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을 회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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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그 첫 사랑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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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

요한계시록 이장부터 등장하는 일곱교회는 소아시아 지방의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대의 일곱 교회의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일곱 교회 중 에베소 교회를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베소지역은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의 인구는 22만 오천명정로 추정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 정도 인구이면 무척 큰 도시에 속했습니다.
성경를 보면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갔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넘게 머물며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료에 의하면 바울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두란노 서원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계시록말씀에 에베소교회가 그리스도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토대를 바울이 마련해 주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르쳐준 복음을 통해 그들은 복음의 정통주의에 서서 세속화 되지 않고 본질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놀랍게 칭찬해 주었던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를 놀랍게 칭찬해 주었던 예수님에 대해 오늘 본문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7곱 별과 7곱 금촛대를 주관하시는 예수님

Revelation 2:1 NKRV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성경에 사자라고 말할 때 보통은 인간과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를 가리켜 말씀합니다. 물론 사자를 가리키는 헬라어 “엥겔로스”를 메신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엥겔로스”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하나님의 특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천사”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 유대 문헌들을 보면 천상의 천사들을 지상의 왕과 나라들의 행위를 지도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존재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료들을 통해서 볼 때 사도 요한도 일곱교회를 지켜주고 있는 천사들을 가리켜 “교회의 사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밭제일교회를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도 이런 천군천사를 보내어 지켜주시고 계신줄 믿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기도하실 때 우리 교회에 더 많은 천군천사를 보내어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를 일곱 촛대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가리켜 말씀합니다. 그 해석은 요한계시록 일장 이십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Revelation 1:20 NKRV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보낸 일곱 천사들을 붙자고 계시며 교회와 교회 사이를 거닐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일곱 별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으시다는 것은 계시록 1장 16절에서 일곱별을 단순이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손에 움켜 쥐고 있다는 것을 나태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오른 손은 왼 손에 비해 힘이 쎕니다. 이는 보다 강화된 주권을 상징합니다. 즉 교회를 수호하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아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금촛대를 상징하는 교회의 사이 사이를 예수님께서 거니신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교회 구석 구석에 임재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악해졌다고 하여도 일곱별 즉 교회를 수호하는 천사들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고, 일곱촛대 즉 교회에 임재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입니다. 여러분들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고 계시고 그 예수님의 주권이 여러분들 안에 충만히 누려지고 있는 줄 믿습니다.
교회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를 구석구석 거니시다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과 훈계 그리고 보상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한밭제일교회에 예수님의 주권이 있는 줄 믿습니다. 한밭교회를 이루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 사이사이를 거닐고 있으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계신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신앙의 교훈점들을 찾아 보고 그 교훈점을 따라 실천해 보는 은혜를 경험해 볼 수 있기르 소망합니다.
먼전 에베소 교회에게 주셨던 주님의 칭찬에 대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칭찬

Revelation 2:2–3 NKRV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와(헬:카아(동격)행위:수고와 인내를 포함
“내가 네 행위와 즉 수고와 인내를 안다.”라고 번역해야 함.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말할 때 쓰인 한글 “와”의 헬라어는 “카이”입니다. 이는 동격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를 보다 잘 번역한다면 이렇습니다. “내가 네 행위, 즉 네 수고와 인내를 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칭찬 받았던 행위는 즉 수고와 인내였습니다.
어떤 수고 였습니까? 악한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수고였고, 또 어떤 수고 였습니까?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기 위한 수고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고가 빛이 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인내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내라는 헬라어 휘포모네는 “억압과 불의를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 그 당시 로마정부의 종교 탄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가 종교와 사상의 도시였기 때문에 여러 주술사들이 퍼뜨린 미신이나 기독교 이단자들이 퍼뜨린 잘못된 교리들로 성도들은 세상 속으로 떠내려갈 위기에 처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육체는 악하다고 말하고 영적인 것은 거룩하다고 말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결국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육체로 범하는 죄가 영혼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거짓 교리를 퍼뜨렸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니골라당이라 말합니다. 이들은 영주주의 이단의 교리를 받아들였던 무리들로 추측됩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하지 않고 거짓 가르침에 저항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 가르침에 저항했고, 거짓과 맞서 싸웠고, 이단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투쟁은 오랜시간 지속됐고 그들은 그 현실 속에서 인내했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의 이러한 행위 즉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수고와 인내을 높이 평가하고 칭찬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에베소교회처럼 진리를 수호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기 위한 수고와 인내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칭찬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받았던 부분 또한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Revelation 2:4 NKRV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러분 에베소교회가 잃어버렸던 첫 사랑은 어떤 첫사랑일까요? 대부분 그 첫 사랑을 가리켜 에베소교인들이 처음에 하나님을 사랑했던 그 애틋한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사랑도 포함될 수 있으나 현대 신학자들은 본문의 문맥을 통해 발견해 볼 수 있는 내용인 “이웃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그 “첫사랑”을 잃어 버린 것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 이유의 첫째가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지나치게 싶을 만큼 칭찬했다는 점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말씀을 따라 기독교 교리를 수호하는 데에서 만큼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던 교회라는 것입니다. 만약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잃었다면, 그리스도가 그토록 따뜻하게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분명 오늘 본문 말씀에 보시면 악한자들에 대해 격력하게 반대했고,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들은 대개 악에 대하여 관대하거나 무관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계시록 이장 오절에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통해 에베소교회의 첫 사랑을 잃은 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표현대신 “하나님을 믿어라! 또는 하나님께 돌아와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촉구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계시록 이장 이절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사람에 대한 “행위”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십니다. 물론 믿음과 행위를 분리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믿음, 말씀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어떠한 행실은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에베소교회에게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주요 신학과 사상은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책망할 때도 그의 신학과 사상이 반영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에베소교회가 잃어버렸던 그 첫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신학과 사상이 함축된 말씀입니다.
John 13:34–35 NKRV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 John 4:20–21 NKRV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 두 말씀 모두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앞에 있는 요한 일서 이서 삼서의 내용을 확인해 보시면 요한이 말하는 그 첫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들이 품지 못했던 그 한 사람들을 품고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순수했던 신앙의 모습을 가리켜 “첫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넷째로, 그 “처음 사랑”이라는 의미가 첫째 둘째를 가리키는 순서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너희들은 하나님을 두 번째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된 “처음은”분명히 순서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즉 과거의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현재 말씀과 교리적인 부분에서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는 칭찬을 받고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첫 사랑” 즉 시간적으로 과거에 가졌던 순수함의 측면인 타인을 향한 행위인 이웃 사랑은 많이 식어진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래드라는 신학자는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보증이라고 가르치셨다. 초창기 에베소 교회의 회심자들은 그러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과의 분투, 이단적 가르침에 대한 증오로 인해 서로에 대해 조차 나쁜 감정과 거친 태도를 보였고, 그것이 점차 자라나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미덕인 사랑을 저버리기까지 했다. 교리적인 순수성에 대한 열정과 충성은 결코 사랑을 대체할 수 없다.”
물론 에베소교회가 잃어 버린 그 처사랑에 대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모두”를 잃어 버린 것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러한 해석도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해석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에베소교회가 잃어버린 그 첫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지 않으려는 첫 사랑의 실패라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마운스라는 신학자도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크게 보면 사랑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는 주로 에베소 교회의 회심자들이 서로를 향해 가졌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성도들을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 제자도의 독특한 표지와 같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가 이단을 증오하고 그들이 가진 신앙에 걸맞는 행위들을 광범위하게 확장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서로를 향한 처음 사랑의 불꽃이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21세기는 다양한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치적 문제는 한 가정 안에서도 큰 불란을 일으킵니다. 좌파와 우파를 거론하며 서로 싸우다 이혼하고, 부모가 자식과 자식이 부모와 의절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믿음인 이데홀로기 때문에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계 내에서도 차별금지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의 때문에 교단이 갈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신앙과 신념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타인에 대한 불신과 미움 심지어 배척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 이러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해야 합니다”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를 범한 죄인들을 품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낙태는 죄이지만 낙태의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그 젊은 여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 내에는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역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그 일을 위해 금식도 하고, 새벽 예배도 나오고, 모든 공예배와 헌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러한 열심이 있는 분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사역에 열심이 없는 분들은 남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자신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신앙 정통주의를 고수하다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아니면 그들을 나몰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네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그 첫 사랑이 바로 “형제간에 보여야 할 사랑”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잃어 버리고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이단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옳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나름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강조하다 보니 어느덧 하나님의 교회가 종교집단이 되어 버렸고, 신비주의적인 집단이 되어버렸고, 무미건조한 집단이 되어 버렸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주관하는 세상 집단과 같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게 이와 같은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Revelation 2:5 NKRV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가 받은 처방전은 생각하고, 회개하고, 행위를 가지라

저와 여러분들이 생각없이 행동하고 말했던 그 일로 누군가는 많은 아픔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내셔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그 표현이 바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라”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야 그 다음 과정인 회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원어 ‘메타노이아’입니다. 이는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생각의 변화는 행동을 낳기 때문에 회개의 원어가 “생각을 바꾸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측면에서 볼 때 믿음이 들음인 것은 맞지만 우리가 바른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서 바른 믿음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그 생각을 바꾸는 회개를 했다면 그 다음은 믿어라!가 아닙니다.
본문은 회개 이후에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습니다. 믿어라!가 아니고 행하라!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들의 문제는 처음 행위, 즉 “첫 사랑”인 하나님 사랑을 가까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성도들에게 실천하는 행위가 부재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라가 아니라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여러분 때로는 기도라는 믿음보다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에게 찾아가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회복해야 할 “첫 사랑”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때로는 자신의 사역의 열매를 맺기 위해 팀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보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을 기다려주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회복해야 할 “첫 사랑”일 수 있습니다.
3. 여러분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서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들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품거나 기다려 줄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 사랑”일 수 있습니다.
첫 사랑을 회복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Revelation 2:7 NKRV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은 그런 의미에서 70인역 성경은 “낙원”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인 에덴은 어떤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진 곳입니다.
우리가 첫 사랑을 회복한다면 즉 하나님 사랑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성도로 이 세상에 저항하며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그런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계시록 이장 칠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뛰어 넘어 매일 매일 하나님을 알아가는 관계를 통해 경험 되어지는 기쁨, 지혜, 만족, 감사의 삶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영생을 이와 같이 요한복음에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John 17:3 NKRV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은 생명나무의 열매인 영생이 미래적 측면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의 의미를 넘어 현제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되어 지는 관계적 측면에서 누리게 될 복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적 측면에서 현재적 영생을 누리게될 자들을 가리켜 요한은 “이기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기는 그에게”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까? 누가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열매와 승리의 주체는 예수님이셨습니다. 비록 오늘 여러분들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셔야 하고, 깨어진 상사와 동료와의 관계 그리고 성도와 가족간의 관계 회복을 위해 여러분들 스스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셔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이김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먼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품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이기신 이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이기는 자에게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상하의 수직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좌우의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론 우리의 너무 깊은 신앙심이 또는 너무 종교적인 성향이 그렇지 못한 가족과 성도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을 판단하고 미워하며 그들을 배척하도록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어 그러한 관계들을 소홀히 하여 문제를 일으켰던 그 일을 기억하시고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받아 들이시고 생각을 바꾸는 회개를 통해 그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지금 행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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