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ieve in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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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첫문장이 중요하다.
셋으로 된 모든 것은 완벽하다. 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세 가지 질문』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에서 한 왕이 등장하는데 그는
1) 언제 시작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2)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다면,
3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이 세 가지에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세가지 요소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다. 논리, 감성, 신뢰다. 이처럼 믿음에도 3요소가 있다.
믿음의 3요소
믿음의 3요소
정통 기독교에서는 믿음의 구성요소 3가지를 내용, 동의 신뢰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고 할때는 거기에 내용이 있다.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믿은것이 무엇인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리라. 라는 말씀이다.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두번째는 믿음에 대한 동의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내가 그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마음으로만 믿어서는 안되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바로 동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갖는다고 할 때 믿음의 내용과 그것에 대한 동의만 있으면 되는 것일까?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 기자는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는다고 말한다. 마귀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내용을 알고 그것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바로 믿음의 세번째 요소인 신뢰가 없는 것이다.
신뢰는 단순히 믿음의 내용을 알고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신뢰는 실제로 내가 믿는 그것에 내 존재 전체를 던져넣는 것이다.
Believe and Believe in
Believe and Believe in
영어에서 믿는다고 할때 believe 라는 단어를 쓸때가 있고 believe in이라는 단어를 쓸 때가 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둘 중 하나만 쓰면 되는데 왜 굳이 헷갈리게 구분해서 쓰는걸까? 호주 공동체에 있을때 대표셨던 존 목사님이 이 둘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적이 있다. 의자를 가지고 오셔서 앉아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자 밑에 폭탄이 있어”. 그러나 나는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폭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 존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움직였다면 당신은 나를 believe in 한 겁니다. Believe in은 생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내용과 동의가 실제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 따라서 내 행동에 변화가 있는 것이다.
신뢰를 시험하는 마귀
신뢰를 시험하는 마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마귀가 예수께 시험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사단은 예수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 지를 시험하고 있다. 그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한다면 성전 꼭대기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사단이 하는 것이 예수의 신뢰를 시험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1) 그가 너를 위하여, 2)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3)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뛰어내리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헌신을 하면 그것에 따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단이 예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은 그의 헌신이나 결단이 아니다.
지금 사단은 예수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예수의 생각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단은 예수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의 안전을 생각해라. 하나님이 너에게 얼마나 잘 해 주실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라.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위해서 천사들을 보내고 니가 위험에 처할 때 구해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라. 마귀의 도전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던것과 다를것이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불신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꿈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에 걸쳐서 분당우리교회 꿈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1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찬수 목사님에게 주신 비전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10년전 어느날 자고 있는데 새벽 3시에 하나님께서 잠을 깨우셔서 일만성도파송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재정신이면 할 수 없는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셨다고 한다. 처음 이 비전을 나눴을 때 모두가 안된다고 말했다. 신학교 교수님들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강행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1차로 29개 교회를 분립개척 했는데 교회의 일꾼 80%가 나갔다고 한다. 그것도 일부러 교구를 그렇게 편성해서 교회 안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분들 위주로 분립을 준비한게 아니라 정말로 잘 훈련받고 헌신된 분들이 분립해서 나가도록 조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까 지금 분당우리교회에 남아있는 분들은 그냥 교회를 예배보러 왔다갔다 하시던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당장 리더들이 부족하고 주일학교 교사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세미나를 하던 월요일 아침에도 교역자들과 비상회의를 해야할 만큼 교회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어수선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내부적으로 전보다 약하고 어려워진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고 계속해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수요일에 호주에서 방문하신 김찬수 장로님이란 분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TNF모임을 위해 모란역에 갔다. 가는 길에 장로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목사님하고 같이 가야지 길을 잃어버리지 않지요. 여기에서 믿을 만한 분이 목사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저는 믿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만 믿으셔야 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성령님이 장로님에게 이 말을 해주길 원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덧붙여서 말씀을 드렸다. 장로님 길을 잘 찾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혹은 잘못들었다고 생각이 들 때 왜 하나님께서 나를 그 길로 인도 하셨는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목적지가 중심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의 키워드는 청년, 유학생 그리고 아랍선교다. 그 말은 어르신과 아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온 세대가 다 함께 예배하는 건강한 교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은 다음 세대인 청년들과 유학생 그리고 아랍선교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 건물 3층을 청년과 유학생들을 위한 교육공동체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그 이유는 주일에 한번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젊은이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서로 부대끼고 같이 지내면서 매일 예배를 드리고 훈련하면 마음에 회복이 일어나고 주님의 사람으로 잘 서가는 것을 공동체 안에서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머리 속에 대략 어떻게 디자인을 해야할지도 다 구상해 놨다. 사실 이것을 위해서 많이 기도 하지 못했지만 그냥 닭이 알을 품듯이 마음 속에 품고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만약 분당우리교회 프로젝트에 최종 선택이 되면 우리는 그 일을 먼저 시작하면 좋겠다.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질문해야 하는것은 어떻게하면 내 뜻을 이룰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삶 가운데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계속 물어야 한다. 그럴려면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Every thought we think, in every hour we live, must be, not necessarily about Christ, but it must be the thought Christ would think were he placed in our circumstances and subject to our conditions.
한나 휘톨 스미스
이세상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무신론자도 믿음이 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에게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내용과 동의는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뢰가 없다. 왜냐하면 신뢰는 대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는 관계다.
신뢰는 관계다.
따라서 신뢰는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믿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신뢰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맡길 수 있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집 열쇠를 주지 않는다. 가족 외에 내 지갑과 신분증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누군가에게 나의 소중한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는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한 내용과 동의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신뢰관계라는 것이 무엇인가?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지난주에도 나눴지만 나는 놀고 있는데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가 아니다. 이찬수 목사님의 말씀대로라면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신뢰하는 믿음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것이다.
신뢰하는 믿음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면 작동하는 믿음이고 실패하면 작동하지 않는 믿음인가? 그렇지 않다. 때론 실패한것 같고 길을 잘못 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내용과 동의를 포함하지만 신뢰가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믿음이 작동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다. 관계의 문제다. 관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는것이 바로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아무리 실패해도, 잘못해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에 길을 잘못된 선택,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너무 두려워 하지 말라. 그러나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하라. 내중심과 생각을 나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라.
신뢰는 신뢰하지 않음을 거부한다.
신뢰는 신뢰하지 않음을 거부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신뢰때문에 마귀의 시험을 거부하셨다.
1) 그가 너를 위하여를 거부하셨다.
2)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를 거부하셨다.
3) 네 발이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를 거부하셨다.
주님은 자기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셨다.
오히려 주님은
1) 그가 너를 위하여를 내가 그를 위하여로 바꾸셨다.
2)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를 내 손이 십자가를 지고로 바꾸셨다.
3) 내 발이 부딪치지 않게를 내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로 바꾸셨다.
오늘 사단은 시편 91편을 인용하여 예수를 시험했는데 마귀가 갖지 못한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여기에 신뢰관계가 있다. 아버지를 믿고 사랑하는 아들과 그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결론: 참된 믿음은 그가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하여로 바뀐 인생을 사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요구 하시는 것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Believe에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Believe in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이뤄지는 인생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