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1_주일예배_출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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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의 참뜻

Exodus 20:8–11 NKRV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방금 우리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인 안식일에 관한 계명의 말씀을 함께 보았습니다. 흔히 우리는 십계명을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내용으로 분류해서 이해합니다. 1-4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요, 5-10계명은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서를 보아도, 꼭 십계명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십계명을 핵심으로 하는 율법의 내용을 두 가지로 집약하고 있습니다(마가 12:28-34; 누가 10:25-28). 누가복음에서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떠 보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딱 두 가지로 집약해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십계명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계명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크게 봐서, 이렇게 이해하는 방식에 잘못이나 어떤 문제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십계명은 단순히 둘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때 훨씬 더 깊은 뜻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방식이란, 이 십계명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10가지 계명은 단순히 평면적인 두 가지 차원을 함축하고 있기보다는 입체적인 세 가지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기본적으로 모든 내용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은 세 가지 차원을 포함합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의 차원이요, 두 번째가 인간과 인간간의 차원, 세 번째가 인간과 물질(세계)와의 차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② 우상을 섬기지 말라 ③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 이 세 계명이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이라면,  "⑤ 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 살인하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는 이 세 계명은 인간 스스로 직접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⑧  도둑질하지 말라 ⑨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세 계명은 물질적 관계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합니다. 제9계명이 단순히 '거짓말'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거짓증거' 곧 물증을 암시하고 있는데 유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누어 놓고 보면 한 가지 계명이 쏙 빠집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제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이 제4명을 요즘 시대에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게 고작 '주일성수해야 한다' 하는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낡은 종교적 계율, 혹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주일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기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 제4계명은 그렇게 가벼운 계명이 아닙니다. 이 계명은 그야말로 모든 계명의 정신을 다 함축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이례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을 강조할 때, 우선 어느 대목에서나 기본적으로 공통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렛날은 모든 생업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쉬라'고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아들과 딸, 종들과 가축, 그리고 식객까지도 다 쉬라고 하는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나 배경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본 출애굽기의 본문은 '창조의 질서'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렛째 하나님께서 쉬셨으니 너희도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신명기 5: 12-16절에도 십계명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안식일 계명은 에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일을 환기시키면서 네가 쉬어야 네 여종과 남종들도 쉴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안식일 계명이 창조의 완성으로의 거룩한 안식일을 말함으로써 '창조의 질서'를 환기시키고 있다면, 신명기의 안식일 계명은 아주 강렬한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또 한 곳 출애굽기 31: 12절이하에 보면, 안식일의 의미는 아주 특별하게, 아주 강렬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명하면서 이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계약의 징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 다소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결국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지금 몇 가지 예를 든 본문들에서 강조하는 그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때처럼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 자가 따로 없는 인간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일그러진 창조의 질서를 본래 그 모습대로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자연적 질서, 그러한 사회적 질서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도리이며, 그 길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구체적 징표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안식일' 곧 주일성수 혹은 주일예배는, 일상의 일그러진 관계,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 제대로 된 옷감을 짜는 행위이며, 본래의 창조질서를 구현하는 구체적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드리는 이 예배는, 적어도 그 일을 위해 다짐하며 그 일을 위한 원동력을 얻는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기회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계명의 정신 모든 율법의 정신을 다 함축하는 계명이 바로 안식일 계명이었기 때문에, 구약성서는 끊임없이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라고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했기 때문에 강조되었던 안식일 계명은, 어느 때부터인가 그 본래의 알맹이는 싹 빠진 채 껍데기만 남게 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규정과 의무감만 남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해 보지 않아서 경험은 없습니다만,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꼭 유의해야 할 사항 중에 하나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대교 종파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지역에서는 안식일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금요일 해지고 나서부터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는 먹을 것을 미리 확보해두지 않으면 낭패를 당한다고 합니다. 사람조차 구경하기 힘들 정도라고 해요. 이런 생활양식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이 사람을 옭아매는 구실을 하게 될 경우에는 분명하게 거부를 선언합니다. 복음서에서(마가 2:23-28; 누가 6:1-5; 마태 12:1-8) 예수님의 태도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 번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흠을 잡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선언합니다.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 40-1 / 39*6=234가지 금지사항: 파종, 쟁기질, 수확, 단묶는 일, 타작, 키질, 독서, 제분, 체질, 반죽, 굽는 일, 표백, 빗는 일, 채색, 잣는 일, 실을 감는 일, 엮는 일, 분리하는 일, 매듭짓는 일, 푸는 일, 시침질, 이를 위해 뜯는 일, 사냥, 도살, 가죽벗기는 일, 소금에 절이는 일, 가죽정리, 깍아내는 일, 절단, 두 개 글자 쓰는 일, 이를 위하여 지우는 일, 건축, 무너뜨리는 일, 불끄는 일, 점화, 망치질, 운반...)
이것은 단순히 안식일을 파기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안식일의 참뜻을 회복하려는 생명의 선언, 살림의 선언입니다. 안식일의 근본 의미를 살린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쉰다는 의미에서 안식은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말로 절실한 일입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에 매여 있다 보면, 생각하고 깨닫고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놓치고 지나가는 때가 많습니다. 맡겨진 업무, 당장 치러야 할 일거리에 코를 푹 박고 있는 마당에 다른 것이 생각날 턱이 없습니다. 딴 생각을 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일상의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어쨋든 우리의 밥줄이 달려 있고, 설령 전적인 만족은 아니라 하더라도 살아가는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상의 생활은, 우리를 숙명의 수레바퀴에 매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돌고도는 모든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냥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바로 그와 같은 형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을 허락하여, 우리의 일상사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되새겨 볼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단순히 일손을 놓고 잠만 자는 휴식이 아니요, 또는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예배에 나오는 형식적 주일성수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과 더불어 숨결을 나눔으로써 진정한 안식과 깨달음을 얻는 기회를, 우리는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통하여 끊임없이 삶의 원동력을 부여받고, 끊임없이 삶의 좌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과 두 시간의 정전 사태를 통하여, 지난 시대의 인류의 문명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렸노라고 호기있게 신문지면 한쪽을 장식했습니다.(한겨레 1/17,  '아침의 향기' 김곰치) 그러나 우리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 오늘 이 시간처럼 아주 특별한 기회를 누리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한 시간 뿐 아니라 오고가고 식사 나누며 이야기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최소한으로 잡아도 일주일에 3시간 정도는 '정전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다 맞닥뜨린 두 시간의 정전사태, 그것도 타의에 의한 잠깐의 일상의 중단을 통해 지난 세기 인류문명(전기와 기계에 의한)을 반성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한 깨달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시간마저 그저 반복되는 일상의 한 귀퉁이로 처박아둘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일상을 중단하고, 정성을 모아 찾은 특별한 이 시간과 공간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숨결을 나누고 삶을 재충전하며 삶의 좌표를 점검함으로써, 아울러 이 세상 가운데 살림의 기운을 불어넣는 사람들로 거듭나는 기회가 되기를, 저는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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