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점수가 최종점수가 아니야

일산장로교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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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남자 이야기 2. 다른 곳을 바라보던 사람들 3. 광야의 자리는 기회의 땅이다 4.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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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기가 있었겠죠. 여러분 언제 예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나요? 언제 구원의 감격을 경험 했었나요? 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은혜와 구원의 감격 그리고 인격적으로 만난 사건이 참 많았을 것이라 생각해요.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저녁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중학생일 때 오셨던 전도사님은 기도에 진심 미쳐 계셨던 분이었어요. 그래서 중고등부 모든 학생들을 매일 저녁 7시에 교회로 불러서 10시까지 기도회를 진행 하셨어요. 당연히 기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중고등부는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도사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애들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끌고 와서 그 자리에 앉히고 같이 기도를 하셨어요.
저는 어땠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 9살 때부터 목사, 선교사가 꿈이었던 양휘석은 이 기도회를 참석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말해 뭐하겠어요. 당연히 안 갔죠. 목사는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그냥 노는게 더 좋았던 휘석이는 기도회를 가지 않았어요. 도망 다녔어요. 기도가 아니라 게임에 미쳐 있었거든요. 거의 중독자처럼 게임을 했어요. 당연히 예수님은 뒷전이었죠.
하나씩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리에 앉혀 기도회를 이어가던 전도사님에게 한 가지 미션이 생겼어요. 양휘석을 잡아야 한다.라는 미션이 생겼어요. 알고보니 저 빼고 다른 중고등부 애들은 다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었더라구요.
심지어 제 친구는 걸어서 1시간 거리이고, 버스도 저녁 8시면 끊기는데 그 거기를 걸어와서 기도하고 밤 10시에 집에 걸어가고 있었어요. 기도회 가지 말자고 같이 이야기했는데, 진짜 완전 배신자죠.
역시 스파이에 첩보대로 딱 그 시간에 마을 어귀에 차가 슥 들어 오더라구요. 저는 집에서 나와서 마을 으슥한 곳에 숨었어요. 그리고 그들을 지켜봤어요. 무슨 범죄자 잡는 것처럼 승합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더니 제가 살던 빌라로 다같이 뛰어 올라 가더라구요. 그리고 다들 한숨을 쉬며 내려 왔어요.
작전이 실패 한거죠. 그리고 막 흩어져서 저를 찾기 시작하는데, 저만큼 그 마을을 아는 사람이 없고, 또 저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까 당연히 잡히지 않았어요.
그렇게 2-30분 여간의 추적이 끝나고 승합차에 다들 타서 돌아 가더라구요. 왠지 알 수 없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면서, 집 근처에 있는 슈퍼에 들어 갔어요. 마침 주머니에 돈도 있겠다. 기분도 좋고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어요. 그리고 스크류바를 딱 들었어요.
계산을 하고 거기에서 까서 쓰레기를 버리고 문을 열고 나와서 입에 스크류바를 넣는 순간. 양 옆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튀어나와서 제 손을 잡고 뒷목을 잡았어요. 제 양손을 잡았어요. 아이스크림 어떻게 됐을까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져서 땅에 쳐박히는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전 그렇게 승합차로 끌려 갔어요. 한 입도 먹지 못한 스크류바를 남긴 체 저는 교회로 끌려가서 기도실로 던져짐을 당했어요.
내가 승리한 줄 알았는데 패배한거죠. 심지어 내 돈 500원까지 썼는데 졌어요. 이긴 줄 알았는데 지면 진짜 허탈해요. 던져져서 기도실에 들어 갔는데,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구요. 그냥 웃음만 나왔어요.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에요.
밖에서 자물쇠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어요. 저 범죄자도 아닌데, 밖에서 쇠사슬로 묶고 자물쇠로 잠구더라구요.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 왔어요.
“기도하기 전에, 예수님 만나기 전에 넌 나올 수 없다.”
당황스러워서 정신도 못차리고 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정신이 돌아 오더라구요.
거기에서 전 탈출 계획을 세웠어요. 기도실에는 밖으로 나가는 창문이 두개가 있었어요. 중 1때는 제 키가 158이었거든요? 창문은 작지만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어요.
창문을 열고 넘어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전도사님의 딱 나타났어요. 저는 그대로 뒤로 자빠졌어요. 그리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른 창문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어요. 거기엔 배신자 제 친구가 서 있었어요.
모든 탈출로가 막혔어요. 그리고 기도할 때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고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어요. 이제 저의 선택지는 딱 하나에요. 기도하는 것. 이거 밖에 답이 없었어요.
근데 또 오기가 생기는거에요. 기도를 하는 척을 했어요. 그랬더니 전도사님이 문을 쾅 치면서 “장난치지마!!”라고 하는거에요. 뭘 해도 제 머리 꼭대기에 계셨던거죠.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포기했어요.
앉아서 씩씩 거리다가 그래 기도나 해보자. 라는 마음이 들어서 기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 기도를 시작했어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냥 혼잣말을 한 거죠.
저는 그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어요. 진짜 말도 안되는 사건을 겪고 기도실에 던져졌고 감금까지 되었는데, 그 말도 안되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어요.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니, 제 입에서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고 하나님 앞에 저의 죄를 다 고백하고 있더라구요.
저는 그 날을 절대 잊을 수 없어요. 양휘석이 정말 다시 태어난 날이거든요.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날이 분명 있을거에요. 어제도 기도하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을거구요.
오늘 저는 우리처럼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나누려고 해요.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던 사람들이요.
첫번째, 한 남자가 있어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남자에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오늘 일을 열심히 해야, 성과를 내야 가족이 먹을 음식을 살 수가 있어요.
그는 이 일을 잘하고 싶었어요. 대대로 해왔던 일이긴 하지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내일과 미래를 만들어서 자녀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신이 일하는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고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인지 늘 성과가 좋았어요. 노력한만큼 꽤 괜찮은 결과가 그에게 돌아왔고, 그는 그 결과를 통해 삶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요. 그 날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어요. 똑같은 날이었어요. 평소와 같이 날씨를 확인하고 물길의 변화를 보며, 자신의 일터이자, 가장 잘 알고 자신 있는 장소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날 따라 소득이 없어요. 자신이 공부해왔고 터득해왔던 데로라면, 소득이 있어야 해요.
그날 따라 뭐가 바뀌고 변하고 그런게 아니에요. 똑같이 평범한 날이에요. 그런데 아무 것도 얻지 못했어요. 그렇게 밤을 새고 돌아왔어요.
그리고 전날 밤을 복기하며 배에서 그물을 꺼내 씻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복기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거에요.
집안 대대로 해왔던 이 일. 그리고 집 안에서 내려오는 고기가 잡힐 수밖에 없는 그 포인트에요. 잡히지 않을리가 없어요. 무조건 고기가 잡혀야 하는데 한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허탕을 친 오늘 집에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떤 음식을 사가야 할지 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그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요.
“배를 잠시 빌려달라”
지금 이 사람의 심경은 상당히 복잡해요. 고기가 잡히지 않은 이유를 분석하고 대책을 세워야 오늘 밤에도 허탕을 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려면 어서 그물을 정리하고 들어가야 해요.
여러 생각으로 분주한 그에게 “배를 빌려달라”고 이야기해요. 배를 빌려주지 않아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그가 자신의 배를 기꺼이 내주어요.
배는 이 남자에게 있어 삶의 터전이자 정체성이에요. 함부로 내어줄 수 없어요. 그가 살아갈, 가족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완전 필수품이에요.
그런 그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배를, 빨리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하는 그 순간에도 그 사람에게 내어주었어요.
배를 내어준 것은 단순히 빌려준 것을 의미하지 않아요. 그는 이 사건을 통해 배를 포기하게 되거든요.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일을 경험하게 되거든요.
게임만하고 스크류바 사먹는 것으로 인생의 행복을 느꼈던 양휘석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것처럼, 그의 인생도 배를 손에서 놓으면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은 말씀을 같이 듣고 있던 배의 주인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세요. 예수님께서 배에서 어떤 말씀을 나누셨는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말씀을 듣고 육지와 조금 떨어져있던 배를 몰아 깊은 곳으로 가기 시작해요.
저희 아버지가 한 때 낚시티비에서 특집 촬영을 하자고 할 만큼 나름 유명한 분이었어요.
낚시대회 나가서 우승하고 상금 타고 하셨어요.
어느 날인가 집에 모르는 아저씨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물고기 잡는 방법에 대해 아버지에게 배우겠다고 오신거죠. 화이트보드를 가져다 놓고 그 앞에서 열강을 하시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정말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사람들이 고기 잡는데 고수가 되어 갔어요.
저희 아버지는 좋은 낚시대가 없었어요. 진짜 저렴한 낚시대 하나를 딱 들고가서 물고기를 정말 많이 잡아왔어요.
저 어렸을 때 화장실 욕조에 물고기가 살았어요. 아이스크림 먹으려고 냉동고 열면 붕어가 우수수 떨어졌어요. 그만큼 프로였어요.
그런 프로에게 누군가가 가서 “너 잘못했어. 그렇게 잡는게 아니야!”라고 하면 말을 들을까요?
안 듣겠죠. 자신만의 노하우와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은 큰 실례가 되는거죠.
특히 낚시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기분이 나쁠거에요.
이 배의 주인은 프로에요. 프로 낚시꾼이에요. 그 누구보다 물고기 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요. 딱봐도 물고기를 잡아본 적 없는, 그물을 던져 본 적 없어 보이는 사람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해요.
그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웃고 넘길거에요. “지금은 물고기가 잡히는 시간도 아니고, 깊은데는 물고기가 없어요” 라고 하면서 넘겼을거에요.
하필 그날은 하루 종일 그물을 던졌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잖아요.
이 사람은 재미로 취미생활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대대로 가업으로 받아 해왔던 사람이란 말이죠. 허탕을 친 불편한 마음을 간신히 추스리면서 겨우 그물을 씻고 정리하고 있었어요.
불편해 죽겠는데도 배까지 빌려 줬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래요. 솔직히 선 넘는거 아닌가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전문가도 아니잖아요. 당연히 무시해도 되는 그 때 그가 이렇게 말을 해요.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 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내가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가겠습니다.”

무시를 당하다

두번째, 이 사람은 양치기에요.
당시 양을 치는 사람은 인기가 없었어요.
첨단 산업이었던 농업에 비교했을 때 정말 하찮고 귀찮은 일로 여겨 졌어요. 기피하는 직업이었어요. 농업이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많은 도구가 필요하고 경험 그리고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혹시 농사 지어봤나요?
저희 부모님이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제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농번기 방학이 있었어요. 씨를 뿌리거나 수확할 때가 되면 학교에서 방학을 주고, 학생들에게 농부들을 도와주라고 하는거죠.
그 때가 되면 저는 농사를 짓는 친구들 집에 갔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의 부모님을 도와 씨를 뿌렸어요.
저는 그냥 지나가면서 씨를 뿌리면 되는 건 줄 알았거든요?
아니더라구요. 오와 열을 맞춰서 정확한 위치에 씨를 뿌려야 해요. 그래야 모가 잘 자라고 풍부한 수확을 할 수 있더라구요.
씨를 뿌리기 위한 사전 작업과 도구들 그리고 여러 기술까지 합쳐진 진짜 세상 복잡한 메카니즘을 가진 것이 농업이더라구요.
양치기가 살던 그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때는 아마 더 했을거에요. 지금과 같은 기계들이 없기 때문에 더 어려웠을거에요.
그에 비해 목축업은 규모가 상당히 작았어요. 어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때가 되면 우리에서 꺼내오고 우리에 넣고, 방목 해 놓고 풀을 뜯게 하면 끝이었어요. 여성과 어린 아이 등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양을 치는 이 소년의 집에 한 손님이 찾아와요. 정말 중요한 손님이에요.
그래서 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 집안의 사람들이 싹 모여요. 그런데 이 소년은 부름받지 못했어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양을 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양을 칠 하인이 없어서 양을 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 아버지가 그를 “막내”라고 불러요. 사실 우리에게 막내는 굉장히 좋은 의미잖아요? 어딜가나 막내는 사랑을 받고 예쁨을 받죠.
아버지가 ‘막내가 양을 치고 있다.’라고 말한 것은요. ‘사랑스러운 막내가 양을 치고 있어서 이 자리에 오지 못했어요.’라는 뜻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사용된 ‘막내’는 하카톤이라는 단어인데요. 하카톤 굉장히 사람을 깔보고 내려 볼 때 사용하는 단어에요.
‘막내가 양을 치고 있습니다.’를 직역하면
“하찮은 녀석 하나가 있는데요. 양을 치고 있어요. 굉장히 하찮고 쓸모 없는 녀석이라 이 자리에 와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거에요.”라는 뜻이에요.
모든 아들들을 불러 오라는 사무엘의 명령에도 초대조차 받지 못했던 양치기. 막내 아들이었어요.
아버지만 막내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 것이 아니에요.
어느 날 아버지가 막내에게 전쟁에 나가 있는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오라고 보내요.
이 아들은 먹을 것을 들고 형들이 있는 전쟁터를 찾아갔어요. 한참을 가서 큰 형을 만났어요.
막내 동생이 자신을 위해 먹을 것을 싸들고 왔어요. 그럼 일반적으로 “아이고!! 우리 막내 왔어? 그냥 오지 뭘 음식까지 싸왔어.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좀 쉬어”라고 할거에요.
근데 큰 형 엘리압이 별안간 호통을 치기 시작해요.
“야! 너 어쩌자고 여기 왔어!”
들판에 있는 양들은 어떻게 했어? 누구에게 맡겼어? 니가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솔직히 말해. 아버지가 보내서 온 것 아니지? 건방진 자식. 너 내가 아버지 팔면서 전쟁 구경하러 온 것 모를 것 같아?”

세상이 이기는 것 같아 보여도

세번째, 이 사람은 강철 멘탈의 소유자에요. 사람들이 조롱하고 손가락질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멘탈을 갖고 방주를 지었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방주를 지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가 꼭 먼저 살펴봐야 하는 내용이 있어요.
창세기 4장을 보면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족보와 아담과 하와의 새로운 아들 셋의 족보가 등장해요.
사실 가인은 살인을 했고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니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족보가 어떠했는지 기록할 필요는 사실 없어보여요. 그런데 성경은 그 살인자의 족보를 기록해 놨어요. 불필요 해 보이는 기록이라 해서 그냥 넘겨서는 절대 안돼요. 이 안에는 정말 중요한 메시지가 숨겨 있거든요.
가인이 동생을 죽였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그를 지켜주시겠다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보호의 표를 받은 가인이 길을 떠나 한 곳에 정착하여 번성하기 시작해요.
성경을 잘보면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굉장히 의미심장하죠. 하나님의 보호의 표를 받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 하나님께 인사하고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뒤로한체, 삶에서 배제한체 길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요.
다시 말해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규칙을 개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거에요.
그리고 정말 그런 일들이 그의 자손들 중에 생겨나기 시작해요. 4장 16-24절에 가인의 족보가 있는데요. 사람들의 이름이 쭉 나열하던 중, 성경은 한 사람에게 집중하기 시작해요.
그의 이름은 라멕이에요.
라멕이 그의 아내들에게 말해요. 아내들이래요. 뭔가 꼬이기 시작했어요. 원래 하나님은 부모를 떠나 하나. 단수가 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라멕은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어요. 심상치 않죠. 하나님의 규칙을 개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고 있죠.
이어지는 그의 말이 더 충격이에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내가 죽였다. 나는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만큼 강하고 능력도 있다. 그리고 난 잔인하고 포악한 존재이다.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라며 노래를 불러요.
하나님을 떠나 규칙을 개무시하고 멋대로 살아가겠다!라고 외쳤던 가인과 그의 후손. 그 후손은 살인을 자랑스럽게 외치며 노래까지 불러요.
가인의 후손의 삶의 양식이 어떤지 이해하겠나요? 그들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은 떠났어요. 나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지워버렸어요. 그렇게 멋대로 살아가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아요. 그들의 포악함과 죄는 날이 갈수록 커져가요.
세상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지워버린 그들의 족보에 이어 셋의 족보가 등장을 해요. 한 순간에 아들 둘을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아들이죠.
셋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들과 완전히 대조되는 삶을 살아가요.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거에요.
그럼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나? 잘못은 지들이 해놓고 삐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나?
아니죠. 가인이 아벨을 왜 때려 죽였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마음에 안들어서 때려 죽인거잖아요. 아담과 하와도 그리고 그 자손들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왔어요. 그런데 지금 성경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라고 말하죠. 이것은 무리가 집단이 드디어 하나님을 공식적으로 예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요.
각자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으며 살아왔어요. 하지만 그들이 모이지 않았던 거에요. 어떤 이유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함께 모여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들이 모여 집단이 되어 하나님을 공식적으로 예배하고 있어요.
세상에는 이제 하나님을 지우고 갈라진 사람들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만 남았어요.
그렇게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오던 삶의 양식이 어느 순간 툭 끊어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해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 2절이에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을 지운 삶과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 그들의 족보가 섞이기 시작해요. 삶의 양식이 혼합되기 시작해요.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되지 않는 청년들이 있을거에요.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3가지의 주된 가설이 있어요.
첫번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이다.
약간 좀 이상하죠? 갑자기 그리스 로마신화가 된 느낌이죠? 그들이 내려와서 사람들과 결혼을 했다고 말해요. 그런데 또 이게 완전히 근거가 없는 이상한 헛소리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욥기 1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여호와 앞에 서서 회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리고 네피림이라는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해요. 아낙 자손. 즉 거인들을 네피림이라고 하거든요? 그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아니 아담과 하와는 거인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거인들이 나타났지?”
“어? 이거 유전자 변형 아닌가? 그럼 천사들이랑 사람이 결혼한거 맞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두번째,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은 가인과 셋의 후손을 구분지어 부른 것에 불과하다
세번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왕족들이었다. 권력과 힘이 있었던 그들이 좋아하는 여성들을 다 데려다가 결혼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그들이 누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 삶의 양식이 혼합 양식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지웠던 문화하나님을 기억하는 문화가 합쳐졌어요.
성경을 보면 자기 눈에 좋은데로 사람들끼리 막 결혼하기 시작했데요.
여자들을 데려갔다고 해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거에요.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데로 선택하고 마음껏 누리고 유린하기 시작했어요.
혹시 자기 눈에 좋아보이는 것을 선택했던 사건이 가장 먼저 일어났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맞아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니까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가질만큼 탐스러워 보였어요.” 그래서 따먹었어요.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어요.
하나님에게서 오던 무한공급이 끊어졌어요.
이제 사람들은 또 다시 그 때처럼 내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고 그분의 속성을 공유 받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존재가
스스로 짐승처럼 동물처럼 본능과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어요.
하나님은 더 이상 없어요.
세상의 문화와 하나님의 문화가 섞였어요.
그리고 그 승자는 세상처럼 보여요.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삶을 더 행복해해요.
끝난 것 같아요.
세상이 이긴 것처럼 보여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어 보여요.
엎친데 덥친 격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며, 인간 지은 것을 한탄하기 시작하세요. 한탄은 다른 말로 말하면 후회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것에 대해 후회하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사랑하지만 벌을 내려야하는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너무 괴로우신거에요.
그만큼 세상에 가득찬 죄를 보며 마음 아파하고 계신다는 뜻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또 공의의 하나님이기에, 죄와 함께 갈 수 없는 분이기에 그 것을 다 지우셔야 했어요.
하나님이 한탄을 하던 말던, 우리를 바라보며 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그 애절한 눈물과 사랑을 보이고 계시던 말던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떠올리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 세상이 된 것만 같아요.
99.9%가 같은 삶을 살아 가요.
하나님을 지운 삶을 너무나 행복해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일 기쁨 속에 살아가요.
그런데 그 때 상황의 반전이 일어나요.
8절이에요.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0.1%의 사람. 단 한 명에게 하나님이 주목하기 시작하세요.
여러분 노아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위로하다”에요. 위로하다.
극도로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하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던 거에요.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떠올리고 예배하던 한 사람.
하나님을 위로하던 존재가 남아있었어요.
노아도 죄인이에요. 그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에요.
하지만 그의 모든 삶의 목표와 방향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어요.
여러분 노아처럼 그렇게 삶의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께 맞출 수 있어요?
우리는 노아보다 상황이 나아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를 원하는 청년들이 여기 이만큼이나 모여 있으니까요.
옆을 봐요. 같이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우리 옆에 있잖아요.
모일 수 없어 답답하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던 코로나 3년이라는 시기를 함께 겪고 이겨낸 동역자들이 여기 있잖아요.
그런데 노아는 혼자였어요.
하나님의 흔적을 지워가던 시대. 아니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 모르던 시대.
신을 이야기하는 순간 미개하다 말하는 그런 시대를 그가 살아가고 있었어요.
하나님을 다 지워버린 세상이에요.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기준을 말하면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가족빼고는 아무하고도 하나님의 기준과 말씀을 나눌 수 없는 사람이 노아였어요.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라 하시죠.
먼저 고페르 나무를 사용하래요. 방수에 굉장히 뛰어난 나무에요. 그런데 아무데서나 가져올 수 없었어요. 널려 있는 아무 나무로 만들 수 없었어요.
무조건 고페르 나무여야 했어요. 고페르 나무라고 다 좋은 것 아니잖아요. 가서 보고 방주를 지을만한 것을 엄선해서 가져와야 했어요.
그렇게 가져온 고페르 나무에 역청을 발라야 해요. 지금이야 뭐 철물점 가서 방수포 사와서 바르면 되죠. 그 때 그런게 어디있어요. 직접 만들어서 앞뒤 모른 곳에 고루 발라야 해요.
그거 만드는 것 쉽지도 않아요. 다 일일히 손수 시간을 드려 만들어야 했어요.
배는 또 얼마나 큰 줄 알아요?
여러분 100m 달리기 해봤죠? 100m 뛰고 결승점 들어왔는데 50m 더 뛰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요? 힘들죠?
배 길이가 150m 였어요. 너비는 3-40m 높이는 14m. 아파트 3층이 약 11m에요. 그 보다 높은 방주를 지어야 했던거에요.
방주 만드는 것이 쉬웠을까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노아와 그 가족들 밖에 없어요.
비가 상당히 왔는데도 배가 뜨지 않았어요. 그럼 엄청 고지대에서 방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높은데로 올라갈수록 숨쉬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노아는 고페르 나무를, 역청의 재료를 산 아래서부터 다 들고 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매일 나무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야 너 뭐하냐 진짜. 한심하다 한심해”
“몇년째냐 지금? 진짜 노답이네”
“벌써 70년이나 지났어. 정신 좀 차려”
“진짜 이거 미쳤네. 미쳤어.”
누가 뭐라해도 방주를 지었어요.
홍수라는 개념이 없었던 그 때 홍수가 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최소 70년 최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어요.
인류의 99.9%가 하나님을 떠났고 지워버린 세상. 세상이 이긴 것 같아 보이는 그 때 있었던 한 사람. “자기에게 명하신데로 다 준행하는 것을 즐겨했던 노아”가 있었어요.
그가 살았던 현실은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역할 모델로 칭송받았던 때였어요.
누가봐도 세상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였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 개무시 당하던 때였어요.
세상은 하나님의 흔적을 지운 후, 현재의 승리가 최종 승리의 증거라고 허풍을 떨기 시작했어요.
세상에 하나님은 없고, 이제 오직 인간만이 남았으며 인간이 최고라고,
계속 최고의 자리에 남고 싶다면 나를 따르라고
그러면 최종 승리가 주어진다고 주장했어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똑같아요.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지워버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잖아요?
우리가 초중고대학교 때 배우는 모든 학문은 세상의 학문이에요.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남은 하나님을 지워버리는 교육들이에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드라마 영화 책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과 반하는 내용들이 잔뜩 담겨 있어요.
저 마블 굉장히 좋아해요. 그 세계관 공부하는 것도 좋아해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그거 말도 안 되는거잖아요.
무슨 멀티버스가 있고, 죽은 사람의 몸에 다크홀드를 써서 정신을 이어요.
무슨 외계인들이 행성을 뛰어 다니면서 다른 행성을 구해요.
스톤 구해서 한번 튕긴다고 사람이 왜 반절이나 사라져요. 솔직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잖아요.
그걸 진짜로 받아 드리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 없을거에요. 그리고 “그게 뭐가 잘못 됐어요?”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 이게 세상의 전략이에요. 혼란스럽게 만드는거에요. 혼동 시키는거에요.
그게 말이 안되는 소리라는 것 알아요. 그런데 거기에 자꾸 빠지게 만들어요. 그러다보면 진실과 거짓이 헷갈리게 되어요.
정말 뭣이 중한지 모르게 만들어요.
가랑비에 옷이 젖듯 계속해서 우리는 그렇게 세상문화에 젖어들고 있어요.
가인과 셋의 족보가 혼합된 것처럼 세상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뒤죽박죽 섞이게 되어버렸어요.
저와 여러분에 삶에 분명한 영향을 주고 있는 두 가지가 있어요.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는 세상이 주는 달콤함과 즐거움 그리고 매혹적인 세상 문화 그리고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고, 온통 불편한 것 투성이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
나의 삶이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한탄케 했던 99.9%의 사람이 되고 말거에요.
하지만 깨닫고 의식하면서 살아가려 애를 쓰고, 혼합된 삶을 힘들더라도 괴롭더라도 분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로했던 노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이 될거에요.
분명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첫번째 남자있었죠.
예수님께 배를 빌려 드리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믿음으로 그물을 던졌던 그 남자. 누구일까요? 맞아요. 베드로에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셨어요.
말씀에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었어요.
그저 하루를 살아내기에 급급했던 사람. 어부 외에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 없는 그를 직접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그에게 살아가야하는 희망과 소망을 주셨어요.
그 부르심에 응답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물론 계속해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도 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더 이상 세상의 가치로 살아가지 않기로 결정했거든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베드로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 “만선이 꿈인 어부”였어요. 그의 삶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가치는 돈. 물질이었어요.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의 방향과 가장 중요한 가치말씀이 되었어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에라이 밑져야 본전이니까 던져는 본다.”가 아니었어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던집니다.” 이 순간부터 그의 삶의 가치는 말씀이 된거에요.
평생 만선이 꿈이었지만 만선의 기쁨을 누려본 적 없던 그가, 물질을 포기하고 말씀을 의지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랬더니 평생의 꿈이었던 만선을 보게 되었어요.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알고 보니까 예수님 타짜였네!!”라고 생각했을까요? 절대 아니죠. 그저 선생님이었던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었어요. 그가 바짝 엎드려 “나를 떠나달라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요.
이게 상식적으로 맞는 대화에요? 그의 평생의 꿈 만선을 지금 경험 했잖아요.
“감사합니다! 허탕 친 줄 알았는데, 다행히 물고기를 팔아 우리 가족을 먹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팔고 얻은 돈의 얼마를 감사하니까 드릴게요!” 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향해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제발 떠나주십시오”라 말했 어요. 왜 그는 이런 고백을 했던 것일까요.
예수님 앞에 서니까,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니까요. 자신이 중요하다 여겨왔던 모든 세상과 그 물질의 가치가 형편없어 보였던 거에요.
베드로는 배 위에 있으면, 배만 있으면, 비록 넉넉하지는 않아도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먹여 살리고 나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가치관 속에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랬던 베드로가 전날 밤 큰 실패를 경험했어요. 그 실패를 만회할 어떤 방법도 돌파구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성공을 했어요. 자신의 생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그 일가능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어요.
그 때 그는 깨달은거에요. 이 일이 가능한 분은 한 분밖에 없다.
바로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 말씀하세요.
배 위에서 내려오라. 배에서 내려와서 땅에 서 걸으라. 그리고 사람을 취하라.
이제부터 너의 삶의 목적은 물고기. 세상의 가치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세요.
배는 베드로의 삶의 터전이자 정체성이에요.
배는 베드로의 전부에요. 그런 그에게 배를 포기 하라고 하시는 것이죠.
여러분을 여러분되게 만드는,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학교? 직장? 직함?
무엇이 여러분을 여러분되게 만들어가고 있나요?
세상이 원하고 말하는데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그렇게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나를 만들어간다면요. 세상이 바라는 인간의 삶을 살아가게 될 뿐이에요.
내 삶을 지켜주는 것을 계속해서 붙들고 고집 부리면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나도 상처를 받게 될거에요. 그냥 세상에 사는 세상 사람이 되고 말거에요.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 그 분이 나의 삶의 정체성이자 이유라 말하는 그 사람은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거에요.
베드로가 배를 버리고 따랐어요. 하지만 언제든 그는 다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그랬던 그에게 정말 그 배를 포기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요.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세요. 그 배에는 프로 배잡이들이 가득했어요. 그렇게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 갑자기 거센 풍랑이 들이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혹시 배 타 본 적 있나요?
제가 필리핀 있을 때 생각을 하거나 쉬고 싶을 때 항상 가던 섬이 있었어요. 그 섬에 들어가려면 작은 배를 타야 하는데요. 이 배는 작은 파도는 버틸 수 있지만 바람이 좀 거세게 불면 막 흔들리는 배였어요.
어느 날 배를 타고 들어가는데 선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거에요. 창문 없이 비닐을 돌돌 말아놨던 배였는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기 시작하니까 비닐을 내리고 찍찍이를 붙여서 고정을 하더라구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저는 배멀미를 해본 적이 없는데요. 진짜 속이 너무 울렁거리는거에요. 계속 헛구역질 나오고 머리가 아프고, 빨리 섬에 도착 했으면 좋겠는데 맞바람을 맞으니까 너무 더디게 나가는거에요.
배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비닐로 막았지만, 바람과 비, 그리고 파도는 그대로 다 들어왔고 결국 온몸이 다 젖은체로 진짜 기절하기 직전에 섬에 도착을 했었어요.
지금 제자들이 만난 풍랑은요. 제가 경험한 것과 차원이 달랐어요.
왜냐하면 프로 배잡이들 조차 키를 붙들지 못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운전하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다 죽는다!”라고 외치면서 고군분투하던 그들에게 누군가 쓰윽 찾아오죠.
처음엔 귀신인 줄 알고, 온갖 소리를 다 질렀는데 알고보니 예수님이었죠. 물 위를 걸어오는 분을 보고 베드로가 외쳐요.
“저도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질문! 풍랑이 칠 때 바다 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파도가 치는 바다” “배 안”.
당연히 배 안 이죠. 비바람이랑 파도가 치는데 어딜 가요. 배 안에 있어야지.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거에요.
“저도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이 말은 “나도 물 위를 걸어 볼래요. 나도 나도 해볼래요.”
이게 아니에요. 비록 비바람이 치고 미친 듯한 파도가 몰려오는 바다 한가운데이지만,
가장 안전한 곳은 이 곳 배 안이 아니라 당신이 있는 그 곳입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이에요.
“물 위를 걸어 당신에게 가고 싶습니다.”
“물 위를 걸어 가장 안전한 당신의 품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 위로 뛰어 들었어요. 그런데 진짜 걷게 된거에요. 얼마 걷다 물에 빠졌지만 베드로는 이때 진짜 배를 포기하게 되었어요.
배를 진짜 포기하고 나를 위협하는 세상 속으로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고 뛰어들면서 손에 쥐었던 세상의 가치를 집어 던졌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나요?
그럼 배 위에서 내려와야 해요. 여러분이 편안하다 여기는, 나에게 익숙한 그 자리에서 반드시 내려와야 해요.
배를 장식하던, 여러분의 인생을 장식하던데 사용하던 에너지를 이제는 그 곳에서 내리는데 사용해야 할 때에요.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걷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만 가능해요.
흘러가는데로 살지 마요. 하루 하루 의미 없이 보내지 마세요. 의미 없이 보내게 하는 그 삶에 자리에서 나오세요. 배 밖이 위험해 보여도 나오세요 이불 밖이 위험하긴 해요.
이불 안이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긴 해요. 그렇다고 계속 이불 안에 있을 수 없잖아요. 이불 안에만 있으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잖아요.
생활을 하려면 싫더라도 이불을 박차고 나와야 하듯, 배 밖이 위험해 보여도 나오세요. 그래야 물 위를 걸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삶을 실제로. 진짜로 경험할 수 있게 돼요.
두번째, 무시를 당했던 양치기 이야기에서 양치기는 누구이죠? 맞아요. 다윗이에요.
다윗은요. 완전 공기 취급을 당해왔어요. 하찮은 사람. 아니 하찮고 필요없는 녀석으로 불렸어요. 왜 그가 그런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무시 당했어요.
가족부터 그를 무시 했잖아요. 가족부터 없는 사람으로 봤잖아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넘어졌을거에요. 포기 했을거에요. 가족들에게도 버림 받은 나같은 사람이 살아서 뭐하나 생각했을거에요.
그런데요. 다윗은 달랐어요. 자신을 향한 모든 조롱과 시기를 오히려 이용했어요.
“나는 몇 마리 되지 않는 양이나 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을 향한 규정과 평가에 굴복하지 않았어요. 맞서 싸우는 것을 선택해요.
“야! 너 어쩌자고 여기 왔어!”
들판에 있는 양들은 어떻게 했어? 누구에게 맡겼어? 니가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솔직히 말해. 아버지가 보내서 온 것 아니지? 건방진 자식. 너 내가 아버지 팔면서 전쟁 구경하러 온 것 모를 것 같아?”
“제가 무엇을 했습니까? 내가 왜 여기에 온 이유가 없겠습니까!”
이것은 무시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 막내가 형에게 대든 것이 절대 아니에요.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향한 평가에 맞서 싸운거에요. 그리고 나서 돌아보니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고 있는 골리앗을 보게 되었어요. 돌팔매를 들 골리앗 앞에 서요.
그는 비록 형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 자리에 간 이유를 골리앗을 통해 깨달아요.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요.
그는 돌팔매 초고수죠. 돌팔매는 당시에 상당히 유용했던 무기였어요. 투석병의 전투 기술이었어요. 기습하는 기마병을 쓰러뜨리는 엄청 좋은 기술이었죠. 스나이퍼가 어디서 총을 쏘는지 모를 정도로, 돌팔매를 소리 없이 조용히 날라가서 적들을 격퇴시켰어요.
다윗은 자신을 규정하는 세상의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했어요.
세상에 관점에서 그는 보잘 것 없는 양치기였어요. 아무런 기술도 없고 가정에서 조차 내놓은 자식. 구제불능. 필요 없는 자식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항했어요.
양들을 치는 그 광야에서 다윗의 모든 생각은 오직 하나님이었어요. 광야에서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간절히 원했어요.
집에 있는 것보다 양들과 함께 들판으로 나간 것이 더 마음이 편했을거에요. 그 광야에서 한탄만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을 붙들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다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아 나는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구나. 나는 하찮은 자식이 아니구나”
여러분. 삶. 쉬운가요? 아님 어려운가요?
대학가면 즐거울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죠?
직장 취직하고 돈 벌면 좋을 것 같았는데 답답하죠?
원하는 공부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건가 현타 올 때도 있죠?
왜 없겠어요. 꿈을 이루고 원하는 사역을 하고 있는 저도 그런데, 여러분이라고 왜 안힘들겠어요. 저하곤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겠죠.
왜 힘들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유가 나와요.
내가 하나님 안에서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이 규정하는 가치에 나를 넣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다윗이 들판에서 신세를 한탄하고, 왜 내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야 할까만 생각했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었을거에요. 형이 호통쳤을 때 주눅 들어서 아무 말 하지 못했을거에요.
힘든 그 삶의 자리. 광야처럼 보이겠지만 그 자리는 기회의 땅이 분명해요.
저와 여러분의 그 자리는 우리를 레벨업 시키는 장소에요.
코로나 기간동안 어떻게든 믿음을 지켜내려 했던 여러분들은 충분히 지금 레벨업을 이루어 낸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 광야의 시간은 여러분의 믿음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라 저는 믿어요.
다윗은 양을 지키기 위해 돌팔매를 익힐 수밖에 없었어요.
양을 지키려고 배웠던 그 돌팔매를 통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요.
광야에서 양 떼를 맹수로부터 지켜내며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어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 도망자가 된 그 시절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했어요.
당신을 그 곳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세요.
지금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이 공부와 회사를 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겠지만, 그 자리에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분명 깨닫게 하실거에요. 그 곳에서 여러분을 더 일으켜 세우고 강하게 만드실 거에요.
저와 여러분의 그 자리는 영적 성숙의 자리에요.
다윗은 양을 치면서 성숙 해졌어요.
양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자신을 인도하며 기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내가 있는 이 자리가 하찮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바라보는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모두가 능력도 기술도 없는 사람이 하는 양치기라고 조롱 했지만, 그 자리에서 위대하신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아마 까닭없이 여러분을 괴롭히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요.
물론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과도하게 힘들게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거에요. 기질이나 성격이 맞지 않을수도 있고, 무능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냥 이유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거에요.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앞에 하나님을 의지했어요.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참았어요. 하지 않았어요.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이겨내려고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 있는 그 자리를 영적 성숙의 자리로 받아드렸기 때문이에요. 힘들수록, 고민이 될수록 그는 하나님을 찾아갔어요.
저와 여러분의 그 자리는 새로운 기회를 반드시 제공할거에요.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쫄지 않고 대담하게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요. 그 자리에서 발견했던 새로운 가능성 자신의 재능을 보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기회가 되는 자리에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살아 내는 자리’에요.
내가 하는 일과 공부에 대한 의문 분명 있을거에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수익이 나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고 죄다 ‘사장과 회장’이 가져간다고 생각할거에요. 맞아요. 사실이 그래요.
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 어떤 일도 ‘하찮은 일’ ‘현타 오는 일’은 없어요.
이 자리를 지키는 여러분을 통해 떠나간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거에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 자리에 여러분을 세우신 하나님을 찾으세요. 목적을 믿으세요.
그래야 여러분을 향한 세상의 시선과 간섭저항할 수 있어요. 이겨 낼 수 있어요.
다윗 위대한 사람이죠. 하지만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좀 더 좋지 않은 조건에서 살아왔던 보통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는 개무시 당하는 왕따였어요.
커서는 왕이 죽이려고 해서 도망자의 삶을 살았고,
혐오하는 이방 민족의 왕 앞에서 살아남으려고 침까지 흘렸던 사람이에요.
그가 그 모든 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내가 왕이 될 것이기 때문”“내가 왕이 되면 다 복수”하기 위해 버틴게 아니에요.
내가 있는 그 자리나를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기회의 땅이라 여기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에 버틴거에요.
겨울 수련회가 끝나면 우린 다시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거에요.
또 다시 하나님이 지워진 세상.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될 거에요.
99.9%가 하나님을 혐오하는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형편없다 말하며 나를 또 주눅들게 할 거에요.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가치있게 여기라고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이용해서 신호를 보낼거에요.
우리 함께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찾아 볼까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음부의 권세는 다른 말로 지옥문이에요. 다시 읽어보면 “지옥문은 교회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이건 엄청난 약속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지옥문의 뜻은요. 다음과 같아요.
원래 성문은 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용도잖아요.
누군가 공격을 한다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기려고 싸우겠지만, 덤벼드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 수록 그 안에서 두려워하며 소심해지고 방어만을 할거에요. 생존에 급급한 방어를 하겠죠. 간신히 하루를 살아내며 두려움과 절망 속에 빠질거에요.
“지옥문은 교회를 이길 수 없다.” 성문을 들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죠. 마귀가 그 지옥문을 들고 우리를 공격하진 않을거에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일차 독자.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지옥문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나를 둘러싼 세상의 공격과 위협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나의 삶. 나의 발걸음을 막지 못한다” X2
우리도 동일해요.
가장 안전한 장소인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기를 소망하는 사람을 더 이상 위협할 수 없어요.
나를 작게 만들고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것에 대해 저항하기로 결단한 사람의 마음을 절대 꺾을 수 없어요.
하나님을 지워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올리고 위로하려는 그 사람의 발걸음을 절대 막을 수 없어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 일산장로교회 대학청년부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 사랑하는 모든 이 곳에 모인 청년들 한사람 한사람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을 향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거에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가 바로 너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결단한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여호와의 그 은혜가 충만해서, 하나님을 위로하고 위로 받는 청년들이 되기를 소망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바로 너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 마음을 이 시간 느끼는 귀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을 고백하라
- 솔직하게 지금 내 마음을 하나님께 말하라
- 지금 내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 나에게 사랑하는 자가 바로 너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께 입술을 열라
돌아서지 않으리
- 코로나 시기를 잘 견뎌주어 고맙다
- 지금의 그 마음처럼, 지금까지의 삶처럼 돌아서지 않겠노라 선포하며 기도하라
- 하나님을 지워가는 세상 속에서, 삶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는 내가 되기를 기도하라
- 이 길을 나 혼자 갈 수 없다. 대학청년부가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겠노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푯대를 향하여
-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 왜 나를 계속해서 부르시고 계신다고 생각하는가?
-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라고 말씀하심을 믿는가?
- 그렇다면 여러분을 유혹하는 그 배에서 내려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내가 되길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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