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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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클리닉/담당교수: 나상오 발표자: 이순정
발표일: 2023. 01. 16.
새로운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1:19-26)
b. 20. ‘전파하니’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탄생과 성장해 가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은 “그 때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가리키는 것은 스데반의 순교 직 후 일어난 박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 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와 사마리아와 같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8:1).
이 중 어떤 이들은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으로 이주했는데. 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도망친 땅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들이 복음을 전했는데, 불특정 다수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닌, 특정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은 이렇습니다. 이 대속의 복음이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복음의 보편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예수를 전파함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헬라파 유대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오랜 이민 생활로 “헬라화 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중 몇몇이 “헬라화 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또 순수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방인 교회 즉,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행11:20)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c1.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워집니다.(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기자는 이 부흥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주의 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의 손”에 사용된 헬라어 명사 χείρ(cheir, 케이르)는 ‘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상징적으로 '능력이나 힘, 군대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삼상 5:11, 대하30:12, 에스라8:22, 8:31, 욥19:21, 눅11:20…….)
이처럼 하나님은 박해로 인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안디옥이라는 이방도시에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부흥은 인간의 능력과 열정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할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부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부흥’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분은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몰려오는 것’과 ‘돌아오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 공생에 시절에도 예수님이 피신해야 할 정도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 왔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돌아오는 것’ 즉 ‘돌이키는 것’은 ‘원 상태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흥의 주역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역사를 인간과 함께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21절은 ‘주의 손 + 그들과 함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을 통해 일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작정하셨던 그 ‘대리통치의 의지’가 이 이방인 선교의 현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전하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인간의 어떤 지위나, 스펙, 능력, 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순종하는 한사람’, ‘예수 안에서 은혜를 체험한 자’, 그 ‘거듭난 한 사람’
을 통해 일하시길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를 그 역사의 현장에 세우시길 원하시고 세우셨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믿는 누군가의 ‘삶의 모본’입니다.
c2. 교회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의 모본’을 통해 세워집니다.(22-23, ‘착한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안디옥에서 일어난 이방인 선교, 즉 부흥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구브로 출신이었던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4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계획도시로, 주요 상업의 중심지였고, 강수량이 풍부했습니다. 넓은 도로와 멋진 건물들이 들어선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이주해 온 약 50여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안디옥은 선교의 중심지가 되기에 지리적으로 매우 합당한 도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디옥의 이면은 끔찍할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성적 부도덕을 부추기는 많은 이방 재단들이 가득했구요.
종교. 문화적으로 악한 세상풍조들이 넘쳐나는 세속화된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음란하고 타락한 안디옥과 같은 도시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나바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바나바는 안디옥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감격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속화 된 도시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회심한자들의 믿음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 세속화된 도시에서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세속문화를 거부하고, 거슬러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이롭고, 온갖 쾌락을 불러다 주면 택했던 삶에서 이제는 그것이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다면 거부하고, 거슬러 살아 낼 수 있어야 하는 한다는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을 거스르는 삶!
바나바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그 삶을 살아냄으로 모본을 보였을 것입니다.
성경기자는 바나바에 대해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공통점은 충성스럽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반듯함이라는 인성과 신앙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바나바가 살아온 삶의 전반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믿음 안에서 바른 인생을 살았는지, 하나님 앞에 신실했는지……. 인생에 있어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했던 중심에 스데반이 있었다면,
안디옥 교회가 성장해가는, 그 중심에는 바로 바나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더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는’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서두에 언급했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안디옥과 같이 세속화된 도시에서 그들이 말로만 전했다고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당시에는 오늘날의 4영리와 같은 이론이 체계화 되어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들 또한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믿음을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바나바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나바를 통해 더해진 부흥의 역사는 바나바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치 되어져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진정 신앙과 일치된 삶을 살아내고 계십니까?
세 번째로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양육입니다.
c3. 교회는 ‘양육’을 통해 굳건하게 성장합니다.(25-26,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는 안디옥에 모인 큰 무리를 양육하기 위해서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 1년 동안 동역했습니다.
양육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세워졌고, 주변에서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안디옥교회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조롱의 의미였는지 칭찬의 의미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안디옥에 모인 무리 안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변에서 알아보고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양육’은 반드시 성장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성장은 제자들에게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관계는 항상 일방적이지 않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 보면
양육을 통해 바나바와 바울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실 공식적인 사역은 안디옥이 첫 데뷔 무대였습니다.
그가 다소에서 어떤 사역들을 행하며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안디옥에 와서 바로 큰 무리를 가르친 것을 보면,
다소에서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때가 되니 하나님이 바나바를 통해 바울을 안디옥으로 불러서 안디옥 교회의 리더십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때가 바로 열리지 않는다고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길을 만드시고 세워 주시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를 위해 우리는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신실하게 살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에 세워진 이방교회 안에서 스승과 제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함께, 함께 성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건강한 교회의 성장입니다.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안디옥이라는 한 이방인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박해로 인한 “흩어짐”이라는 상황을 사용하셔서 안디옥이라는 타락한 도시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중심에는
그 과정을 환란으로만 여기지 않았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파했던, 헌신했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양육하고 믿음의 본을 보여준 바나바와 바울선생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떤 민족이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이 복음의 보편성에 입각하여 전하고 가르쳐서 제자 삼은 것입니다.
이일의 근거는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20절의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를 기억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아내고 계십니까?
교회가 무너져 가는 이 세대에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라고만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마태복음 28장 20절 같이 읽어보고 설교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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