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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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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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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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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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0.03UNLIKELY
Conscientiousness
0.07UNLIKELY
Extraversion
0.2UNLIKELY
Agreeableness
0.5UNLIKELY
Emotional Range
0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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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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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음을 넘어 보는 영성으로
본문: 욥기 42:5
욥은 출애굽 시대나 가나안 정복시대 또는 왕정 시대에 태어난 인물이 아닌 족장 시대에 태어난 인물로 추측됩니다.
그가 100살 넘게 살았다는 것과 그가 자기 집에서 제사장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볼 때 욥은 족장 시대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욥기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욥은 가정 안에서 제사장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들만 제사장 역할을 해야했던 출애굽 이후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이 제사를 자유롭게 집례할 수 있었던 족장 시대에 태어났던 인물로 추측됩니다.
그런 욥을 욥기서는 이와 같이 묘사합니다.
욥기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 “욥”
욥은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욥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요?
그렇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표현이 바로 “경외하며”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철없는 모습으로 그저 부모를 사랑할 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경외”라는 표현은 두려움을 아는 인지 능력이 있는 성인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상황이 펼쳐지거나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대는 마음이 포착될 때 두렴움을 가지고 저항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그 분 앞에 죄를 짓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그 내면에 형성되는 양가 감정 즉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두렴움 때문에 죄와 싸우는 자의 마음에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경외심”인 것입니다.
즉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연어가 산란기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원하는 상류에 알을 낳으려고 할 때 물살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칠 수록 물살의 저항 때문에 자신에게 고통이 전해지고 그로인한 고통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지만 곧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산란에 대한 환희’의 감정 때문인 것입니다.
연어는 이 양가 감정 모두를 품고 물결을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연어의 모습에서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할 ‘경외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연어가 그 양가 감정 “물살에 대한 두렴움과 산란에 대한 환희”를 가지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연어는 본능을 따라 산란을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를 누군가에 자랑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사단에게까지 자랑하고 싶어하십니다.
반면에 저와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 그리고 내일과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는 그 ‘신실함’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른 새벽도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다양한 핍박을 한다고 하여도 성삼위 하나님을 오히려 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자랑할 때,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할 때 사단은 늘 개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의인이라 자랑했는데 속이는 자, 시샘하는 자인 사단은 하나님께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욥이 까닭없이 당신을 신뢰한다고 생각하십니까?(우리가 신앙의 여정에서 던져보아야 할 질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까닭없이 라는 말은 이유없이 당신을 잘 섬기는 줄 아십니까?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새번역 성경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욥기 1장 9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새번역) 물론 타락한 인생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까닭”은 어떠한 일을 이루어 가는 데 큰 동기를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그 다양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 이유들이 잘 못된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하는 이유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 때문이십니까?
아니면 십일조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까?
주일 성수를 하는 것이 모든 요일이 온전히 주님의 것 임을 기억하고 그 분의 주권을 기억하기 위해 지키는 날입니까?
아니면 주일 성수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해야할 의무를 다 이행했다는 마음의 안도감이나 천국의 끝자락이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에서 지키는 것입니까?
타인을 구제하고 선교를 하는 이유가 내가 먼저 하나님께 너무도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돋보이고 싶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 같아서 행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어떠한 조건 때문이라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그러한 믿음은 다 걸려 넘어지는 믿음이 됩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저를 지도해주셨던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저는 천국이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래 물론 천국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게 맞지만 그래도 네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중심에는 십자가의 은혜가 보이는구나!” 그 때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 시절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타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아무 생각없이 했던 말인데 목사님께서 그러한 멋진 답변을 해주셨던 것 입니다.
저는 그 때 천국이 없더라도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타락한 인생들이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제안을 무시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시고 그 제안을 받아 들이십니다.
그리고 욥에게 재앙을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욥이 어떠한 까닭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한 것인지를 테스트 해보셨던 것입니다.
결국 욥에게 4가지 재앙이 주어집니다.
스바 사람들이 나귀와 소를 뺏앗고 이를 지키고 있던 종들이 살해합니다.(재산이
감소)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불로 욥의 양들이 타죽었습니다.(재산이
감소)
갈대아 사람들이 욥의 낙타를 빼앗고 이를 지키던 종들을 죽였습니다.(재산이
감소)
강력한 바람이 불어 집이 들렸고 그 집이 욥의 자녀들이 모여 있는 곳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욥의 자녀들 모두가 사망했습니다.(가족의
희생)
조건 없는 감사는 영성의 최고봉입니다.
욥이 진짜 대단했던 것은 이 4가지 재앙 앞에 자신의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욥기 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분명한 것은 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 다 사라진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하나님은 사단 앞에서 체면이 서게 됩니다.
그런데 사단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또 다른 제안을 합니다.
욥의 신앙이 조건적 신앙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합니다.
욥기 2:4 (NKRV)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그렇습니다.
욥이 자신의 재산을 잃었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자신의 육체를 해하는 시련을 가하게 된다면 반듯이 욥은 하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제안을 허락하십니다.
단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욥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 때문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게 되었고 너무도 극심한 고통과 가려움 때문에 질그릇 조각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긁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본 욥의 부인은 이와 같이 말합니다.
욥기 2:9 (NKRV)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의인도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학
“질병과 고난은 죄 때문에 일어났다.
가난과 불행은 죄 때문이다.”
이 말은 일정부분 옳을 때도 있지만 욥기에서만큼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포함한 인류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게 있으셨기 때문에 욥이 고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욥기의 결말에 등장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곧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실 때 사람들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인류의 고난을 대신하기 위한 “고난”이었지 자신의 죄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 중에서 다양한 어려움으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을 보시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와 같이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를 따지며 욥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욥기의 결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욥기의 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해해야 할 문장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은대로 거두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불교는 그래서 인생을 가리켜 고통의 바다”고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범함으로 인류에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뒤 덮이게 되었고 그로인해 인생은 장미빗 인생만 있는 게 아니라 그늘지고 어둔 인생도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고 해산을 고통을 이겨내며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지만 자신이 심은대로 거두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게 이 세상의 원리가 되었고, 그 원리의 지배아래 놓인 존재가 인류인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적인 원리를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경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여러분 모두가 심은대로 100% 다 거두어 들이는 인생을 영위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많은 부분에서 심은대로 거두어들이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온전히 임하여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많은 제한과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게 크리스챤의 삶이라는 것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 땅에서 사역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더 소망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바울이라도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 수 밖에 없고, 아무리 바울이라도 자신 안에 있는 육체이 가시를 끄집어 내어 온전한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것이 우리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인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집에 돌아가다가 차에 치이는 삶이 최고의 복을 누리는 삶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만큼 삶이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다면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죄짓지 않고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욥도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욥기 7: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고통의 문제에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죽기를 희망합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고통의 짐을 짊어지실 때 극심한 고통가운데 울부 짖으셨을 때가 있으셨습니다.
그 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위해 하나님과의 단절을 선택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던 그 순간이셨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그 순간을 가리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계셨는데 유일하게 인류를 구원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단절을 맞이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욥이 이제 듣기만 했던 신앙에서 하나님을 보는 영성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한해 주제 말씀은 말씀입니다.
로마서 10:17 (NKRV)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들음은 믿음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연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음을 넘어 하나님을 보는 영성에 이르는 믿음을 욥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듣고 내일도 듣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하나님을 보는 영성을 이루는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가져다주는 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들은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이 이 고통의 세계에서 살아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욥의 4친구들은 인과응보 즉 “네가 잘 못된 것을 심었기 때문에 그릇된 삶을 경험하고 있다.”는 논리로
욥을 책망했습니다.
이를 우리는 인과율이라고 말합니다.
원인이 없는 곳에 결과가 없다는 입니다.
원인이 악했기 때문에 지금 네 삶이 악하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욥의 환경을 설명해 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욥은 죄를 지어서 고난을 받고 있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서 온전한 신앙을 보기 원하시는 가운데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아내게 하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과율이 통하지 않습니다.
결론입니다.
때론 아무리 이해하려고 하여도 이해되지 않는 삶에 맞딱뜨리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기의 후반에 등장하시어 욥이 고난을 받은 이유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의 위대함만 설명하십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때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 욥기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바다 그리고 이 우주 이 모든 것의 기원을 인류는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 앞에서 늘 막막한 물음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의 이유에는 당신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욥은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저 듣고만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의 친구들에게 항변 했던 것 처럼 이런저런 말로 항변할 수도 있었을텐데 압도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는 그저 듣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욥기 42:2–5 (NKRV)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3 의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해로는 풀리는 않는 문제들 앞에서 늘 바른 선택만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인생을 한탄하고 시간을 허비하며 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모르고 걸어가다가 그 일을 선택했는데 기가막힌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묘미인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원인과 결과로 욥을 정죄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그 말 앞에 욥은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찾아가 “맞다 너는 잘못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다 네가 너를 시험하려고 네 삶에 재앙을 허락했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그저 자신의 위대함만 욥에게 들어내실 뿐이었습니다.
“창조의 때에 너는 부재했지만 나는 존재했다.”
“누가 바다를 통제하는 것 같으냐?”
“비와 눈의 근원은 누구인 거 같으냐?”
들음을 넘어 보는 영성으로...
우리의 귀는 복음을 들을 수 있지만 우리 앞에 펼쳐진 고난의 문제, 죽음의 문제, 가난의 문제등 인생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한계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한 한계가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고난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인생의 고통의 문제 앞에서 원인과 결과를 논하며 불만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욥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을 넘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환경과 상황에는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겠지를 말하며 자신의 사명의 길인 가장으로서, 한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부인으로서, 한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사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인생을 살아낼 때 우리는 욥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 42:5 (NKRV)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를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듣기만 했을 때에는 십자가에서 그를 부인했지만 그 들었던 말씀이 자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도는 없는 부활이라는 인생의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에는 듣는 영성을 넘어 예수님을 보고 만지는 영성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의 인생에 찾아온 부활은 쉽게 이해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욥이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순간에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욥이 만났던 것 처럼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인생을 통해 귀로 듣는 믿음을 넘어 눈으로 보는 믿음을 가지게 된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말씀을 남깁니다.
요한1서 1:1 (NKRV)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를 새번역 성경으로 한 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NKSV”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주어진 고통의 문제 앞에 하나님께서는 아주 선명한 답변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욥기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 풀리지 않는 고통의 문제 앞에 그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곳곳에 그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게 가능한 것이 우연인 거 같으냐?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는 “욥아 내가 네 아픔을 안다”는 말씀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고통의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하나님의 해명을 듣지도 못했으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였던 것입니다.
욥기 23:10 (NKRV)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비록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이 고난의 문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가는 그 길은 우리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시기에 오늘 나는 나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들의 삶, 즉 인생이 어느덧 하나님을 듣는 것을 넘어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데까지 이르게 할 것입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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