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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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1. ‘창세기 1:1’ 위대한 선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히브리어로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엣 하사임 엣 하레츠
이거 제가 한 랍비님이 읽은 음성을 준비했는데요. 한번 들어보시죠.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이 위대한 선포가 성경의 문을 엽니다. 이건 선포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누구의 인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구의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읽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야기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에 대해서 당대 주변 국들이 가지고 있던 신화와 논쟁하고 있다고 나누었습니다. 즉, 창세기의 저자는 창세기를 저술하며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밝히며 시작하는 것이죠.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누구인가? 바빌론이 말하는 티아맛 인가? 혹은 에리두에서 말하는 신 닌투르 인가. 그것도 아니면 ‘바알’인가! 수 많은 신들이 창조자라는 이름으로 불이었고, 찬양받았고, 숭배받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는 그런 신과 신들의 싸움과 결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는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죠. 이런 주장은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시편역시 동일한 내용을 노래하고 있는데요. 시편 120-136편은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특히 시편 121편을 볼 건데요. 유진피터슨은 시편 121편을 명절을 맞이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그런 순례자가 길을 거닐며 이 노래를 할 때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를 주시하라 이야기 합니다. 즉, 시편 121편 1절은 이렇게 이야기 하죠.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의 눈이 닿는 산이 어떤 의미입니까? 산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 가장 높은 곳, 산 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바로 산당이 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곳곳에 있는 산당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곳곳에서 벌어지는 우상숭배와 우상을 향한 제사와 우상을 향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간절함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곤 합니다. 운동선수의 징크스라거나, 전날 밤의 꿈에 따라 오늘 행동의 조심성이 달라진다거나, 요즘은 덜한 것 같은데. 시험보기 전 음식을 조심하는 등의 행동들 역시 그런 것들이죠.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집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며 이스라엘 지역을 거닐며 마을과 마을을 지나며 그들의 생활을 보며, 주변의 산을 보며 산에 있는 산당을 보며 이스라엘 곳곳에 얼마나 우상들에 대한 신앙이 퍼져있는지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스라엘의 삶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시편 121편이 노래되는 것이죠.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드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바알인가. 아세라인가. 아르둑인가. 무엇인가. 121편 2절입니다.
“[시12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한번더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아멘
순례자들은 이 노래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가며 되뇌입니다. 눈에 보이는 수 많은 산당과 우상과 이스라엘 곳곳의 삶의 흔적들을 보며 나의 도움은 이것이 아니다. 다시 되뇌입니다. 나의 도움은 나의 삶은. 나의 인생은. 나의 존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그분께 달려있다.
이 모든 메시지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 많은 징크스가 우리 마음을 흔들고, 다양한 세상의 메시지가 자신이 ‘주인’이라며 우리의 생각을 흔듭니다.
‘돈’! 너무 중요하죠. 그거 없이 현대 사회를 어찌 살아갑니까? 당연히 당연히 필요하죠. 그러나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돈을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모든 것의 가치를 메길 수 있도록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와있고, 편만하게 퍼져 있습니다. 이것 없이는 사실상 생활이 불가능하죠. 어쩌면 이런 것들 덕분에 우리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편안함과 그런 익숙함이 어느새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주인 노릇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창세기 1장 1절은 그리고 시편 121편은 그리고 성경은 우리를 향해 이야기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이가 누구인가? 너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 너의 일상은 누구를 통해 유지 되는가? 너희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성경은 그 모든 질문에 단 한의 대답을 제시합니다. 아니 선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바라’에 대한 오해
이런 위대한 선포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볼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바라’라고 하는데요. 우리말로 하면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창조를 의미하는 단어가 몇가지 있습니다. “아사, 파알, 야차르, 쿤”같은 단어들이 “만들다”, “형태를 빚다.” 같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라”는 다른 단어 “야짜르”와 “아사”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만 독점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하는 창의적인 행위나, 우상들의 행위에는 “바라”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바라’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 독특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된다는 용례로 인해 사람들은 이 단어에 주목하게 되었는데요. 어떤 이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바라는 어떤 재료가 없이 만들 때 사용되며, 아싸는 재료를 가지고 만들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창세기 1장 1절의 이 위대한 선포는 하나님의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중요한 단서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바라’라는 이 단어는 총 47번 사용되었는데요. 분명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즉, ‘창조’는 하나님만의 특권이며, 사람은 그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라’라는 단어가 사용된 문장들을 잘 살펴보면 용례의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무조건적으로 ‘무’에서 ‘유’의 창조에만 사용되었느냐? 하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사야 43:1을 보시죠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기서 “창조하신”이 바로 ‘바라’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지으신 이”에 사용된 것이 ‘야차르’이고요. 그런데 창조와 지으신이 무에서 유를 유에서 유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고요. 더욱이 야곱을 창조하실 때. 무에서 야곱을 만드신 것은 더욱더 아니죠.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 태어났으니까요. 한 구절 더 보실까요. 이사야 43장 7절 입니다.
“[사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는 ‘바라’ ‘야차르’, ‘아사’ 3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는데요. 이 세가지를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시편, 창세기 등에서 조금만 살펴보면 ‘바라’의 용법이 무에서의 창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3. 그럼에도 ‘바라’
그럼에도 ‘바라’라는 단어는 중요하고 관심을 둘만한 단어라고 생각하는데요.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이 바라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고, 그럼으로 창조는 사람이 행하거나, 참여할 수 없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온 우주만물에 대한 창조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지어진 모든 것을 포함해서 그러습니다. 심지어 물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측면들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세상의 권세에 대해 가르치며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가르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르치며 또한 세상의 원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임을 가르치기도 하고요.
세상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구성과 문화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심을 볼 때에 우리의 역할은 ‘감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웠던’세상. 아담과 하와 이후로 망가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를 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이죠.
달라스 윌라드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감탄하고 경탄합니다.
때로는 우리 역시 그렇죠.
그러니 우리의 인생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동참하고,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보며 ‘감탄’하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그것입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바라’하셨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창조 하셨습니다.
때로는 내가 살아온 듯 하고
때로는 내가 이루어온 것 같고
때로는 내가 행한 것 같고
때로는 내가 실패한 것 같고
때로는 내가 넘어진 것 같고
때로는 내가 절망한 것 같고
때로는 내가 행복을 이룬 것 같고
때로는 내가 성취한 것 같지만,
겸손한 척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한 적도 있고
겸손한 척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했다고 한 적도 있고
겸손한 척 하나님의 일에 참여했다고 했지만,
평생을 돌아보니 내가 한 것은 없고, 나는 감히 참여도 한적 없고, 방해만 되었을 뿐인데 오직 주의 은혜가. 주의 창조가. 주의 바라가 우리의 삶을 이루어왔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셔씃빈다.
그러니 여러분
여전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아픙로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러니 그러니 그러니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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