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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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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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UNLIKELY
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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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0UNLIKELY
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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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0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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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한 때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정신줄을 부여잡기 힘들 때 사용하는 익살스런 표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처하신 상황이 딱…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이 나오기 쉬운 상황입니다.
본론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수근거립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말하죠.
예수님은 스스로,,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궁극적으로는 하늘에서 오셨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오셨고, 메시야는 어디서 오시는지 알 수 없으니,, 예수님은 절대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상황만 보면, 얼마나 황당하고 혼란스럽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실까요?
아닙니다.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분명하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보내신 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28절, 29절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참되신 분이 누구실까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왜 보내셨나요?
요한복음의 3장 16-17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여기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자로 보내셨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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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나는 무엇무엇이니...”라고 말씀하시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다 무엇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구원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고,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구원자다.’라는
대답을 생명의 떡,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신 겁니다.
2천년 전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자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또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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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라는
표현이 무려 17번이나 나옵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데 말이죠.
이것은 요한복음이 특히 ‘보내심.’에
대해 강조한다는 증거겠죠.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전도의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보내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보냄 받아 가신 그 곳은,, 어떤 곳일까요?
안타깝게도 오해가 있고, 핍박이 있고, 조롱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보내심을 받아 가셨는데,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해 ‘갈릴리에서 온 저 사람이 메시야일 리가 없다.’ 라며 조롱했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복음 전도를 위해 보냄 받아 가신 그곳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완성시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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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그 곳에 보내신 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후반부에서는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20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 의아합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보냄 받은 그 곳에는 핍박과 조롱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한번 당해보라는 마음으로 평강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신 걸까요?
아니죠.
예수님은 복음 전도를 위해 제자들을 보내신 그 곳에 평강을 실제로 주실 계획이셨던 겁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20장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을 함께 보내주실 것이니 그 곳에 핍박이, 조롱이, 죽음이 있다 할지라도
평안할 수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14장 26절과 27절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를 보내시는 예수님은 우리 곁에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성령님은 누구의 영이십니까?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고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나라의 군주가 전쟁터 가운데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군을 보냈습니다.
그 장군은 나라와 군주를 위해 최전선에서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옆을 돌아보니 자신이 섬기는 군주가 함께 싸우고 있는 겁니다.
장군과 군대를 그저 보내기만 하지 않고,,, 함께 하는 군주에게… 그 장군은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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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신 성도 여러분을 이제 가정으로, 그리고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보내신 그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복음 전도를 위해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힘겨울지라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시고!
이내 가득 차오르는 평강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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