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온 편지

사도행전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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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022년 12월 연말에 어느날 저희집 화장대 앞에 편지가 한통 써 있었습니다. 편지를 보니 둘째가 엄마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손편지가 많이 없는 시대 입니다만, 편지를 읽고 나니 안성으로 학교를 옮기고 겪었던 지난 일년동안의 둘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또 그 마음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본 첫째도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귀하여서 저도 초콜렛과 함께 편지 답장을 했습니다.
저에게 기억에 남는 편지는 어머니의 손글씨가 담긴 편지였습니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병기간에 전투화를 신고 있다보니 봉와직염이라는 병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약을 군대로 보내 주셨는데, 어머니께서 작은 메모지에 “아들, 건강하게 나중에 알통있는 모습 보여줘"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긴 글이 아닌 짧은 메모를 남기셔야 하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글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와같이, 편지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우리들의 내면의 생각과 감정들을 표현해 줍니다. 가족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분들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담아 손편지를 보내 보시면 어떨까요? 카카오톡이나 SNS에 여러분의 마음을 얼마나 담을 수 있나요? 손글씨로 수려한 문장이 아니어도 여러분의 마음의 그 복잡하고 오묘함을 편지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문인가 편지인가?

신약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성경의 절반 이상이 서신서 즉 편지입니다. 서신서들은 당시 고대의 편지 형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많은 편지가 바울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그의 전도여행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을 위해서 편지를 통해서 교회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학에대한 가르침과 권면과 지시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서신들은 두 교회 이상 함께 회람을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서신들은 공동체에 보내는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인 글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신서들은 대부분 누군가 그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서신서들은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 보다는 대등한 관계에 있는 가족끼리 주고 받는 편지에 가깝다고 합니다.
따라서, 편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된 교회들에게 보내는 사랑으로 써 내려간 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교회의 대표자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22–23 NKSV
22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가 대표들을 뽑아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대표로 뽑힌 사람은 신도들 가운데서 지도자인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였다. 23 그들은 이 사람들 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형제들인 우리 사도들과 장로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이방 사람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 받는 길이 이방인들에게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았고, 이것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 진 것임을 믿는다는 중요한 결정을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들에게 편지를 통해서 전하기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은 결정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나바와 바울만 보내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에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훝날 바울과 전도여행을 떠나는 실라라는 사람을 함께 보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다는 사도의 후보에 올랐던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의 형제로 보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실라는 로마식 이름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과 함께 보내어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어지러워진 이방인들의 교회를 설득하고자 함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편지는 “형제들인 우리 사도들과 장로들은"이라고 발신자를 밝힙니다. 즉, 주안에서 한 형제로서 당시 태동하던 다양한 교회들을 가족으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다가 갑니다. 그렇게 다가간 교회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이방사람 교우들입니다.
당시 이방인 교회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이방인 그리스도인,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예수 믿은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불리는 유대교를 개종하지 않고 믿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 유대주의자에 물들은 그리스도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예루 살렘 교회는 “형제들"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문서가 칙령이 아닌 편지의 형식으로 회람을 하는 서신서로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두 사람과 함께 보냈습니다. 두 사람의 구성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편지의 내용

이렇게 다양한 교회들에게 보냈다는 것은 할례와 율법 준수에 관한 문제가 당시 많은 교회들 안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을 한번 더 자세히 살펴 볼까요?
사도행전 15:23–29 NKSV
23 그들은 이 사람들 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형제들인 우리 사도들과 장로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이방 사람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4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사람이 [여러분에게로 가서], 우리가 시키지 않은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몇 사람을 뽑아서,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나바와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또 우리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이 이 일을 직접 말로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꼭 필요한 다음 몇 가지 밖에는 더 이상 아무 무거운 짐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29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삼가면, 여러분은 잘 행한다고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유대인들 중에서 가르치던 내용들이 예루살렘의 교회의 입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는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대부분 토속 신앙과 미신들이 기독교 교리와 교묘하게 섞여서 그것이 어집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저는 어려서 그런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주의 종에게 잘못하면 벌받는다. 정말 그렇습니까? 주의 종이라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에게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주일 성수 안해서 사고가 났다 든지, 복과 저주에대한 잘못된 개념이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목사가 되자 아는 친척 분께서 제 어머니에게 이제 아들을 이름으로 부르면 안되고 목사님 목사님이라고 존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공과 사를 구분해야 겠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안되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입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마치 무병 걸리듯이 큰 병에 걸리면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무당입니까? 우리들도 혹시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우리를 어지럽히는 가짜복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예루 살렘교회가 이방교회에 편지를 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들도 이 편지가 해당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진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목숨을 내어 놓고 전했던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오직 예수 다른 이름은 없네 그 이름만 우리에게 주셨네 라는 찬양과 같이 말입니다. 목숨을 내어 놓고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교회 대표자 유다와 실라가 이일을 직접 말할 것입니다. 즉, 서신서가 낭독의 형식으로 교회에 읽혀질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할례와 율법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상관 없는 그들의 표현으로는 “무거운 짐"입니다. 이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관습도 어떤 문화도 어떤 종교도 교회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31–32
31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32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성령과 우리 , 그리고 기쁨

나아가서 편지에 “성령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한 결정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동행함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함입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유대주의를 벗어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에는 새로운 연합을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우리는 연합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그들 안에서도 이 문제를 풀어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이 초대교회를 이끌어 가고 계심을 그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성령 하나님은 야고보 라는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0–35 NKSV
30 그들은 전송을 받고 안디옥에 내려가서, 회중을 다 모아 놓고, 그 편지를 전하여 주었다. 31 회중은 편지를 읽고,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32 유다와 실라도 예언자이므로, 여러 말로 신도들을 격려하고, 굳세게 하여 주었다. 33 그들은 거기서 얼마 동안 지낸 뒤에, 신도들에게서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서, 자기들을 보낸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35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였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편지를 받은 그들은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신도들을 격려하고 굳세게 하여주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해졌습니다.
권면은 유대주의에 물든 자들에게는 유대의 할례와 각종 절기를 지키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이며, 이방인이 유대인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하나의 교회로 연합되기 위해서 자신들의 일부 관습들을 내려 놓아야 한 다는 사실에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권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이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십니다. 복음은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되어 교회와 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성령안에 인도함 받는 기쁨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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