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4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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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21 날 대속하신 예수께
본문 : 딤후 4:9-22
자비하신 하나님, 이 땅을 살아가며 때로 외롭고, 곤고하며, 절망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러한 상황과 형편에 주저앉지 않게 하시고, 더욱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사모하게 하시며, 주님 주시는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경주를 힘써 달려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순교를 앞둔 노년의 바울의 마지막 목소리가 오늘 본문에 담겨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딤후는 사도바울이 그의 평생에 가장 마지막으로 남긴 서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서신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를 당한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딤후의 마지막 부분이기에, 더욱 바울의 애잔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9절을 보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 서신을 받는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내게 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21절에서 한번 더 강조하는데,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말한다.
왜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아무리 성령충만했던 바울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흔히들 우리 존재의 내면에는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들 한다. 영적으로 느끼는 내적 공허함이 바로 그것이다. 제 아무리 사교성이 뛰어나고 사람들과 잘 지내도, 거듭난 우리 영혼에는 하나님만이 채워주셔야 하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그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하는 부분들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 내 영혼에 채워주시는 특정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채워지는 우리 영혼의 만족감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함께 하는 동역자들을 통해 하나됨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부분들은 각 사람이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주변에 동역자가 없으면,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영역이다.
우리도 간혹 주의 일을 감당하다가 문득 주변에 동역자들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홀로 괴롭게 남겨졌다고 느껴졌을때, 혹 느껴보신 적이 있는가? 아무리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의 일을 담당한다 하지만 깊은 외로움과 공허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바울에게도 그러한 공허함이 찾아왔다. 10절을 보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 구절을 읽으면서 바울이 느꼈을 인간적인 서운함, 섭섭함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바울과 함께 전도의 뜻을 같이하다가 어느 순간에 바울을 버리고 가버렸다는 인간적인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세사람이 같은 목적으로 바울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 물론 그도 골4:14 를 보면 바울과 함께 감옥에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했던 자이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더이상 복음사역에 동참하지 않기로 하고 바울을 떠나간 것이다. 물론 그가 신앙을 완전히 버렸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당장 눈에 보기 좋은대로 좇아 가버린 것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날에도 데마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을 믿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날부터 그 열정들이 식어버리고, 하나님 나라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겠노라고 변질된 자들일 것이다.
또한 데마와는 다르게 또 다른 사역을 위해 떠나는 경우들도 있다. 10절에 등장하는 그레스게와 디도가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바울은 이들이 자신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학자들이 추정하듯, 이 두 사람은 또 다른 사역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파송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함께 오랜 기간동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고하던 지체들이 다른 사역을 위해 우리 곁을 떠나게 된다면, 그 아쉬움과 섭섭함이 얼마나 크던가. 선교사역을 하며 온갖 희노애락을 함께 누리던 동역자들이 떠나버린 바울은 그 허전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바울은 11절에서 말하기를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라고 한다. 누가 말고는 이제 아무도 자기 곁에 없다며 외로움을 표출한다. 누가야 말로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서신을 받을 디모데에게 부탁한다. 11절을 보니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가는 누구인가? 1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를 저버리고 떠난 사람이다. 그 후에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인해 바울은 바나바와 싸우기도 했다. 바울의 복음사역에 있어서 마가는 큰 불화를 일으켰던 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데마와는 달리 마가는 그 후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또 다시 충성했고, 더욱이 사도 베드로의 동역자로서 그의 진술을 토대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마가복음을 기록하기도 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동역자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서신을 써내려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 때가 임박했다는 생각에, 특별히 디모데와 마가를 간절히 보고싶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궁극적인 위로자를 의지하고 있다. 비록 인간적인 외로움과 서운함이 엄습해오지만, 모든 악한 일에서 자신을 건지시는 주님을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16절을 보라. 그가 처음 법정에 섰을 때 모두 자신을 버렸지만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어째서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17절 초반에 기록되었듯이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심지어 모두가 배반하고 다 자신을 떠나갔더라도, 주님은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시며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기에 바울은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이 느껴지시는가? 주께서 그에게 힘을 주셔서 그 어느 외로움과 서운함까지 극복하게 하시는 그분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느껴지시는가? 그의 마음 속엔 여전히 소외된 사역에서부터 비롯되는 외로움이 있지만, 험난하고 고된 사역 가운데 느끼는 허전함과 고독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주께서 주시는 그 힘에 의지하려고 하고 있다. 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기까지 오직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 길 끝까지 달려가겠노라고 주님을 의지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바울의 태도를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이 신앙의 여정이 고독하고 고되지만, 주님을 간절히 의지함으로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한다.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는가에 대한 것이다. 단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도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더욱 고상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많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도 동일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1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하게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바울에게 힘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라 말하는가? 자신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온전하게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시려고 바울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일평생 사역과 그의 소명을 요약한 것과도 같다. 주님께서 처음 바울을 부르실 때 부여하신 사명을 다시금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행9:15 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기 위해 주의 택함을 받은 그릇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순교 직전에 다시금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그 외로운 신앙 여정이지만, 그 고독하고 쓸쓸한 신앙의 여정일런지 모르지만, 그 가운데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견디게 하시고, 인내하게 하셔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가게 하시는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저와 여러분들을 들어 사용하셔서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우리 양문교회를 사용하셔서 수많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소망이신 예수를 만나고, 기쁨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참된 기쁨이신 예수를 만나며, 평안 없이 살아가던 자들이 진정한 평안이신 예수를 만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영광스러우며 벅찬 자리인가?
성도 여러분, 능력의 종이자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도 그의 사역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경험하였다면, 그보다 훨씬 더 연약한 우리는 이 신앙 여정 가운데 때로 무기력함도 느끼고, 외롭고 고독함도 느끼며, 쉽게 우울해지고 지쳐 넘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의 믿음의 경주, 그 마지막 결승선을 지나기까지 주님 주시는 힘으로 감당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시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라. 더욱 주님만을 의지하라. 그럴 때에 여러분들을 통하여 많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을 주님께서 모으실 것이다. 이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일들에 귀히 쓰임받는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주여, 인생 가운데 때로 너무나도 외롭고 고독함을 경험하며, 삶이 너무나도 곤고하고 무겁게 느껴질 때에도, 우리를 향하여 변함없이 부어지는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 사력을 다해 주님을 찾게 하시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어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우리가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복음이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시고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귀히 사용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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