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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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장 1절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떄에"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룻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말해주는 일종의 시그널과 같은 구절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적 배경에 대한 진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은 억지일까?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는 구체적으로 어떤 때인가? 출애굽이후에 여호수아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족속의 가나안 정복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의 시절이다. 사사기는 이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각기 소견대로 행하였더라"라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쓰는 것을 통해 당시의 비신앙적인 시대상을 고발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말이지 각자가 내키는 대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명목상의 타이틀일뿐 삶의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방의 풍습을 쫓았고, 그들의 신들을 섬겼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사실 또한 자랑하였다.
이런 시절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닥쳤다. 흉년으로 인한 기근은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고통과 고난의 이유가 되었다. 분명 사람들은 그 고난의 시절에 힘겨워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룻기에 등장하는 엘리멜렉 가정이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이 가정은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갔던 당시 사람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엘리멜렉을 보자. 그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거창한 이름뜻을 가졌다. 지극히 신앙적인 이름이다. 그런데 그의 삶은 어떤가? 하나님을 왕으로 신앙하는 이가 하나님의 언약의 땅을 떠나, 이스라엘에 지극히 적대적인 모압땅으로 살기위해 떠난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이가 하나님을 포기하고 이방으로 떠난 격이다. 나오미는 어떤가? 그녀의 이름은 '기쁨'이라는 뜻이다. 약속의 땅에서 기뻐해야할 이가 모압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자신의 이름을 슬픔이라는 의미를 지닌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절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태도가 그러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않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지만, 자기 합리화와 우상숭배로 가득하였던 모습이 그 백성들이었다. 우리는 엘리멜렉의 가정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할까?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속에 생존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극히 비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의 모습이 아니곘는가?
이러한 비신앙적인 삶의 모습은 계속되는 1장의 내용속에 반복되고 있다. 나오미는 자신의 남편과 두 아들들을 잃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이들이 흉년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대대로 지켜야 할 땅을 버리고 모압으로 떠난 것은 분명 죄악된 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 룻기 성경 저자는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 그것이 범죄라고 말하고 있는가? 또한 남편과 자녀들이 죽은 사건에 대해 심판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바로 이점이다. 나오미의 가정에 일어난 어려운 사건에 대해서 말씀은 섯불리 그것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누군가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 평가하고 말하기를 기뻐한다. 또한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하고 실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님을 기억하자. 고통앞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왜라는 질문대신에 어떻게라고 질문을 가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을 알 수 있는 까닭이 없다. 예를 들어 욥을 보자. 그는 자신이 당한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바로 '왜'이다. 왜 자신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가?라는 질문이다.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왜라는 질문대신에 그렇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가지기를 원한다. 욥의 끊임없는 '왜'라는 질문에 하나님은 폭풍우 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폭풍우속에서 들리는 세미한 음성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폭풍우와 같은 고난의 현장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일 대에 하나님의 돌보심과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나오니믄 두 며느리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그네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한다. 이 장면에서 끝까지 자신의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나오미의 어른됨을 확인할 수 있었는가? 나오미는 위로와 축복을, 그것도 이방 여인에게 헤세드의 축복을 기도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성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는 것은 어던 연유일까? 분명 축복은 배풀었다. 그런데 이게 웬인인가? 그 여인들이 떠나온 고향집으로 돌아가라는 확신에 찬 명령인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이들은 모압 여인들이다. 그녀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면 그 여인들의 신앙의 모습을 어떠하였을까? 하나님을 잊고 그 동족들이 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또한 9절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며느리들이 위로를 받기를 원한다고 고백을 하였다.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우리가 참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참된 위로와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이방 신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평안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나오미는 허울좋은 백성의 살을 살아가지만, 그녀의 실제의 삶은 신앙과 괴리된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떄에 그녀의 며느리중의 하나인 룻은 16-17에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한다. 보자, 그녀의 어머니는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 며느리들을 떠나 보내려 한다. 이에 오르바는 자기의 길을 찾아 떠났고, 룻은 끝까지 어머니 나오미 곁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공언을 하였다.
16-17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룻의 신앙의 태도는 지극히 하나님 중신의 신앙 생활이었다. 그럼 생각해 보자. 나오미는 지극히 계산적이며 현실주의자인데, 그에 반에 룻은 너무나도 순순하고 신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였을까?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집오기 전에는 이방인으로 살았던 모압 여인 룻은 결혼하면서 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경험하였을 것이다. 룻은 비록 건강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여러 성품에 대해서도 나오미라는 가정에서 신앙에 대한 교육을 배웠을 껏이다.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이 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되새김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나오미는 모압에서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악의 문제로 생각했지만, 룻이라는 여인에게는 그 가정은 하나님을 경험하여 배우는 은혜의 현장이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나오미(엘리멜렉)의 일행이 가나안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가게 된 것이, 또 그 땅에서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을 경험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룻이라는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여인 룻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삶의 정황들을 하나님께서 동원하신다는 사실이다. 고통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존재였지만, 그러한 입술의 고백이라 할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말씀을 읽이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과 일하심에 대해서 묵상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앞에서는 헛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세상사에 지치고 말할 수 없는 무서인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겪고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위로하여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나오미의 어떻게 회복되었을까?
나오미에게 회복은 룻을 통해서이다.
나오미는 룻이라는 이방여인의 고백을 들었을 때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믿었던 남편과 자식들을 모두 자신을 버리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이 여인만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녀와 함께 묻히겠단다. 이별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에게 어떤 말이나 감정따위에 위로가 얼마나 큰 것일까? 참된 위로는 함께 하는 것이다. 아프고 고통하는 이와 함께 하면서 그의 눈물을 닦고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고 공감하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서로 남편을 잃을 처지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또한 나오미는 룻의 고백을 통해 영적을 회복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룻의 고백을 보자. 어머니의 민족이 자신의 민족이 되겠단다. 그것도 그 기회를 결코 놓지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묻히는 곳에 자신도 묻히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자신은 배고품에 못이겨 하나님의 땅을 떠났지만, 그리고 이방 땅에서 마치 이방인이 되고자 하는 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살았다. 열심히 그 땅에서 살아가는 법도 배웠을 것이다. 자녀들의 이름을 모압식으로 붙이고, 또 모압 여인들로 며느리를 삼았다. 그러니까 괜찮으면 그 땅에서 모압사람들 처럼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방인인 룻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되겠단다. 그 땅을 소유하겠단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민족과 땅은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민족을 이루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 그러니까 가나안을 영원한 것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나오미는 모압에 발을 딛는 순간 이 언약은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룻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 나오미의 민족과 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단순히 불쌍한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정말이지 하나님 중심으로 언약을 지키고, 언약의 수혜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회복의 일들은 우리 인생들이 쉽게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이여, 현재의 삶이 끝이 아닌 것.. 나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에 힘을 얻기를 소망한다.
또한 나오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룻은 누구보다 강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있음을 기억하자.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곳이며, 먼저 된 자가 나중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