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1설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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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학교에서 이런 교과서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수학과 수학익힘, 과학과 실험관찰, 도덕과 바른생활. 이 책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개념과 원리 그리고 기초를 알려주는 책과 그것을 토대로 실제적인 것들, 실천과 적용을 다루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개념과 원리는 중요하지만 그것을 활용하여서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야고보서라는 성경은 우리에게 수학익힘책, 실험관찰,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과 같은 역할을 해 줍니다.
루터는 야고보서에 ‘은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는 표현보다는 ‘행위'가 강조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야고보서를 별 볼일 없는 서신서라는 의미를 가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많은 사람들은 루터의 이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부 때에 존경하던 교수님께서는 이 관점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셨습니다. 야고보서는 정말로 지푸라기 서신이다.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집을 짓는 데에 있어서 기초는 크고 무거운 돌과 기둥을 세워야 하지만 그 지붕을 덮는 것은 지푸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고 큰 집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붕이 없으면 그 집은 비가 오고 눈이 올 때, 집의 기능을 온전히 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 있어서 또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기초이자 모퉁잇돌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릿돌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우리의 신앙에는 이른 바 ‘세상'이라는 눈과 비가 내립니다. ‘믿음'이라는 기초는 교회와 우리의 신앙의 지붕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푸라기가 필요합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그 지푸라기를 제시합니다. ‘행위'라고 강조되어있지만 사실상 야고보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와 우리의 신앙에는 믿음이라는 멋진 기초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행하는 그 지붕이 필요한 것입니다. 눈과 비를 맞은 지붕은 끊임없이 보수가 필요하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의 삶을 보수해야 할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교회의 지붕 상태를 점검하고 또 보수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Intro.
Intro.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야고보서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길 소망합니다. 야고보서는 ‘서신서'입니다. 저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신자에게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와 수신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 살펴보는 것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절 이하를 잠깐 살펴보면 저자와 수신자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당연히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성경이 말하는 바들을 종합해보고 또 학자들의 연구결과들을 종합해보면 이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아마도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로 추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예수님을 믿은 이 야고보는 사도로서 활동하며 초대교회시기에 교회 지도자들 중 한 명으로 열심히 사역합니다.
그리고 수신자는 ‘흩어진 열 두 지파'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이하의 절을 보면 열 두 지파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옵니다. 내 형제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자들. 즉, 열 두 지파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형제들 즉,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흩어져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흩어짐 때문에 교회가 여러 시험을 당하고 시련과 유혹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이 때 당시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작게는 교회된 저와 여러분도 예배를 드리지 않는 평소에는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큰 의미에서 교회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모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우리는 그 흩어짐 때문에 연약해지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여러 문제들이 생깁니다. 우리의 삼과 각자의 교회에 크고 작은 문제와 시험, 문제들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진 비바람과 눈바람들을 지붕이 없는 채로 맞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때로 교회의 기초인 믿음과 받은 은혜가 송두리째 흔들리거나 잊어버리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야고보서의 목적은 이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그 크고 작은 문제와 시험들을 기쁘게 여기고 인내할 수 있는, ‘지혜'가 ‘지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두 마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말, 말씀' 그리고 ‘행함’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야고보서라는 서신과 편지의 기본적인 구조와 목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잠깐 정리해볼까요?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의 ‘기초'를 세운 우리에게 교회의 ‘지붕'을 만들고 또 보수하는 법을 알려주는 귀한 서신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주의 형제 야고보이며 수신자는 흩어진 모든 교회들입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흩어져 살아가는 모든 교회가 겪는 어려움 속에서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지혜를 구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 곧, ‘말씀을 잘 듣고 잘 말하며 잘 행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정리하시고 우리 함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 vs 땅 위의 것
위로부터 온 지혜 vs 땅 위의 것
야고보서 안에서 야고보의 논리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자연스레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러한 자를 3장에서 ‘온전한 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로 표현합니다.
온전한 자는 혀를 잘 다스리는 자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온유함으로 선행을 행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지혜와 총명을 얻길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지혜와 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기에 지금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도 저마다 자신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자신의 말로 지혜와 총명이라고 하는 것들을 전합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땅 위의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말'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저는 신학대학원 수업시간을 통해서 더욱 깊이 깨달았습니다. 수업시간에 열심히 아멘, 아멘 하며 들었던 수업내용이 있었습니다. 참 은혜도 되면서 기존 교회는 왜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들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 한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이상 이단이 주장하는 교리였습니다.' 또 이런 일도 우리는 자주 마주합니다. 쉽고 편하게 돈 버는 방법이 있다며 투자하라는 친숙한 이름을 단 팀장님, 부장님들이 문자를 보내 옵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달콤한 말들을 우리는 지혜라고 생각하고 진리라고 생각하며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꽤나 자주 마주합니다.
성경 속에서도 분별하지 못해 봉변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뱀의 간교함에 속아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진리가 아닌 거짓 곧, 간교함을 얻게 되고 수치심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을 잘 하는 것과 그럴듯해 보이는 말들이 언제나 참인 것이 아님을 봅니다. 아니 오히려 거짓인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우리는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분별하는 비법을 바로 선행, ‘선하게 행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여러 이단들과 기독교가 구분되는 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물론 여러 교리들이 다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서 그 지혜가 선한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행하느냐'입니다. 좋은 땅 또는 기업이 있으니 투자하라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렇게 좋은 땅이면 왜 당신이 전 재산을 투자하지 않고 제게 투자하라고 권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언가를 추천하는 것과 사기치는 것에 있어서도 ‘선하냐 그리고 그것을 행하느냐'가 그 구분요소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선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우리는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쟁취하고 소유하는 것, 두근거리는 것이 사랑입니까 오래참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복입니까, 하늘의 평화와 평강을 가지고 매일이라는 천국을 사는 것이 복입니까? 전쟁을 통하여 혹은 힘으로 통치하는 것이 평화입니까, 그런것 없이도 사랑으로 이루는 것이 평화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려보기만 해도 어떤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선하다'는 단어에 있어서 선함의 주체는 우리가 느끼기에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한 것이어야 선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리고 우리의 교회의 지붕을 한 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위로부터 난 지혜를 듣고 계십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아가십니까, 땅 위의 것으로 살아가십니까? 혹시 우리가 정욕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것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것으로 살아가고 계시다면 이미 교회된 여러분의 지붕에 틈이 생겨서 눈과 비가 새고 있다면 이 시간에 다시금 지붕을 보수하고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 지혜의 속성과 예수
위로부터 온 지혜; 지혜의 속성과 예수
오늘 본문 안에서는 선행 외에도 지혜의 속성들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지혜에는 온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온유함은 독한 시기와 다툼, 혼란과 악한 일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거짓된 것에는 시기와 다툼 그리고 혼란과 악한 일들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말을 듣고 지혜라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위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닌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 뒤에는 17절에서 성결함과 화평, 관용, 양순, 긍휼, 가득한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이 없음 심지어는 화평까지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이러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을까?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굴까?
제가 서울광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조현삼 목사님의 설교 중 이런 설교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뜻의 지혜에는 ‘예수'를 넣으면 다 된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번 적용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지혜의 속성들> -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제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혜로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붕은 매일마다 새고 또 무너지기 때문에 온전할 틈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혜를 매일마다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지혜의 근원이시고 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본체이시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성령충만과 더불어서 지혜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단순히 믿는 것을 뛰어넘어 믿는 바를 행하는 삶을 살길 소망하십니까?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십시오. 말 그대로 위로부터 육신을 입어 내려온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 흩어져 있기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우리 교회라는 지붕에서 물이 새기 시작할 때에 혹은 교회에 지붕이 없어진 나머지 세상의 비를 쫄딱 맞을 때에 우리의 기초가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빛을 잃고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고 되려 믿음을 뒤로한 채 세상을 뒤쫓아가는 형태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니라 땅의 것과 정욕, 세상이 말하는 지혜를 따라가기 때문인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지혜는 뱀의 간교함과 같이 그럴 듯해 보입니다. 또 당연해 보입니다. 그렇기에 연약한 우리는 매일 넘어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와 간교함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과 또 힘을 주셨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지혜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마다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며 지혜충만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교회가 교회의 지붕을 굳게 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여갈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는 우리 교회의 표어와 같이 예수님처럼, 아니 예수님보다 큰 일을 행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선한 열매를 가득히 맺게 될 저와 여러분의 삶을, 그리고 동서울 광염교회와 이 땅의 모든 흩어진 교회들 가운데 행하실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기대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