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은혜의 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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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민족의 명절인 설날 당일, 주일 오후 찬양예배에 나오신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설 명절인 오늘, 빠질 수 없는 인사를 해야겠죠. 이렇게 인사하시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한민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는 특이한 풍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왔거나 나라에서 지정한 일명 ‘명절'이 되면 그 동안 못봤던 가족, 친지, 고향 사람들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깁니다. 우리나라는 겨울 초 새해에 설날에 한번, 가을에 추석으로 한번 그렇게 가족들을 만나러 갑니다. 가족들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면 반갑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하면 시간이 금방갑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명절이 싫어서 가기 싫은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명절 스트레스에 대한 것입니다. 통계를 보니 기혼자의 명절 스트레스 1위는 용돈, 선물, 명절 음식, 교통비 등 너무 많은 지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음식 준비가 힘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성길이 너무 멀어서, 가족,친지들과의 갈등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혼자의 스트레스는 경제적인 것에 대한 문제가 2위이고 1위는 명절 잔소리였습니다. 결혼은 언제할거냐, 취업은 언제할거냐, 월급은 얼마니, 애인은 있니? 등의 말을 듣는 것이 너무나도 스트레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3위는 친척과 비교될것 같아서 였습니다. 주로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은 미혼은 부모, 기혼은 배우자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결혼을 한 사람이나 하지 않은 사람이나 기쁘게 즐겁게 만나야 되는 명절의 가족 모임이 다르게 다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를 수 있습니다. 굳이 명절 스트레스가 아니더라도 서로의 말과 행동들이 위로가 되기 보다는 부담이나 어떤 짜증으로 들려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고 걱정되서,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의도와는 달리 해석될 때가 우리 주변에는 아주 많죠. 결국에 이것은 서로를 옥죄는 말과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듣고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있는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다가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자신이 자라셨던 나사렛의 회당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이사야의 글을 받으신 후 읽으시고 설교를 하시고 앉으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이 모두 귀에 응하였다고 하십니다. 읽은 본문 이후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내용이 더 익히 들었던 내용이지만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에 더 초점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사도행전에서도 이 회당이라는 장소에 대하여 많이 쓰고 있습니다. 즉 이 회당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당시 회당과 거기서 있었던 예배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그곳은 건물의 의미보다 사람들의 모임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그것은 마을이나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예수님 시대에 대부분의 마을 회당은 아마 어떤 사람의 집의 개조된 방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나사렛 같이 작고 초라했던 마을의 회당은 건물보다는 어떤 모임의 형태만 띄고 누군가의 집의 방을 사용하고 있엇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모인 모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가에 대해선 성경에 나오는 내용가지고서는 알기가 힘듭니다. 회당예배에 대한 지식은 말로 전해진 율법을 문서화한 미쉬나 같은 고대의 유대교 자료들이나 역사가들의 자료에서 얻어야 합니다. 예배 순서를 알아보자면, 일단 10명의 남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예배는 회당예배의 조건을 만족했내요? 회중은 신명기 6:4-9절에 기록되어 있는 쉐마를 암송합니다. 그런 뒤 그들은 함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율법책인 토라를 읽고, 그 뒤에 선지서를 읽습니다. 이 본문들을 히브리어로 읽고 난 뒤 예수님 당시의 언어였던 아람어로 번역해서 다시 읽습니다. 그 다음에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 해석은 일반적으로 앞에 읽었던 것들과 연관되어서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축복과 더불어 예배가 마무리되게 됩니다. 뭔가 구약에 나오는 제사보다는 오늘날의 예배 형태와 많이 닮아 있죠? 아마도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은 이 예배순서들 중 해석을 하는 순서 동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사야서 61장 1-2절의 말씀과 58장 6절의 말씀을 섞어서 인용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용한 구절의 있던 부분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에는 없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난 뒤의 첫 사건을 이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으면서 예수님의 설교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사역으로 본문의 내용이 나타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해석해주시는 부분,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강해설교를 해주시는 부분에 나오는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고자 하시는 것,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누가복음이 이야기하고 싶은것, 나아가서는 사도행전의 주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사역을 해야하는가에 대해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의 머릿말 부분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는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자기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3:22 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이 사건 이후로 누가복음은 성령이 충만하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강조했습니다. 당시에 듣고 있던 회중들이 그렇게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전까지 누구도 하지 못했던 특별하고 유일무이 사역을 위해 왔다고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즉 이사야를 인용하는 것으로 내가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에서 이야기하는 그 메시야이며 여호와의 종이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은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의 정당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특별하고도 특별한 하나님의 임무는 이 말씀에서 4개로 왕적이고 선지자적인 사역으로 나타내십니다.
그 임무의 근본적인 것은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유앙겔리온, 기쁜 소식이죠. 기쁜 소식에 대해서는 예수님 께서 하신 말씀 중 뒤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자들의 가난함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문자 그대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것일까요? 물론, 그 당시에도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위로를 얻을 것이 없고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소망이 적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한창 성장을 하던 시기이긴 했지만, 가진 것은 많지 않았던 60,70,80년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죠. 이 말씀에 그러한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우리가 도와야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의미가 거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인 혹은 사람과의 사귐에서 배제되어 외로운 사람, 버림받은 사람, 아니면 여러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 영적으로 궁핌해서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가 포함됩니다. 이 사람들의 유일하게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다른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5:3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살아가며 예수님을 닮아가야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도 그러한 영적으로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 첫번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로라는 이미지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경고를 무시하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추방된 바벨론의 포로, 유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이 추방되서 포로가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죄의 결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즉 포로가 된 것은 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뜻합니다. 죄에 사로잡혀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 굴레에 빠져서 허우적 대고 있는 것이 죄의 포로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돌아가서 성벽과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했던 바사왕 고레스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사도행전에서 자유는 죄 사함과 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영적으로 포로된것이 볼 수있는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으로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쫓아내신 것은 사탄의 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눈먼 자를 다시보게 하는 것입니다. 눈이 먼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흔한 질병이었습니다. 이것은 추측이긴 하지만, 중동은 식량이 풍족한 환경은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은 잘 먹지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영양이 불균형한 사람이 많았 것입니다.또한 안경이나 시력교정술같은 것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은 시각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도 눈 먼 사람들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귀먼자들이나 앉은 뱅이도 있는데 눈 먼자를 이야기한 것은 그만큼 대표적인 장애였다는 것이겠죠. 이들은 성전에서도 배제된 계층이었습니다. 사무엘하 5:8 입니다.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누가복음은 맹인이 다른 맹인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에 대한 말씀에서 눈 먼 것을 비유적으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눈을 뜨게 하시고 보게 하시리라는 것도 또한 누가복음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24 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던 제자들의 눈이 밝아집니다. 다른 예로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눈이 멀었다가, 나중에 눈을 뜹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생겨서 그분의 하시는 구원 사역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세번째는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억압되어 있는 사람,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면 깨어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가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무언가에 억눌려 있는 것을 풀어 주시고, 깨어진 자를 고치십니다.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다양한 치유 사역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사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한다는 구절은 주로 인용하고 계시는 이사야 61:1-2 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이 어디서 왔는지는 많은 학자들이 이사야 58:6 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8:6 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자비와 공의를 이웃에게 실천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변엔 깨어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경기가 전 세계적으로 안 좋은 지금, 경제적으로 안 좋은 사람은 차고 넘쳐날거구요. 사람에게 속아 무너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구요. 어쩌면 교회에 상처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그 때의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상황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한 이스라엘과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자비와 공의를 제대로 우리에게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복음을 선포하는 결과가 무엇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냐면 그것은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포로가 된 자가 풀려나고, 눈먼자가 보게 되고, 깨어진 자가 고침을 받는 것은 주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는 레위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희년입니다. 이 희년에는 종이 되었던 자들이 종으로 풀려나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땅이 돌아오고 돈이 없어서 빌렸던 빚이 면제가 되는 등의 조치들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는 축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주님만이 선포하실 수 있는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희년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시작점인 것처럼 예수님은 구원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선포하십니다. 깨어지고 상하고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우리는 이러한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마치신 뒤 앉아서, 회당의 회중들에게 이것이 오늘 너희의 귀에 응하였다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나와있는 말씀들이 그것이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내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은혜를 선포할 메시아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뒤는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심지어 낭떠러지에서 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분께서 은혜를 주시러 오신 하나님이고 그 은혜를 우리는 받았음을 말입니다. 그 말씀이 듣는 우리에게 들렸고 그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 땅에 자유를 주시는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비전이 우리의 비전인줄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해야합니다. 참 된 그리스도인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그 어디에서도 누군가를 억압하기 보다는 자유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올 한해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그 큰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시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케 하는 은혜의 해를 곳곳에 전파하시는 2023년 한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