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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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
여러분 우리는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얼음이 녹는 것, 나무에 꽃이 피는 것,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는 것, 사람들의 옷차림 같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계절이 바뀌면 많은 것들이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일도 봄이 찾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봄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5-7장에서는 예수님이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본 말씀들이 모두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혁명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8장부터는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자신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자면 가르치시는 것과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산 위 설교가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이었다면 이제 질병을 고쳐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말로만 가르치지 않으시고 직접 보여주십니다.
8-9장에서 총 10가지 기적들을 행하시는데 8장 22절까지 먼저 세가지 기적들을 소개합니다.
첫번째가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것이고, 두번째가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 장교의 하인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세번째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기적들을 통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지 깨닫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섬기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14-17절)
1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의 손에 손을 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그 여자는 일어나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그 당시 열악한 의료환경을 생각할 때 열병은 위험한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병 걸린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예수님께 이 여인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아픈 줄 아시고 찾아오셔서 그녀의 손을 잡아 고쳐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고치실 수 있습니다.
앞서 로마장교의 하인을 고치실 때에는 직접 찾아가지 않으시고 단지 말씀으로만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에는 직접 터치하셔서 고쳐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누구보다 민감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나병환자나 로마장교, 열병에 걸린 여성은 부정한 사람들이라서 모두 유대인 사회에서는 배척받거나 소외받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불가촉 천민, 언터쳐블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터치하셔서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고쳐주신 것입니다.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병자의 질병이 나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 질병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의사가 아닙니다.
자식이 너무 아파할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부모는 자식대신 자신이 아팠으면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자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플 때 우리 주님은 더욱 아파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가장 절정으로 나타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본원인인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럼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을 경험한 베드로 장모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5절보시면 그녀는 병이 낫자마자 예수님 시중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을 따라간 사위 베드로를 매우 괴씸하게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또한 그가 따라간 예수님에게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위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바람에 자신의 딸이 고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잡아서 열심히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예수란 작자를 따라가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싫어하던 예수란 자가 병든 자신을 찾아와 손을 만져주시고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분명 그녀의 분노는 눈녹듯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보고 느낀 것입니다.
그 분의 기적과 사랑을 경험했으니 이제 그녀도 열렬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된 것입니다.
그녀의 무력했던 손이 섬기는 손으로 바뀐 이유는 고침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적용]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 섬김받으려 하기보다 섬기는 자가 됩니다.
내가 받은 사랑만큼, 내가 받은 섬김만큼 또다시 누군가를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섬김이 바로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연약함과 고통을 공감하며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섬기기보다 섬김받는데 익숙합니다.
우리는 함께 아파하는데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할 때 우리는 함께 아파하며 섬기는 자로 변화됩니다.
그럼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까요?
둘째,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18-20절)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 옆에 둘러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시고, 강 건너편으로 넘어가려 하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기에 힘입어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갔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높아진 마음을 아시고 사람들을 피하려 하십니다.
수많은 인파들을 보며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마치 잘 팔리는 프로그램쯤으로 오해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는 그들의 심장을 뛰게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을 통해 본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마치 핵인싸되는 법, 행복의 비법, 병 고침받는 법같이 신박한 프로그램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었을 때 어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강을 건너려 할 때 자신도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겟습니다.
그가 율법학자라면 구약에 대해서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산 위에서 하신 설교를 듣고 감명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며 하나님 나라에 가슴이 벅차 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고백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직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유명한 설교자나 예언가라고 생각하고 제자가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부푼 기대에 대해 예수님은 찬물을 확 끼얹으십니다.
2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여우도 새도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짐승들도 가지고 있는 보금자리 하나 없는 분입니다.
물론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이 정말로 예수님이 갈 곳도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 무대였던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집에 자주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인자’라는 표현이 그 의미를 밝혀줍니다.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은 예수님의 고난받는 모습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학자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며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과 불편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적용]
한 때 우리나라에는 기복신앙이 잘 팔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베스트셀러는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쓴 ‘긍정의 힘’, ‘잘되는 나’, ‘최고의 삶’이런 것들 이었습니다.
이런 제목 들으면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당시 목사님들도 예수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주저없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잘 믿었는데도 만약 이 땅에서 못누리면, 죽어서라도 천국에서 금수저로 밥먹고, 황금 카페트가 깔린 대궐같은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제자의 삶은 피곤하고 불편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 역시 무너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너무 고생만할 것 같나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 가치와 비밀을 깨닫는 자만 소유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12제자들조차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계기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기꺼이 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치뤄야할 비용보다 그 가치가 더 크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못된 반응을 하는 또 한사람을 소개하십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올인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21-22절입니다.
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앞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또다른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납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을‘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제자중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벌써 따르고 있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예수님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죽음을 바라보고 계셨을수도 있고, 벌써 죽으셨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죽은 사람들이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게 하고, 너는 나를 계속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이란 실제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기에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장례는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장례는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율법으로도 정해져 있고, 십계명중 제 5계명은 부모공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의 사회적 통념으로도 부모의 장례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부모님 장례 치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 통념과 전통, 심지어 율법까지 초월해 버리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떨까요?
이거 완전 이단이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제 생각에 이단도 이렇게는 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파격적인 예수님 말씀에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과연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자로의 부르심은 곧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제자에게 매몰찬 말씀을 하신 이유는 부모의 장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의 장례를 치루지 말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부모 공경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가치를 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던 일을 상대화시키기 위해 그 예를 든 것일 뿐입니다.
[적용]
그럼 우리는 우리 삶의 무엇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그것에 따라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헌신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대상이 부모 장례가 아니라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고, 직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절대적 가치를 돈에 둔 사람은 돈을 더 벌수만 있다면 가족은 좀 희생시킬 각오를 합니다.
반면 삶의 절대적 가치를 가족에 둔 사람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돈은 좀 희생시킬 각오를 합니다.
여기서 조수미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런 위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직업에 절대적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녀의 삶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자신의 연주를 연기하거나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가고싶은 마음에 그 연주장에서 눈물을 흘릴지언정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도 조수미씨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조수미씨는 어쩌면 자신의 직업을 위해 결혼까지 포기한 것일지 모릅니다.
이런 조수미씨의 삶을 어떻게 보십니까?
음악에 올인한 그녀의 삶을 존경합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럼 만약 그 대상이 음악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또는 하나님 나라라면 어떨까요?
내 삶에서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와 경쟁할 수 없는 사람이 곧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것들에게 충성경쟁을 하고 있습니까?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일에 전적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올인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에 올인하는 것이 교회에만 충성해야 한다거나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세상을 섬기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섬김과 낮아짐, 헌신과 충성으로 주님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히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낫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봄이 오면 꽃이 피듯, 하나님 나라가 왔고 오고있다는 싸인입니다.
지금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고 있는데 얼었던 땅이 풀어지고, 자연은 새생명을 탄생시킬 준비를 합니다.
그렇듯 사탄 아래에서 질병과 귀신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기적은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성경에서 질병은 죽음의 한 증상으로서 죄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결과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게 된 것도 바로 이 죄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귀신을 내쫓으셔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치유받은 그들도 나중에는 죽을 수 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것들을 이 땅에서도 미리 맛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모두 들어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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