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8. 수요예배. 파라볼라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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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3:13–24 NKRV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인사ㅆ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수요예배 설교의 자리에서 성도님들을 뵙는 것 같습니다. 11월 둘째주에 청년부 주관예배로 말씀을 나누었던게 마지막이었으니, 두달이 훌쩍 넘었네요. 부교역자에겐 많은 성도님들 앞에서 설교하는 자리가 사실 반갑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아직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것이 서투른 저의 미숙함 때문이지요. 설교는 계속해서 해봐야 실력이 는다고 수많은 선배 목회자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준비해서 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이 자리가 훈련의 장이니까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 기회가 주어지는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아직 영글지 않은 저 때문에 혹여나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지지는 않을까 항상 염려가 되거든요. 오늘도 그런 부담감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이시간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뛰어넘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릴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작년과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혹시 무엇이 달라졌는지 눈치 채셨나요? 작년보다 살이 조금 더 빠졌을까요? 그래서 작년보다 조금 더 잘 생겨졌나요? 사실은 제가 작년까지는 준전임으로 섬기다가 올해부터 전임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주일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4일을 교회와 나와 섬기다가 이제는 6일을 나와 섬기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전보다 더욱 큰 헌신으로 하나님과 성도님들 앞에 서게 된 만큼 좋은 일들이 더욱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많이 맺히는 2023년, 성도님들에게 더욱 덕과 유익을 끼치는 2023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론

우리는 2023년 “다시 초대교회로”라는 표어를 걸고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다시 한 번 부흥하길 소원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데요, 설교를 준비하며 “성도 여러분들께 이렇게 한 번 물어보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 유별나다 생각하는 모습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비그리스도인들과 우리를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떤 모습에서 구별이 될까요? 많은 모습들이 있겠지만, 아마 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장 많이 말씀하실 것 같네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은 꼭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새벽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우리만의 독특한 모습이지요. 자,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지 않습니까? 교회 밖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비그리스도인들과 우리를 비교할 때 우리는 여전히 구별이 될까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함께 모여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우리는 모였을 때나 흩어졌을 때나,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별이 되어야 할까요? 지금부터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차근차근 알아가봅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이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다른 편지들과 비교했을 때 요한1서는 조금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편지를 보낼 때에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다”라는 내용을 처음에 쓰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1서에는 전혀 그런 내용이 나오질 않아요. 그저 “우리가 이것을 썼다”라고만 나오지요.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평소에 편지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누가 보낸다”하는 내용을 찾을 수는 없지만 몇가지 점에서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이 보낸 편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과 요한1서에는 너무 비슷한 내용이 공통적으로 적혀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1서는 이렇게 시작을 해요.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1서 1장 2절 상반절에는 이렇게 쓰여있구요.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1서 1장 2절 하반절에는 이렇게 써있구요. 요일 1:2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상당히 비슷하죠? 요한복음의 저자가 사도 요한인 것이 분명하니, 요한1서의 저자도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스승의 글 중의 일부를 자기 편지에 인용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요한1서 4장 1-2절이거든요. 여러가지 증거들을 몇가지 더 제시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한 대표적인 두가지 증거만 보아도 우리는 이 편지가 사도 요한이 보낸 편지인 것을 확신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요한1서의 저자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유명합니다. 요한은 12명의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사도이지요. 그렇기에 그는 오랫동안 생존한 유일한 사도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그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리할 충분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기억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들을 되짚어가며 노년에 이르렀을 때에 사도 요한이 결국 기독교의 핵심으로 말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1서부터 요한3서까지가 요한이 노년에 이르렀을 무렵에 쓴 편지들인데요, 세 편지가 다 사랑에 관해 교훈을 하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또 요한1서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도 요한의 신앙고백도 등장합니다. 4장 8절인데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바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겠지요.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자, 그러면 그리스도인을 어떤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였을 때는 물론이고 흩어졌을 때에도,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밖에서도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구요. 사랑이 가득한 삶,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를 판가름할 때에 따져볼 수 있는 여러가지 신앙의 주요한 시금석 중에 하나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지금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를 보려면 내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면 되고, 우리 교회가 지금 건강한지를 보려면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이러한 점을 명확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을 함께 볼까요? 요일 3:14-15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새번역으로 보면 지금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새번역으로 한 번 더 읽어드릴게요. 요한1서 3:14–15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14절에서 요한이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음을 즉, 구원받았음을 무엇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까?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 곧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까지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의 가장 큰 증거가 곧 하나님을 닮은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또한 요한은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라고 합니다. 미움과 죽음은 같은 근원에서 나옵니다. 미움과 죽음의 근원은 어둠이요 사탄이지요. 마찬가지로 사랑과 생명도 같은 근원에서 나옵니다. 사랑과 생명의 근원은 빛이요 하나님이십니다. 고로 어둠과 사탄에 속한 자에게서는 미움과 죽음이 나타납니다. 빛과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서는 사랑과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구요. 그러니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둠과 사탄에 속하여 형제자매를 미워하던, 빛과 하나님께 속하여 형제자매를 사랑하던 둘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의 가장 큰 증거가 곧 하나님을 닮은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15절에서도 요한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의 가장 큰 증거가 곧 하나님을 닮은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어느정도는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한계에 부딪히고 더 이상 사랑하기가 어려워지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지만 그것이 감사와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고 되려 미움과 핍박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또 우리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 생각보다 훨씬 큰 희생을 감당해야 할때도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지기 마련이지요. 저는 그동안 만나온 많은 성도님들께서 이 지점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분들께서는 한결같이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구요. 전도사님 세상은 계속해서 저희를 미워하고 핍박할 뿐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사랑하며 섬겨야 합니까?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기려다 제 형편이 어려워질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만큼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건가요? 성도님들께서도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으시지요? 제가 한 번 되묻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사랑하며 섬겨야 할까요? 도대체 우리는 얼만큼 사랑하고 섬겨야 할까요? 잠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파라볼라노이

파라볼라노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이 말은 3세기 중반, 데시우스 황제가 로마를 다스리던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당시에 엄청난 전염병이 로마 전역을 휩쓸었는데, 도무지 손쓸 수 없는 전염병의 위력 앞에 로마 당국은 아무런 대처 없이 도대체 이 일이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신의 뜻을 묻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명씩 사람들이 죽어나가 도시에 시체가 가득 쌓여가고, 부유한 사람들은 서둘러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달아다던 중에 로마는 이 일의 원흉으로 기독교인들을 꼽았습니다. 로마의 신들은 거짓 신들이며, 자신들의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분노하여 로마 전역에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지요. 로마 황제는 이제부터 로마 백성들이 로마의 신들만을 섬기도록 지방의 모든 관료들에게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종교 활동만을 할 수 있도록 통제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증명서를 찍어 주도록 하였지요. 이 증명서가 없으면 로마 황제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전역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신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였지만 전염병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방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가 병의 증세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골수에서 시작한 열병이 얼굴의 종기로 발효되었으며, 지속적인 구토로 창자가 뒤틀렸고, 눈에 피가 찼으며, 입에서 악취가 났고, 목은 부어올랐으며, 발이나 팔다리 일부가 썩어갔다. 이로 인해 불구가 되거나 신체 기능이 저하되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청각이 막히거나 시력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며칠간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임종을 맞이한다.’
극심한 전염병이 유행하는 상황이 되면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서 친한 이들의 시신도 방치하든가 순간적 향락에 빠져들었다면,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이렇게 전한다. 대부분의 우리 형제들은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헌신으로 서로를 돕고,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를 돌보았으며, 그러다가 자신도 질병에 감염되면 이 세상을 기쁘게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해준 사람 가운데 다수가 죽었습니다. 장로, 집사, 평신도를 막론하고 우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잃어갔습니다. 강한 믿음과 경건에서 나온 이런 형태의 죽음은 순교에 못지않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성도의 눈과 입을 감기고 다물게 하고 어깨에 업고 시신을 옮긴 다음에는 안아서 정성을 다해서 씻기고 수의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곧 자기 자신도 같은 의식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즉 죽었다는 의미)(Eusebius, 7.22).
당시 카르타고에서 활동했던 작가 폰티우스 역시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병자는 친구에게도 버림받았으며 아무도 자신의 잔인한 이익 외에는 돌아보지 않았던 상황이지만, 기독교인들만큼은 사랑을 베풀었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독려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베푸는 일에 뛰어들어, 자신을 박해한 자들까지도 사랑하면서 병자들은 물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까지 보살피고 죽게 되면 장례 의식까지 치러주었다는 것이다(Pontius Carthage, 9).
키프교안의 설교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Pontius, Vita Cypriani, 9.)
이러한 수고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키프리아누스보다 살짝 늦은 시기인 3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기독교 문필가 락탄티우스는 정의와 덕을 논하는 글에서, 고아와 과부 및 아픈 자들을 돕고 돌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경건’은 바로 이방인들과 가난한 자들의 주검을 매장하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락탄티우스는 타인의 주검을 경건하게 마무리해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들 나름의 정의와 덕을 부르짖던 로마 시대의 문필가나 철학자들, 예컨대 키케로 같은 이들이 전혀 손대지 못한 영역, 그들의 사상과 기독교 사이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라 비교 설명하고 있다(Lactantius, 6.12). 실제로 전염병 유행기의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은 죽은 시체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리고 피하는 데 비해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염자들을 돌보고 죽으면 정성껏 매장까지 해주는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큰 감동을 받았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선행은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끝난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4세기 중반에 다시 전염병이 유행하던 상황에서도 “기독교인들의 열심과 경건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히 드러났다. 오직 그들만이 이처럼 비참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과 동정심을 행동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종일 죽은 자들을 돌보고 장례를 치렀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체들이 무수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기독교인들은 굶주려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 사실은 널리 알려졌고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이 사람들만이 진정 경건한 사람이며,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Eusebius, 9.8).”라는 것이다. 기독교를 혐오하면서 그 전파를 막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던 4세기 황제 율리아누스로서도 기독교의 이런 선행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의 장례 의식을 낮에 치르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까지 내린 적 있다. 기독교인의 경건한 장례 의식,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내렸던 조처였다. 또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교도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불경건한 갈릴리인들(즉 기독교도들)’은 인간애(φιλανθρωπίᾳ. 필란트로피아)를 실천하면서 자신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물론 이교도들 가운데 불쌍한 자들도 돕는다고 하면서,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도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본받아야 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eg. Fragmentum Epistolae.305 B-C).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말이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 곧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Persons who risk their lives)이라는 용어였다.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 παραβαλανεῖς 혹은 παρἀβολοι에서 유래했는데, 초기 기독교에서 자기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병든 자를 돌보거나 사망한 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등 형제애를 실천한 이들을 칭하는 용어였다. 이들을 로마인들은 ‘파라발라니 parabalani’라고 불렀다. 3세기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파라볼라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위난자들에게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했다는 중요한 증거였다. 파라볼라노이라는 용어는 에우세비오스의 ‘데오파니’(Theophany, 325)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3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에서 역병이 유행할 때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 휘하에서 일군의 조직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기희생적 헌신은 3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사망률의 현저한 감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병든 자를 간호하고 위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푼 결과로 어떤 이는 죽음을 맞기도 했으나, 모든 치료가 중단된 상태에서 기본적인 간호만으로도 사망률을 현저히 낮출 수가 있었다고 의사학자 맥닐은 주장한다.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쇠약해진 이들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방 종교 신봉자들에 비해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다.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은 기독교 공동체 밖으로 확산되어 사망률 감소에 영향을 끼쳤다. 둘째, 이교 숭배자들의 회심과 기독교로의 개종, 곧 종교적 이행(移行)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인들이 베푼 형제애적인 사랑은 이교 숭배자들의 마음을 열어 기존 종교를 폐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수용하는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고대의 키프리아누스나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역사가인 에우세비오스 등은 물론이지만 우리 시대의 미국의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도 이런 역병이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역병은 이방종교의 쇠퇴를 가져왔고, 기독교 성공에 기여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생명에 대한 사랑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이상에서 제시한 초기 기독교회의 사랑의 실천이 오늘 우리들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절정에 달했을 때,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와그의 사제들은 그들의 주교지에서 매일 200~300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정도였다(Cartwright & Biddis, 2004: 47). 그란트(R. M. Grant)는 2세기 말 로마 제국의 전체 인구를 6천만명 정도, 로마시 인구를 7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그 가운데 기독교인의 수는 7천 명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후로 기독교인의 수는 10년마다 40%씩 증가해서 4세기 중엽에는 3천만 명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Grant, 1977: 6 ; cf. Stark, 1996: 10, 74).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 전체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사랑의 실천은 결과적으로 이교도들의 종교적 이행을 가져와 이교의 쇠퇴와 더불어 기독교 성공을 가져오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그러기에 로마인들은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라고 말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사랑하며 섬겨야 할까요? 도대체 우리는 얼만큼 사랑하고 섬겨야 할까요?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물들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단순히 부담스러운 말씀이 아니라 놀라운 축복이 담긴 말씀이다.
요일 3:21-23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부흥은 여기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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