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부재의 은혜

욥기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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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문학 교수 버지니아 몰렌코트는 어느 날 꿈 속에서 깊은 물 밑으로 가라앉는 체험을 했습니다. 절대적인 절망에 빠져서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한 그 때, 자신이 빠져있는 깊은 심연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을 통과해 영광스러운 빛으로 나아가며 “죽음은 부활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패와 고난이라는 어두움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는 어려움 속에 있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와는 상관 없다는 생각에 절망과 고뇌에 빠집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나의 눈 앞을 다 가려버려서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문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커녕 옆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 문제가 나를 잠식해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런 일을 해줄 수 없는 분으로 여기고, 핸드폰을 뒤지며 당장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의 이름을 찾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걸고 연락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을 그 때, 어려움 가운데 있을 그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낮에 불을 켜는 것보다 밤에 불을 켤 때 그 불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가 밝음 속에 있을 때보다 어두움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는 더 크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아무리 이렇게 말은 하지만 정작 문제가 닥쳐오고 고난이 올 그 때 하나님을 발견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과 또 성경 곳곳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후에도 창조 세계의 여러 모습들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통틀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무소부재 하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사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다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여러 상황과 환경에 처하는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다는 것이 왜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인지, 그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며 그 은혜를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욥기를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시면 계속해서 욥이 하는 아우성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입니다. “하나님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라는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지금 하나님이 내 삶 속에 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계시다면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욥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욥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정말 답답하고 속 터질 일들이 가득했습니다. 욥은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장 1절에서 욥을 소개하면서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을 이와 동일하게 평가해 주셨습니다. 죄 짓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모든 소유가 사라지고, 그 날 자녀들이 다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온 몸에는 종기가 나서 질그릇으로 그것을 긁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처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욥처럼 착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아간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이 욥 정도로 온전한 삶을 살아갔는데 욥에게 일어난 일들이 벌어진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다시는 교회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겠다”라며 침 뱉고 돌아설 분이 안계시겠습니까? “아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온전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저를 이렇게 대하실 수 있습니까?”라며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고, 시험들었다며 교회에 발을 끊으시지 않겠습니까?
만약 평소에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죄도 좀 지으면서 그냥 저냥 살았다면 조금은 이런 일들이 이해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이런 일이 생길 이유가 전혀 없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갖 어려움이 왔습니다. 욥에게 정말 까닭없는 고난이 찾아왔고, 그 고난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야하는 절망의 나날들이 오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친구라는 인간들이 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선하신 하나님이 이유 없이 너에게 이런 벌을 내리실리가 없다. 네가 받는 벌은 네가 지은 죄의 대가다. 그러니 억울하다 하지 말고 하나님께 회개해라”와 같은 말이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처해 있으니 지금 하나님이 내 삶에 계시다면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욥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지금 내 삶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다”고 그렇게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 말에 하나님은 “나는 어디에나 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등장하십니다. “네가 내가 없다고 말한 그 때에도 내가 있었다. 나는 무소부재한 하나님이다. 폭풍우 속에서도 내가 있었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라고 말하십니다.
본문 12-13절 말씀을 보시면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했느냐? 새벽에게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라고 말씀하시는데, 아침과 새벽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밤을 지나야 오는 것이 새벽과 아침입니다. 즉 아침과 새벽은 밤이 전제된 시간입니다. 우리는 빛만 의로운 것,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둠은 억압되거나 버려진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19절을 보시면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라고 말합니다. 광명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광명이나 흑암이 대등하게 자리를 허락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낮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밤도 의미가 있으며, 형통이 아니라 고난도, 자랑이 아니라 억울함도 동일하게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이것이 마치 피아노 건반과 같다고 말합니다. 피아노의 흰색 건반과 검은색 건반이 같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 안에 형통이나 고난, 낮이나 밤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움과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벗어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눈에는 모든 것이 이분법으로 보입니다. 옳고 그른 것, 성공과 실패, 자랑과 수치를 구분해서 봅니다. 세상에서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아왔기에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을 대립된 개념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 “선함, 빛, 아름다움”이고, 반대로 사탄은 “악함, 어두움, 추함”이라는 생각이 우리 머리 속에 무의식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다”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둘로 쪼개어 버립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부재의 영역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흰색 건반은 흰색 건반으로, 검은색 건반은 검은색 건반으로만 구분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흰색 건반도, 검은색 건반도 다 하나님의 통치라는 피아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흰색 건반만 치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 건반도 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눈에 이삭은 죽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올리고 그를 잡으려 한 그 때 이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죽음과 생명이 한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볼 때 절망과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때, 절망과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는 승리와 생명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십자가가 절망과 승리,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판단하시고 운행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정하다고 판단하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방해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12장 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이 말씀을 보면 순서가 조금 다릅니다. 야곱이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 다음에 하나님과 겨루었다고 나오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나오는 것이고, 벧엘 사건 다음에 하나님과 씨름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말씀에는 벧엘의 사건이 얍복 나루에서의 사건보다 뒤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 32장의 얍복 나루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이 어떻게 하는지 보다보다가 욥기 38장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인생 전체에서, 또한 욥의 모든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15절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벧엘 사건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이 자기 혼자 그 어려움을 다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외삼촌 집에서 외롭고 고단하게 목숨을 연명하며 거짓 속에서 살아갔던 그 모든 시간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가득한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을 선택하셨고, 벧엘에서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시면서 그가 혼자라 생각했던 그의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맹렬히 일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삶에 맹렬하게 간섭하고 계시다는 그 사실을 잘 못느끼고 살아가는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문제만 닥쳐오면 하나님보다 문제에 집중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 천국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을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모래밭을 보니 발자국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험난하고 힘들었던 여정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혀 있고, 평지나 편안한 길에는 마치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간 것 같이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곧장 하나님을 보며 따지듯이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왜 평지나 편안한 길에서는 저와 동행해 주셨으면서, 험난하고 힘든 길만 오면 저 혼자 길을 걷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의 말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네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항상 우리는 이렇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 눈이 가려 나와 동행하시는,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혼자 걷고 있다고 느끼는 그 때, 사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항상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시고, 나의 삶 속에 맹렬하게 역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부산 영도에 있는 고신대학교를 나왔는데 고신대를 나온 사람들은 다들 경험해 보는 것이 있습니다. 학교 전체에 안개가 끼는 경험입니다.
영도는 국제시장 옆에 붙어있는 작은 섬인데, 큰 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산 중턱에 있는 학교 덕분에 자취방에서 학교를 가는 길은 등산을 하는 것처럼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했었고, 늘 등교길에 ‘오늘도 등산을 하는구나’하면서 학교에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학교에서 뒤로 고개를 돌리고, 또 강의실에서 창 밖을 보면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참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 학교가 있다는 말은 습기가 엄청 찬다는 것입니다. 습기 때문에 방에서는 빨래도 잘 안말라서 자취방 건물 앞에다가 건조대를 두고 빨래를 말리기도 했으니 정말 살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습기가 많은 것을 넘어서 시시때때로 학교 전체가 안개에 뒤덮이는 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저 바다에서 안개가 올라오고, 산에서 안개가 내려오면 정말 학교가 안개에 다 뒤덮여서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꼭 제 마음에 떠오르는 찬양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님은 산 같아서>라는 찬양입니다.
“안개가 날 가리워 내 믿음 흔들리려 할 때 나 주님께 나아가네. 주님은 산 같아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셔 눈을 들면 보이리라 날 위한 그 사랑. 주는 나의 도움이시며 주의 계획 영원하시네 주의 위엄 앞에 믿음으로 순종의 예배 드리리. 주님께서 날 이끄시며 주가 항상 함께 하시네 주의 사랑 앞에 믿음으로 순종의 예배 드리리 영원히”
안개낀 학교의 상황이 딱 저랬습니다. 학교 뒤의 산은 안개가 끼지 않았을 때나, 안개가 꼈을 때나 동일하게 그 자리에 있는데, 안개가 끼면 그 산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내 앞의 문제나 어려움, 고난, 시련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듯이, 나에게 하나님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 자리에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를 위해 맹렬하게 역사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한 번 꼼꼼히, 찬찬히 읽어보시면 알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그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의 고통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 팔짱을 끼고 그냥 지켜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으시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욥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폭풍 속에서 등장하시며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직전까지 엘리후가 “하나님은 인과 법칙에 따라서 일하시는 분이다. 너의 모든 고난은 너의 죄에 대한 결과다”라며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단 번에 다 날려버리셨습니다. 인과의 법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크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질서와 법이 필요 없고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와 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크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상황과 형편과 잣대를 이 하나님 위에 세우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이해보다 크신 하나님 말입니다.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용서하시며, 전능하시며 축복하시는 그 하나님 위에 세우셔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겪는 어떤 것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능력을 얻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을 피해 집을 떠나야 했던 어려움 가운데 있던 야곱에게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허락한 것들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너의 어려움과 문제와 아픔이 너의 눈을 가릴 그 때에도 여전히 나는 네 옆에서 너를 위해 일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세상이 너에게 가치없다고 말하는 거짓에 속지 말고 대장부처럼 담대하게 세상과 내 앞에 서서 살아가라.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 너의 아버지란다. 아들아 딸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기쁜 날 뿐만 아니라 나의 힘들고 슬픈 날, 어두운 그 날에도 나와 동행하시며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의 힘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 안에 굳건하여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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