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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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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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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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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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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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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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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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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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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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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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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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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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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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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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와 연관 된 “변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12-25절을 잘 살펴보면 파격적인 행보에 반응하여 “변화를 받아드린 사람", “듣기만 하는 사람”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변화를 받아드린 사람 그리고 듣기만 한 사람 이 두 부류 중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생각해보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듣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나사렛 그리고 가버나움으로 이동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왕이었던 헤롯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했습니다.
헤롯이 결혼을 해 20년동안 함께 살았던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동생 빌립의 아내였습니다.
이 상황을 알게 된 헤롯의 부인이 화가 나 잠시 친정에 간 사이 헤롯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식을 올려 버립니다.
세례 요한은 이 행동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했는데, 헤롯이 분노하여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십니다.
그 분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 큰 빛이 비칠 것"이라는 사야이 9장 1-2절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빛”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평생동안 듣고 공부해 왔던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말씀의 예언이 가리키는 “빛"을 기다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자주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시키는 것만 해왔던 탓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지배 받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자유 없는 일상을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도, 내 자녀들만큼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도록 해주고 싶은데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에 잡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력한 “빛"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력감과 패배감을 이겨내게 해 줄 수 있는, 승리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빛"을 기다렸습니다.
그 “빛"이 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분이 “빛"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빛"이 자신들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쳤기 때문이죠.
이것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들이 이전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메시지였습니다.
물론 세례 요한도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침과는 다른 무게가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외치는 자를 넘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설교자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들었던 말씀은 장로와 랍비가 성경을 읽고 이 것이 무슨 뜻인지 토론하고 논쟁하며 이어지는 대화가 전부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나누기보다, 견해와 해석으로 겨루는 단조로운 강론을 사람들은 들어왔습니다.
그랬던 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확신을 갖고 외치는 설교자가 등장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직전까지 따랐던 “세례 요한의 외침과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흥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였습니다.
들었고 흥미를 가졌으나 그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듣고 반응하여 변화를 받아드린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체포 된 이후 소명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입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것입니다.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예수님의 제자까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잡힌 이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어부의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그를 따라다니고 했었지만 변화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인생을 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앞에 닥친 어려움과 상황 등을 보고 귀향하여 자신의 일을 다시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메시지를 던지셨던 예수님은, 귀향하여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셔서 또 다른 “파격적인 행동"을 하십니다.
당시 문화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승이 받아주지 않으면 그 아래에서 공부 혹은 어떤 가르침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스승이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나를 따르라"는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제안을 예수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이죠.
파격적인 행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나를 따르라"
있을 수 없는 메시지와 제안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빛"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을 듣고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 나라"이기도 했지만, 지금 이 어두운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거든요.
그들은 자신들이 기다렸던 그 “천국" “식민 생활의 끝"이 다가온다는 메시지로 진지하게 받아드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듣기만 했을 뿐, 그에 대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분명한 메시지들을 더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가르치셨고 설교하셨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아프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신 이유는,
그분이 하셨던 모든 사역에 신적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가며, 하나님을 믿지만 부정하는 삶을 산다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였고,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들어왔던 ‘설교와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에 따른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다렸던 “빛"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지도자가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들에게 독립과 자주성을 부여하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메시야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많은 것을 보여주셨음에도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선포되었던 말씀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길을 떠납니다.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는 즉각 에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이들은 낮은 중산층 혹은 높은 서민층에 속한 사람들로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무 것도 없는, 고생 길만 펼쳐질 것이 분명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해 길을 떠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을 때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는 어업이 엄청나게 잘 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하루 동안 물속에 그물을 치고, 끌어올린 후 배를 기슭에 대고 그물을 씻고 널어 말린 후 수선을 하는 것을 ‘깁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전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음을 말합니다.
그물을 치기만 하면 고기가 잡히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물 속에 빨리 그물을 치기 위해 배 위에서 수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고기도 많이 잡고 돈도 많이 벌던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동일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응은 달랐습니다.
말씀을 듣고 반응하며 삶에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드린 사람들이 있었고,
말씀을 들었지만 반응하지 않아 삶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사람이신가요?
말씀을 듣고 반응하여 삶에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신가요?
아니면 말씀을 들었으나 마음에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아, 삶에 변화가 없거나 멈춘 사람이신가요?
저는 바라건데 제2가족들은 “말씀을 듣고 반응하여 끊임없는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읽어도, 들어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변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정말 많습니다.
아무리 예배의 자리에 빠지지 않고 나온다 해도, 예배의 감격을 느끼지 못하고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곳에 계시는 그리고 가정에서 새벽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분들은 “말씀과 매일의 예배 속에 두근거리는 변화가 있는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그 변화가 있기에 예배의 자리를 지켜내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나를 향해 분명하게 선포되어지는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응하지 않아
“삶의 어떤 변화도 경험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아닌"
그 메시지가 나를 향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확신하여,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함으로
“삶의 끊임없는 변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제2가족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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