 인생 끝이다.
이제는 소망이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죠.
어떻게 말씀하고 있나요?
땅에 있는 우리 몸이 무너지면, 끝이 아니다!
무너지면은,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새로운 몸,
하늘에 있는 영원한 몸이 우리에게 있을 줄을 확실히 알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죠?
그래서, 바울은 무엇을 탄식합니까?
아, 내 몸이 병들어가고 있구나.
아, 내 몸이 무너져가고 있구나.
내가 평생 수고하고 고생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내 몸은 이렇게 병들고 무너져가고 있는데.
이런 탄식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왜 탄식하고 있습니까?
아, 빨리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집에 이사가고 싶다!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
이것 때문에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영혼을 성화시키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신자를 다루시는 연단의 도구입니다.
최후의 연단의 도구가 무엇입니까?
더 쎈 고난인데,
바로 죽음이라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악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 자체는 나쁜 것이죠.
누가 죽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죽음 자체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주는 이 생명의 소망!
이 땅의 장막 집이 무너져도 괜찮은 이유!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새로운 집으로 이사갈 수 있다는 그 소망 때문에, 두려운 죽음조차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서,
미리 선급을 지불하셨습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보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비즈니스 및 무역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물건 사는 사람이 미리 지불한 선금,
그러니까 선 지불금인데,
말 그대로, 내가 이 물건을 확실히 사겠다고 보증 서는 돈이니까, 보증금인 것이죠.
이 보증금이 누구라고 합니까?
성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증금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보증금을 받은 우리는,
아, 하나님께서 나를 반드시 구매하시겠구나!
미래에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사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히시겠구나!
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죠.
하나님이 보증금을 지불하시고,
도장을 콱 찍으신 것입니다.
이거 내꺼다! 이거 내가 샀다. 지금은 내가 보증금만 지불하지만, 나중에 잔금 다 치르고 나면,
완벽하게 영광스럽고 거룩한 내 백성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게 ‘보증’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신자는 사는 것도 유익하지만, 죽는 것은 더 유익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면, 살아 있는 것도 유익하지만, 죽는 것은 더 유익하다!
우리는 죽음이 고통스럽고,
죽는 과정이 두렵다는 것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는 거 고통스럽죠.
죽는 과정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죽음은 분명,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악이요, 사라져야 할 원수 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죽음 가운데,
죽는 과정 가운데에도,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며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신자에게는
죽음도 유익한 것이죠.
신자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죽음 이후 즉시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이 유익하죠.
또, 신자의 육체는 어떻게 됩니까?
신자의 육체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 때까지 잠을 자면서,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는 죽음보다 더 큰 소망!
더 큰 은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죽음 자체는 두렵지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닥뜨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9절 10절인데요.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다가올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결산할 날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몸으로 살든지,
몸을 떠나 죽든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게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이 땅에 집착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애를 쓰며 수고하고 살지만,
우리 주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분명히 알고,
각각 선악간에
우리 몸으로 행한 대로 받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현재를,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말씀을 통해,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죽음조차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여,
우리 몸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드리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보증금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반드시 복주실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주님 말씀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하는 마음 달라고,
그래서 몸으로 살든지, 몸을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노라 결단하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앞서 세우신 담임목사님이 영육간에 지치지 않으시고,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영적인 육적인 자원과 은혜를 충만하게 공급하여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또한, 2023년 목회계획을 두고 기도하시는 우리 목사님의 고민 속에, 우리 성도들이 합심하여 한 뜻으로 동역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비전트립 중인 중등부, 고등부 청소년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이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시간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을 지적으로, 영적으로, 경험적으로 더욱더 성숙하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해달라고, 인도하시는 4명의 교역자들과, 태국 선교사님께도 크신 은혜 부어달라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저주받은 운명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의 나라를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원 전에 우리를 불러, 주의 자녀 삼으시고, 믿음 주셔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은혜를 값없이 받아 누리게 하신 이 은총도 너무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더 나아가 영생복락의 소망을 가지고, 죽음 이후에도 베푸실 영광과 부활의 소망까지 허락하시니 한없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처럼 이 크고 놀라운 소망 때문에,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중고등부 비전트립 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주의 백성들 위에 한 없는 은총을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찰 / 이미지
1 스케노스(천막, 장막) 오이키아(집, 주거지). 카탈뤼오(폐하다, 무너뜨려지다 / 수동태)되어진다면, 하나님으롭터의 오이코도메(건물, 덕을 세우는, 세움, 구조물)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손으로 만들지 않는, 영원한, 하늘에 있는
언젠가 우리의 삶은 ‘무너뜨려진다’ (수동태)
그러나 이는, ‘새로 새우기 위한’ 무너뜨림이다.
2 스테나조(탄식하다, 원망하다, 불편함을 표현하다, 불쾌함을 표현하다)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옷을 겹쳐 입기를. 에피포세오(간절하 원한다, 간절히 사모한다, 간절히 보고자 한다).
우리의 불편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옷으로 덧입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에서 오는 불평이다.
우리는 이 땅의 것으로 덧입기를 바라기보다는,
아예 하늘에서 오는 새로운 옷으로 덧입기를 바란다.
돈의 옷
인맥의 옷
사회적 능력의 옷
학력의 옷
이런 것을 덧입어도 불편함이 사라지는데, 하물며 하늘로부터 온 옷을 덧입으면 얼마나 자유하겠는가?
3 이렇게 입는 것은 우리가 미래에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휴리스코 / 미래 수동태).
하나님 앞에서
미래에
벗은 자들로
발견된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너, 벗은 사람이구나!?”
4 우리가 스테나조(탄식하다, 신음하다, 불평하다)하는 것은, 바레오(내리누르다, 짐지우다, 고난을 당하다, 피곤하다 / 수동태)되어진 것처럼, / 옷을 벗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덧입고자 함이다, 스네토스(죽을, 멸망할) 대상이, 조에(생명)에 의하여, 카타파노(수동태 / 삼키다)되어지기 위함이다.
우리가 짓눌리는 것처럼 탄식하고 불평하는 것은,
옷을 벗기 위함이 아니라, 옷을 덧입기 위함이다.
옷을 덧입기 위함은, 우리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기 위함이다.
5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금(아르라본 / 공탁금, 첫불입금)으로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보증금은, 그 사람이 반드시 전액을 지불하리라는 첫불입금이다.
6 그래서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아는 것은, 몸으로 있을 때에는, 우리가 주님과 따로 있다는 것이다.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
7 우리는 믿음(피스티스)으로 걷는다. 에이도스(형체, 용모, 보는 것, 모양)으로 걷지 않는다.
8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선택하는 것(유도케오 / 기뻐하다, 원하다)은, 오히려 몸으로부터 떠나는 것,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엔데메오(거주하다, 있다)하는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선택하는 것
몸으로부터 떠나는 것
주님을 향하여 거주하는 것
이전에, 6절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몸으로 존재할 때에
또한 주님과 따로 있을 때에
그러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감을 가지고 선택하는 것 2가지를 이야기한 것이다.
9 그러므로 우리는 필로티메오마이(힘쓰다, 야망을 가지다, 높은 목표를 가지다)한다. 머무르든지 또는 따로 있든지, 그를 기쁘게 하는 자들이기를.
이제 높은 목표를 가지고 힘쓰게 된다.
그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몸에 있든지
몸을 떠나든지
10 왜냐하면 반드시 모든 이가 파네로오(드러내다, 분명히하다, 나타내다 / 수동태) 되어진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판대 앞에. 코미조(받다, 가지고 오다, 돌려 받다)한다, 헤카스토스(각 사람이, 각각), 그 소마(몸)을 통하여, 프랏소(행하다, 실천하다)한 것들을 따라, 아가소스(선한, 착한, 좋은)것이나 파울로스(나쁜, 악한, 가치 없는) 것이나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판대 앞에서 모든 이가 드러내어진다.
각 사람이 그 몸을 통하여 행한
선과
악에 대하여
돌려받기 위하여
연구
칭의, 양자됨, 성화의 복을 받은 자들은 죽을 때 어떤 유익을 누립니까?
신자의 영혼은 죽음을 통해 완전히 거룩한 영혼으로 탈바꿈합니다(히12:23).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몸은 땅에서 한 줌의 흙으로 변할지라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영혼은 죽을 때 거룩하게 변할 뿐만 아니라, 즉시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 곁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죽은 신자의 몸이 에수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살전 4:14).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죽은 신자를 두고서,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잠을 잔다고 말합니다. 신자의 몸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있으므로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그 상태로 있습니까?
몸과 영혼은 언제까지 분리된 상태로 있을까요? 부활의 날입니다(요 5:29). 그 날이 되면 신자의 몸과 영혼이 다시 결합할 뿐만 아니라, 몸도 영혼처럼 완저히 거룩하게 변할 것입니다.
제37문 : 신자가 죽을 때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유익을 받습니까?
답 : 신자는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쉽니다.
금생에 받는 유익들 : 소요리문답 29-36문 (구원론)
죽을 때에 받는 유익들 : 37문 (종말론)
영혼 : 완전히 거룩하게 됨 - 즉시 영광 속으로 들어감
육신 :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됨 - 부활까지 무덤에서 쉼
그리스도는 한 번 연합한 신자의 육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육신은 잠을 자는 것이지, 완전히 죽거나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 Thessalonians 4:14 NKRV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종말론
개인적 종말론 : 육체의 죽음, 영혼의 불멸, 중간상태
일반적(우주적) 종말론 :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죽은 자의 부활, 최후 심판, 최후의 상태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면, 부활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죽음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면, 부활은 ‘당연한 것’이다.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사실상 4:16–5:10은 하나의 통합된 단락을 형성

문맥 고려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바울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이 무너질 때’(5:1)를 설명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겉사람의 낡아짐’(4:16)과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것을 예비한다”(4:17)는 진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바울은 ‘겉사람’의 ‘낡아짐’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핍박과 고난이 그의 육체에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그렇다면 그 구절의 전반부에서 바울이 그와 같은 과정의 최종 결과물, 즉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멸절을 지칭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낡아짐
핍박과 고난
예수의 부활은, 첫열매다.
예수의 부활은 ‘모델 하우스’다.
예수의 부활은, 그 다음 열매를 예상케 한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 하늘 집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이에 대한 보다 문자적인 번역인 ‘우리가 무거운 것을 든 채로 탄식한다’가 바울의 의도를 더 잘 전달한다. 그는 염려 속에 한숨을 내쉬기보다는(RSV), 그가 자신의 몸으로 경험하는 환난의 무게 때문에 탄식하는 것이다.

무거운 것을 든 채로 탄식하다.
자신의 몸으로 경험하는 환난의 무게
바울의 소망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다.
바울의 소망은 ‘새로운 육체를 입는 것’이다.
여기서 ‘영지주의’와 반대된다.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동일한 성령이 그리스도인들 각자의 차례가 올 때 그들을 일으켜 부활의 몸으로 옷 입혀 주시겠다는 보증으로 그들에게 주신 바 되었다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역사하신다.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몸을 떠나는 것은 더 이상 믿음으로만 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주를 뵐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요한일서 3:2은 “우리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가시적으로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얼마나 오래도록 그가 몸으로 있든지 혹은 얼마나 빨리 그가 죽어 떠나든지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몸에 머무르는 것과
몸을 떠나는 것은
바울의 결정 밖이다.
바울의 결정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사도행전 18:12–17에 따르면, 바울은 총독 갈리오(Gallio) 앞에서 바울을 고소한 성난 고린도 지역의 유대인들에 의하여 베마(bēma)앞으로 끌려나왔다. 그러나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문제에 대해 재판대에 앉아 처결하기 거부하였고 바울을 고소한 자들은 베마(bēma)로부터 쫓겨나갔다. 바울과 그의 독자들 모두는 고린도 지역의 재판대 앞에 소환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정돈하여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참조, 롬 14:10).

고린도의 베마
자신의 삶을 정돈하여 살 필요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의 삶과 사역을 평가하실 것이고 신실하게 행한 자를 보상하실 것이지만, 신실하게 행하지 않은 자는 보상의 상실로 고통당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다. 고린도전서 3:10–15에서 바울은 이 인식을 교회들을 창립하고 세워나가는 자들에게 적용한다. 그는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떤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보상 / 고통
공적
틴데일 신약주석 고린도후서 (2) 하늘에 있는 집(5:1–10)

이 모든 것은 신자들이 이생의 삶에서 행한 바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옴을 의미한다. 신자들은 그들이 행한 행동들에 대해 주께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결과에 따라 보상을 받거나 해를 받게 될 것이다.

이생의 삶 - 중대한 결과
고린도후서, 4장 문맥
바울은 은혜로 직분을 받았다.
그는 자기 직분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진리를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모든 이에게 전파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이 세상 신에게 가리어졌고, 그들은 망하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자신들의 종됨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능력은 감추고,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박해와 핍박이 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역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와 핍박은, 오히려 바울 자신의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죽음과 같은 시련에 넘겨졌다.
그래서 그에게는 죽음이 활동하고 있었고, 반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생명이 역사하고 있었다.
바울은 자기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성령에 의해, 부활할 것을 확신하였다.
이 모든 일을 하는 이유는, 넘치는 은혜로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는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의 영혼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받는 고난을 가벼운 것이라고 표현하고,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무거운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은 지금 받는 고난이 아니라, 다가올 영광을 주목하며 산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5장 문맥
만일 땅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하늘의 장막 집을 옷 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생명이 사망을 삼키는, 새로운 옷을 입고자 함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이루실 것이고, 보증금으로 성령을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몸을 떠나 주님과 있기를 원하지만, 몸으로 있든지 몸을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몸으로 행한 선악에 대하여 보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 앞에서 바울의 권위를 고린도교회가 세워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너희도 하나님과 화목하라.
죽음의 공포에 대항하는 예방법
죽음은 사탄과 죄와 세상과 육체와 영원한 죽음의 폭압으로부터, 그리고 무수한 위험과 손실로부터 경건한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며, 그들을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고 복되게 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과 매장됨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경건한 자들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도 유익이 되신다(빌 1:12).
그리스도의 영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들은 많은 단계에서 죽음의 고통을 능가한다.
하나님을 분명하고 영광스럽게 뵈려는 열망과 그분의 성도들, 다시 말하면 우리 이전에 사람들 중에서 탁월하였던 그들을 만나고자 하는 소망이다.
우리는 육체 대신에 영광을 입게 된다.
죽음의 가시인 죄가 제거되어, 뱀이 해할 수가 없다.
하늘에 간 영혼은 거기에서 마지막 심판 때까지 머무르는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광의 나라의 완성과 충만한 복락을 기대하며 열망한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적인 과정’으로 생각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타락의 결과’로 간주한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보낼 상태가 아니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정복하신 것을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죽는 과정’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죽는 순간 곧바로 천국에 간다는 것을 보장받았을 뿐이다.
확실히 바울은 비범한 삶을 살았다.
바울은 영생의 진리를 굳게 확신했기에 큰 고난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삶은 좋고, 죽음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삶은 좋고, 죽음은 더 좋다고 생각했다.
부활하신 예수의 몸
죽을 몸 ---> 죽지 않을 몸
다른 문화와 신념 체계는 죽음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요 관점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 많은 종교에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고유한 믿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습니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영혼이 사후에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인 환생을 믿습니다.
과학적: 이 관점은 죽음을 생물학적 기능의 영구적인 중단과 개인의 삶의 끝으로 간주합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죽음은 수명 주기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며 노화 또는 질병의 결과입니다.
철학적: 철학자들은 수세기 동안 죽음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토론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이 의식과 자아의 종말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죽음이 영혼이 존재의 더 높은 차원으로 초월할 수 있게 해주는 변형적 경험이라고 믿습니다.
영적: 죽음에 대한 이 견해는 인간 경험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존재의 다른 상태로의 전환이라고 가정합니다.
죽음에 대한 문화적, 전통적 관점 또한 매우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화권에서는 죽음을 행복한 행사로 여기고 축하하는 반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죽음을 슬프고 침울한 경우로 여깁니다.
부활의 개념은 사람의 몸이나 영혼이 사후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와 같은 많은 종교에는 어떤 형태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 체계에서 부활은 종종 더 높은 존재의 힘이나 신성한 개입을 통해 발생하는 기적적인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죽은 사람의 몸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부활의 개념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생물학적 과정이 중단되면 현재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부활에 대한 생각은 많은 종교에서 공통된 믿음이지만,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며 과학적 증거에 의해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 / 적용
바울의 부모 입장에서 아들 바울은 어땠을까?
답답하지 않았을까?
인생을 낭비한다고 여겨지지 않았을까?
이상한 이단 종교에 빠져서 삶을 허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바울은 옷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는 새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옷은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옷이라고 했다.
그 옷은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은 이 옷 파는 일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였다.
높은 목표를 가지다
등산
우리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우리는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조급하게 뛰지 않는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는다.
서론 /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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