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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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는 마음
한 때 전세계는 중국으로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파송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 국의 선교사님들은 중국 여러 마을과 가정을 돌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1966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일어납니다.
문화대혁명은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냥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종교를 말살하기 위해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이제 중국의 기독교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사라졌으니 어떻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40년이 흘러 중국이 다시 개방되었습니다.
그 때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거의 멸종수준에 머물러 있을 거라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뚜껑을 열어보니 기독교인의 수는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입니다.
무려 4000만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닫혀있던 40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선교사님들이 사라지자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또다시 다른 동네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또다시 다른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해 복음은 산과 바다를 건너 계속 전파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없더라도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계속 전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선교사님들이 계속 있었다면 어쩌면 복음은 제한적으로 전파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이 사라지자 오히려 복음은 자발적으로 더 강력하게 더 멀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뤄어진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이 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이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중국은 1억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전세계에서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만큼 중요하고 강력한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론]
첫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5절, 17절, 23절에 반복적으로 나온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다’ 입니다.
예수님의 피난이야기가 모두 구약의 말씀들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쓰임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예수님 탄생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거기는 마리아가 중심인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요셉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길래 마태복음은 요셉을 집중하는 것일까요?
우선 그는 가난한 무명의 목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런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의 인간 아버지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자신과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 약혼녀가 갑자기 임신을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아니 괴씸했겠습니까?
만약, 요셉이 화가나서 신고하면 마리아는 간음죄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지켜주려고 조용히 파혼하려 했습니다.
그 후 요셉은 꿈에 나타난 천사를 통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으며 메시아 예수님이 그녀의 몸을 통해 태어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곧바로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려버립니다.
약혼기간에는 잠자리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여전히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그것을 감당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의 이런 성품때문에 주님은 요셉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경적 연결]
성경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 있습니다.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적용]
그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기도문을 암기하여 기도하고, 말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내 뜻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제목을 보면 압니다.
기도제목 첫번째, 두번째는 대부분 신앙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러면 세번째, 네번째부터 진짜 자기 마음이 투영된 것들이 나옵니다.
결혼할 때보면 첫번째, 두번째는 건너뛰고 세번째, 네번째만 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마치 배우자 기도제목처럼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내 뜻대로 이뤄지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소홀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뤄지는 게 정말 중요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묵상하고 기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고 알고자 합니까?
속으로는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보니 내 마음이 원하는대로 선택한 후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묻고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대학시절 딱 한가지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제 삶에 가장 갈급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목적도 없이 이 땅에 저를 보내시지 않으셨을텐데 저는 왜 살아야 합니까?’
이것이 그 당시 제 삶에 떠나지 않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물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제가 간절히 주님의 뜻을 구했기 때문에 주님은 제 삶을 인도해주셨습니다.
어떻게든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삶이 저를 목회자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들에는 분명히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자 간절히 기도하고 찾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둘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순종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3-15절입니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이 일어나서 밤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왜 이집트 일까요?
멀리 도망가고 싶어서일까요?
그것보다는 이집트로 가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하시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호세아서 1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셨다는 출애굽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요셉과 마리아, 아기예수님이 이집트로 피신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것은 구약의 출애굽이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듯이,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다면 새로운 출애굽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이스라엘, 즉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믿었기에 요셉은 순종하여 이집트로 떠난 것입니다.
21절에서도 주님이 요셉에게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하자 그는 곧바로 순종합니다.
그의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14절과 21절에 나오는 ‘일어나서’입니다.
그렇지만 살림거리들도 꽤 많았을텐데 갑자기 이렇게 이동하는게 쉬울까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곧바로 순종하는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내는 아기 예수님을 안아야 하니, 요셉 혼자서 살림살이를 챙겨 나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다시 알려줄때까지 이집트로 피신해 있으라니 얼마나 막막합니까?
자신이 인생의 키를 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키를 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키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바로 순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성경적 연결]
성경을 한가지 주제로 요약하자면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자들이 가는 길과 불순종한 자들이 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은 악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불순종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 세상의 뜻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성경에서 악인인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했기에 40년동안 광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울은 불순종했기에 왕에서 폐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예언자들의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여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적용]
그래서 이런 불순종의 역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 힘으로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를 윤리적 도덕적 인간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끝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순종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순종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어마어마한 순종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말씀 묵상을 통해, 기도를 통해 내 삶 속에서 순종할 작은 것을 찾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한다는 것은 대가를 치룰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셋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낮아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6절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헤롯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뿐 아니라 극렬히 저항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에돔사람인데 로마황제한테 아부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들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다고 하니 자신의 위치가 더욱 위협받는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방박사들을 통해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을 알아내 죽이려했는데 동방박사들이 그것을 알고는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니 화가 난 것입니다.
결국 그가 생각한 방법은 당시 대략 2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모두 다 죽이면 아기 예수님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헤롯의 이런 미친 짓조차도 결국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17, 18절입니다.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라마’라는 곳은 이스라엘이 멸망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사람들이 모였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인용한 이 구절은 이스라엘 아들, 딸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자 그 땅의 어머니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아기 예수님이 고향 베들레헴에서 쫓겨나 이집트로 가게 된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헤롯의 악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방해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결코 꺾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데에는 이처럼 누군가의 고난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23절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릴 것이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요셉은 이집트에 살다가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하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유대지방, 즉 살던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지방은 아켈라오라는 아버지 헤롯보다 더 잔혹한 아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다시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촌동네에 정착합니다.
메시아 왕이신 예수님이 촌동네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어쩌면 요셉조차 이해가 안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절대로 나사렛 같은 촌동네에 계실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이 메시아가 어찌 나사렛에서 날 수가 있냐며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나사렛에 사셔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것조차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면 무조건 나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조건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때로는 우리가 실패하거나 고난을 받고 낮아지는 것에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이동했더니 결국 돌아온 곳이 베들레헴보다 못한 촌동네 나사렛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이뤄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실패와 고난, 낮아짐이 뒤따라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다가 그렇게 된다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설날이면 음력으로 다시 1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실패와 고난, 낮아짐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이뤄지기를 바라십니까?
이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들의 삶 속에 일하실 것입니다.
2023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단, 우리가 어떻게든 주님의 뜻을 알려고하고, 그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 한 말입니다.
올한해 우리 교회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