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인 삶의 방식

마태복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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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인 삶의 방식
제가 필리핀에 6개월동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필리핀 대학생들을 위한 교회를 세워가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함께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새벽 4시쯤에 일어나 차를 몰고 그 친구들을 태웠습니다.
필리핀은 새벽에 전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엄청 깜깜하고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아무튼 그 친구들을 한가득 태워 교회로 돌아와 새벽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친구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하나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친구들을 사랑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배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11시 예배라고 수도없이 말했는데 절대 그 시간을 안 지켰습니다.
워낙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오니까 예배를 12시 넘어서 드린 적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도저히 이해할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나라 문화는 1시간 정도 늦은 것은 미안해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한 2시간 정도 늦어야 조금 늦어서 미안하다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1시 예배인데 아이들이 아무도 안왔습니다.
12시가 되었는데도 아무도 안 와서 정말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아이들을 태우러 집 앞에까지 갔는데 이상하게 거리가 너무 한산했습니다.
알고보니 필리핀 권투 영웅 매니 파퀴아오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 경기를 보기 위해 필리핀 사람들은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모여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주님이 파퀴아오에게 지신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며 슬프기도 했지만, 그들이 만약 시간만이라도 잘 지킬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겠다는 소망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우리에게도 변화되어야 할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가히 혁명적인 삶의 방식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도대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예수님 제자들의 삶의 방식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제자는 진실한 삶을 삽니다.
33-34절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에 맹세하지 말아라.’
맹세는 원래 구약에서 많이 등장하는 율법입니다.
레위기 19:12절이나 민수기 30:2절, 신명기 23장 21-23절에도 맹세에 대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한결같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맹세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 사이의 불신이 있다보니 자신의 말에 신뢰성을 보장하기 위해 맹세가 많아진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맹세를 두는 대상도 다양해 졌습니다.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를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걸수는 없으니까 다른 것들로 맹세를 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에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이들이 맹세를 둔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결국 자기들 마음대로 맹세를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머리카락 한 올도 희거나 검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머리카락 색깔 하나조차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면서 머리, 즉 자기 생명을 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맹세를 남용하여 맹세만 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맹세는 진실성을 담보하기 위해 사용해야하는데, 오히려 남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두고 맹세를 하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맹세자체는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맹세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제자들은 맹세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먼저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은 이렇게하고 속마음은 다르다거나 행동은 이렇게 한다고 해놓구선 그렇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예를 해야할 때는 예라고 하고, 아니오라고 해야할 때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성품중 하나가 바로 진실함, Integrity입니다.
진실함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닮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빈말을 하지 않으시며,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진실함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약속이 등장하는데 요나단은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들의 가족들을 잘 돌봐달라고 요청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요나단이 죽은 후 몇년이 지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그를 돌봐주었습니다.
벌써 왕도 되었고,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 옛 약속을 잊을 법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므비보셋이 자신과 함께 같은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할아버지 사울왕의 땅도 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진실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진실한 사람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중에 ‘밥한번 먹자’가 있습니다.
우연히 알던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고 인사하면서 밥한번 먹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빈말일 경우가 거의 99프로입니다.
헤어지고나면 전혀 연락 안합니다.
웃기는 건 또다시 우연히 만나면 또다시 밥한번 먹자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정도야 하나의 인사치레로 생각할 수 있지만, 더 심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누구 소개시켜준다느니, 우리 동네오면 내가 뭘 해주겠다느니 이런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을 빈말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지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빈말이 계속되면 그 사람의 신뢰성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내 말을 믿지 못할 때 맹세를 자주하게 됩니다.
목숨걸고, 이름걸고, 나중에는 각서까지 쓰면서 맹세하게 됩니다.
믿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벌써 부부사이의 신뢰는 많이 깨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맹세하지 않아도 서로 믿을 수 있어야 신뢰하는 부부관계입니다.
그 대상이 친구이든, 이웃이든 서로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크리스천들은 어떨까요?
물론 크리스천들은 거짓말은 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죄가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빈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응 기도할께~”입니다.
그냥 하나의 크리스천 인사인 것이죠.
‘기도할게’가 아니라 도울 수 있는 것은 도와야 하는데 그럴 생각은 없으니 그냥 기도할께라는 말로 상황을 넘기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런 일이 있었음을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과 행동은 항상 진실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자는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38-42절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구약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이게 마치 보복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네가 당한만큼만 갚아주라는 복수의 한계를 설정한 법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눈을 다치게 했으면 그 사람 눈만 복수를 해야지 다리몽뎅이를 부러뜨려 두배, 세배로 갚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마음은 내가 당한 것보다 몇 배로 갚아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한계를 설정해놓은 율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악한 사람에게 아에 맞서지 말고,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도 대주라는 것입니다.
구약율법에 따르면 오른쪽 뺨 맞으면 나도 상대방 오른쪽 뺨을 때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복수하지 말라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왼쪽 뺨도 대줘야 합니다.
좀 이상한 것은 오른손잡이가 오른쪽 뺨을 때리려면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쳐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시 손등으로 오른쪽 뺨을 치는 것은 그냥 뺨을 치는 것보다 훨씬 더 모욕을 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욕적인 행동을 했더라도 보복을 포기할 뿐 아니라, 상대의 분노에 자신을 더 내어줄 각오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고발해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발하고나서 담보로 속옷을 요구했는데 아에 겉옷까지 다 주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옷은 매우 값비싼 생활용품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 로마 병사들이 제비뽑기해서 예수님 속옷을 나눠가질 정도였습니다.
특히 겉옷은 일교차가 큰 이스라엘 지방에서 밤의 추위를 막아주는 이불 대용으로도 쓰일 정도로 매우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이 요구한 것 그 이상을 내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 오리를 가자고 억지로 요구했을 때 십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불이익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불이익을 준 자에게 내것을 더 내어주는 자비를 베풀라는 혁명적인 삶의 방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믿는 사람이 더하더라는 말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절대 피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피해를 보면 어떻게든 보복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강제로 빼앗기는 상황인데도 내것을 더 내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든 내 것을 지키려하고, 조금이라도 더 내 것으로 취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중에 관대함과 자비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렇게 추해보일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목사님과 함께 이마트를 갔는데 점원분이 계산을 잘못하니까 얼마나 그 분을 나무라시는지 제가 민망해서 힘들었습니다.
마음에 관대함, 자비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보여주려면 이런 관대함과 자비함은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첫째, 둘째 것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3-44절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구약의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속에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속뜻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43절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수가 누구일까요?
흔히 원수라하면 둘중 하나는 죽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한 곳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꼴보기도 싫은 사람,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할뿐 아니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까지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이 사람이 잘되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45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하나님은 해와 비같은 자연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주십니다.
그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해와 비를 주시지 않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논리입니다.
또하나의 근거가 있습니다.
46-47절입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당연한 것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하며 사는데 믿는 사람은 달라야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이건 필리핀 친구들이 주일예배 시간을 못 맞추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수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럼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 답을 4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제자들이 혁명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자비와 사랑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골1:21-22절입니다.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 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 분으로 인해 우리는 죄를 떠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큰 사랑과 자비를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런 혁명적인 제자들의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버거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에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분명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삶은 분명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통치하실 때 우리의 삶은 분명 변화될 것입니다.
내 감정과 내 마음과 내 육체까지 주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더욱 진실해지며, 더욱 자비해지며,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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