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9_주일예배_행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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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시는 성령

Acts 2:1–13 NKRV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1장 15절에 보면 이 날 모인 사람들이 120명이었다고 했는데, 이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그리고 이 성령의 역사에 관한 베드로의 설교가 있은 후 3,000명이 회심하였다고 전하고 있어서, 이 말씀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시작된 교회의 역사를 전하는 본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은, 성령께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장면을 대단히 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명절인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처럼 갈라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렸고, 사람들은 성령이 말하는 대로 방언/외국어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 모습을 성령 충만함으로 묘사하고 그 성령 충만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의 표징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방언을 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의 교회들 안에서도 하나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들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표준이 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성령체험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방언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방언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매달립니다. 그것은 분명히 신앙인으로서 체험할 수 있는 뜨거운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체험을 함으로써 생기를 얻고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을 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전하는 성령강림의 사건은 그와 같이 표피적이고 일면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전하는, 성령강림 사건의 참뜻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의 말로 들렸다고 전합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여러 나라 출신들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대로 볼 것 같으면, 바르티아,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프리기아, 밤필리아, 에집트, 키레네 부근 리비아,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대개 유대인이었지만, 개중에는 본래 그 지역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이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는 데, 사도들이 하는 말이 전부 자신들의 말로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놀랍니다. 저 사람들은 분명히 갈릴리 사람들인데,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반문하며 놀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강림의 사건이 본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령강림 사건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되는 사건입니다. 여기에 성령강림의 참뜻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방언을 중얼중얼 하는 것이 성령체험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성령의 체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된다고 하는 것이 모두가 따 똑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두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 언어를 포기하고 하나의 언어를 배운 것이 아닌데도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는 성령강림 사건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말이 굳어지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의사소통에 커다란 문제가 안 된다고 합니다. 영어를 쓰는 아이는 영어로 한국어를 하는 아이는 한국어로 좋고 나쁜 감정을 표현하면 그것이 다 소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장하면서 저마다 자기 고유의 문화전통과 그에 따르는 규칙에 충실하다 보니까 결국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이 생기고, 그 경계선을 부수지 않으면 이제는 더 이상 의사소통이 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전하는 성령체험의 경지는, 마치 서로 다른 나라의 어린 아이들이 각기 자기말을 하는데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인데도 서로간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어떤 것 하나로 획일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다 인정해 주는 데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한 마음이 되는 경지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출신지역의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의 사는 방식과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처럼,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혹은 흑인이든 황인이든 백인이든 인종과 민족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경지를 말합니다.
또한 남자이든 여자이든, 어른이든 아이이든 그 지위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경지, 우리 교회로 볼 것 같으면 목사이든 장로이든 권사이든 집사이든 그 직분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출신성분이나 직분은 그 나름의 개성과 역할을 의미할 뿐이지 그 어떤 출신이나 직분이 절대권을 가질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각기 개성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를 이루는 상태,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성령체험의 본질입니다. 아마도 이 성령체험을 열광적인 어떤 상태로만 한정하려고 하고 또 오늘날 마찬가지로 방언하는 것만이 성령체험인 것인냥 여겼던 사정은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같습니다. 오늘날만 새삼스럽게 성령체험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 논란이 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안에서도 이미 그런 논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그리고 그 유명한 사랑의 장으로 알려진 13장, 그리고 14장 등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다 이 때문입니다. 12장에서 바울은,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7절)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에 비유하여 교회의 직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장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별개의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하나되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 분명하게 덧붙여 열광적 상태에서 방언을 구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혜를 구할 것을 강조합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해봤자 그것은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이와 더불어 사도 바울은 심령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이성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다시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말함으로써 성령의 체험이란 한 순간의 열광의 상태에 / 혹은 뜨거워지는 상태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온유, 그리고 절제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초점은 결국,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언제나 갈등을 치유하고 하나되는 사건의 맥락에서 등장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품어 주시고 우리를 격려하시며,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사랑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을 우리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하나됨을 지켜 가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되고 연대하는 하나됨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여기는교회가 이런 사랑과 포용의 마음으로 가득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과 교회에 성령충만함이 넘치고, 그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과 포용이 넘치는 그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과 포용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 곳들을 떠올려 보고 실천을 결단합시다.
저는 오늘 이 시간, 하나되는 교회, 하나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 모두가 진정한 성령의 체험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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