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5 저녁]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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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42[너시험을당해]
본문 계 2: 8-11
서머나는 당시 소아시아 수도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80키로미터 떨어진, 30만 인구가 살던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던 항구도시였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서머나는 소아시아의 자존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곱 도시 중에서 가장 수려했다고 한다. 외곽에서 도심 중앙까지 반듯한 도로가 놓여있었고, 질 좋은 유향의 생산지이자 천혜의 항구를 가짐으로 수출입을 통한 막강한 부를 거머쥔다. 이 곳에 서머나 교회가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사도행전이나 신약의 서신서에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도바울이 3차 선교여행할 초반부, 에베소로 가던 길에 그곳을 잠시 거쳐갔다는 초기의 전승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나타나는 서머나 교회는 고난받는 교회였다. 고작 4절에 불과한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그들이 지금까지 당해왔고, 지금도 당하고 있으며, 장차 다가올 더 큰 고난에 대한 경고, 그리고 끝까지 견디라는 격려가 전부였다.
무슨 이유로 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받았는가? 왜 그들은 박해를 받았는가?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로마를 인격화한 여신, ‘데아 로마’의 신전이 주전 195년에 서머나에 건축 봉헌되었다. 이는 로마에 대한 그들의 충정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업적이 공적으로 인정받으면서 로마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된 의회를 가질 정도로 서머나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가 황제 숭배를 명하면서 자신의 반신상을 모든 공공기관 앞에 세우라 칙령을 내릴 때에도 가장 먼저 완료하여 보고할 정도로 로마와 황제에 대한 충성이 대단했다. 주후 25년 경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축하여 총애를 얻기 위해 모든 도시들이 서로 경쟁을 할 때에도 항상 1등은 서머나가 차지했다. 대제국 로마의 인정과 칭찬과 보호 아래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와 자유를 누리던 서머나는, 당연히 로마의 눈에 밉보일만한 그 어느 것도 도시 안에 없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서머나 안에서 로마와 갈등을 일으킬만한 무리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 이 무리들은 다른 일에는 아주 부드럽고 유순했던 자들인데, 유독 황제 숭배에 관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질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신상에도 절하지 않았고, 그 신상 앞에서 향을 피우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황제를 주 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상숭배, 곧 자신들의 신앙의 문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머나의 평안이 위태로워졌다. 황제에게 충성을 보이던 서머나에게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마치 반역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서머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도시 안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려 했다.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경제적으로 고립을 시켰고, 온갖 누명을 뒤집어 씌워 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죽기까지 했다. 서머나교회를 향한 박해에는 유대인들도 큰 몫을 거들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를 처형하라고 광기로 가득하여 부르짖던 그들의 계략은 성공한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승천하심으로, 곧 사그라들 것 같던 교회는 더욱 거센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많은 증인들이 복음의 사도가 되어 열방으로 흩어졌다.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선교여행마다 따라다니며 복음전파 사역을 훼방 놓는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성 밖으로 쫓아내게 만든 것도 유대인이었고, 이고니온과 루스드라까지 쫓아가 바울을 돌로 치도록 선동한 것도 유대인이었으며, 데살로니가에서는 폭동을 일으켰고, 고린도에서는 맹렬히 바울을 대적하였다. 교회를 향한 유대인들의 끊이질 않고 지속되는데, 바로 이곳 서머나에서 초대교회 교부였던 폴리캅을 순교하게 만든 것이다. 그를 사자 밥으로 던져야 한다고 가장 목청 높여 외쳤던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었고, 그를 산 채로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이 떨어졌을 때 장작더미를 가장 열심히 나르던 자들도 유대인이었다. 이방인들이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같은 민족이요 나를 고발하려하고, 나를 죽이려 한다 하니 이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이러한 자료들을 취합해보건데, 서머나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당장 오늘 어떤 일을 당하게 될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쩌면 그 부담감 가운데 교인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교회는 점점 약해지는 것처럼,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을런지 모른다. 세상의 눈으로는 이미 망해버린 것 같은 교회를 가리켜 주님은 말씀하신다. 9절에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알거니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복음을 향한 그들의 믿음과 헌신과 희생과 박해를 주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시는가? 9절 말씀을 보면 그 이유가 등장하는데, 서머나 교회가 겪고 있는 환란과 궁핍이 사탄의 하수인으로 일하는 유대인들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라는 책을 보면,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자신의 조카이자 풋내기 악마인 웜우드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지도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왜 마귀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실족하게 만드려는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마귀들에게 속한 자들이라면 굳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수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자신에게 속한 자들이니까.
마찬가지로 사탄의 회당 유대인들이 서머나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노력을 쏟아붓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마나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복음이 그들이 가진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머나 교회가 사탄의 나라에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고난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의 권세잡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서머나 교회는 처음만 하더라도 그들을 둘러싼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인 줄 알았다. 그저 정치적, 경제적 문제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정황을 살펴보니 그 모든 배후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그들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받은 복음이, 그들의 믿음이 진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얼마나 뿌듯했으랴.
하지만 사탄에게 위협을 가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마냥 기쁘고 즐거운 일 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수많은 궁핍과 비방과 더불어, 이제는 더 크고 힘겨운 고난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머나 교회는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는 작은 돗단배처럼, 언제 전복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당연히 사탄의 불같은 공격에 성도들의 마음이 많이 흔들렸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바로 그 괴로운 상황 가운데 놓여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다 안다. 지금 너가 당하고 있는 환란과 궁핍을 나도 안다"
우리가 너무나도 고생하면서 준비한 어떠한 일들 가운데, 큰 인내로서 버텨왔던 그 모든 과정들에 대해 누군가가 알아주고, 인정해주며, 보듬어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내 지난 날의 모든 고통과 괴롬을 누군가 안아주며 알아준다면 그것만큼이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간 서머나교회가 겪고 있는 모든 수고와 고난을 주께서 알아주신다니 이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생이 아무 의미없는 고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의미있는 고생이라 하니 얼마나 울컥했을까. 예수 믿는 믿음으로 인한 온갖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와 차별, 드러내놓고 예배하지 못하여 지하에 숨어 숨죽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순교자들의 수치스러운 죽음 등, 이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다 아신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니, 앞으로의 모든 고난과 역경들을 주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처럼 보인다. 내 모든 괴로움을 다 아신다고 하니 그 괴로울만한 일들을 능히 막아주실 것처럼 기대하게 된다. 모르셨다면 때로 내버려두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란과 괴로움을 아신다고 하니, 반드시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지금의 지옥과도 같은 삶에서 속히 건져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주님께는 실로 그러하실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고, 무엇보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시니 기꺼이 그렇게 하실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전혀 다르게 진행됨을 볼 수 있다. 계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 명령의 요지가 무엇인가? 장차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때로는 순교까지 당하게 될 것이지만, 장차 일어날 고난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귀는 장차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보내어 그 믿음을 시험할 것이고, 그 환난의 시험은 주님께서 정하신 날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주님은 지금까지 당해왔던 환란을 아시고,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고난을 받는지도 아시며, 장차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고난이 찾아오게 될런지도 아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주시겠다고는 안하신다. 속된 표현이라 죄송하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 다 아신다면서도 고난을 막아주질 않으신다. 다 아신다면서도 상황을 바꿔주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지금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즉각 해결되리라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온다. 인생 속의 다양한 문제들이 예수 믿으면 다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복잡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보기 위해 교회를 찾아온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하며, 헌금을 드리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한다. 외롭고 고단한 인생 속에서 신에게 의지하려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점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신앙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은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 기독교는 없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기독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없에주는 종교가 아니라고.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의 몸된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와중에도 환난을 당할 수 있고, 때로 모함을 당하기도 하며, 때로 사업이 망해서 경제적으로 힘겨울 수 있고, 때로 중한 병 가운데 고생하게 될 수도 있다. 예수 믿는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예수 믿는 가운데 박해를 당하고, 예수 믿는 가운데 순교를 당하기도 한다. 오늘날 절대다수의 많은 교인들이 이 땅의 복락을 누린 사람들의 간증에 열광한다. 그들의 간증 100이면 100 모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자신의 문제, 자신의 어려움, 자신의 고난 모두를 해결하셨다는 내용 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들을 역전시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대다수의 믿음의 선진들이, 삶 가운데 그런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믿음의 선진들은 고난과 환란 가운데 쓰러졌고, 사탄이 놓은 시험의 불길에 장렬하게 타들어갔다.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사랑하는 자녀가 괴로워한다면 이를 지켜보던 부모가 자식을 즉각 도와 일으켜주는 것이 맞는데, 즉각 역경에서 건져주는 것이 맞는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면서도 우리를 방치하시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하나님, 지금 거기 계시는 것 맞습니까? 도대체 나한테 왜이러십니까? 왜 즉각 날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즉각 날 이 지옥에서 건져주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절규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시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왜 그러시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너무나도 아끼시는데, 그래서 이처럼 환란가운데 신음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더욱 괴로워하실텐데. 왜 고통받는 자녀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만 고난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를 고난으로 초청하셨다.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고난은 참된 그리스도인과 참된 교회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표지와 같았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또한 요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예수님께서 지금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모든 환란, 궁핍, 모함, 체포, 죽음은 주님이 몸소 다 겪으신 것들이었다. 주님께서 먼저 이 모든 것들을 당하셨던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고난과 환난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도바울의 일생을 보라.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경험했던가.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있게 권면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분을 잘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고난을 참된 교회의 표지로 여겼다. 기독교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했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선교지에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많은 이들이 고난과 박해를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서머나 교회는 이미 충분히 고생했다.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주님을 믿는 믿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주님은 더 이상한 명령을 주신다. 이 명령은 정말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너무나도 잔혹하게만 들린다. 10절 중후반부를 보면, 주님은 두려워말라고 하신다. 아니 두려워할만한 상황은 해결해주지 않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만 하시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장차 일어날 너무나도 두려워할 만한 고난을 차근차근 설명하시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만일 제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주일 저녁예배가 마치자마자 군인들이 찾아와서 우리 중 몇 사람을 잡아 끌고 가서 끔찍하게 고문하고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을 그냥 당하십시요" 라고 말한다면 어떨것 같은가? 도대체 이러시는 주님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들을 환난에서 건져 주겠다는 말씀은 안 주시고,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이 있는데 그걸 두려워말고 오히려 죽기까지 충성하라 하신다. 이건 너무나도 가혹한 명령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이토록 잔혹한 명령을 주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미 죽도록 몸부림치던 교회에게 또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명하시는 이유가 있다. 오늘 이 짧은 넉절의 말씀 가운데 그 힌트들이 담겨 있다. 먼저 8절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라고 표현한다. 9절에서는 서머나 교회를 가리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10절에서는 끝까지 견디고 충성한 자들에게 “생명의 관"을 약속하셨고, 11절에서는 이 명령을 지키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다.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지금 주님이 약속하시는 바는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유한한 이 땅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유한한 이 땅에서의 금은보화가 아니라, 유한한 이 땅에서의 명예나 승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복락,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신다. 지금 주님께서는 엄청난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못하며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내가 여러 손해를 보고, 여러 핍박을 당하며, 여러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까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내가 주님을 열심히 사랑한다 해서 고난과 핍박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거나, 내가 주님을 위해 더욱 봉사한다고 해서 갑자기 오랜 질병이 낫는다거나, 내가 더욱 주님을 갈망한다고 해서 갑자기 하늘에서 1억이 뚝 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이적들을 행하시는 분이시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상황이고, 어쩌면 그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인생 가운데 휘몰아쳐오는 고난들을 직면한다.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환란의 때를 그대로 맞아들이게 된다. 일평생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겼건만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간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던가. 온갖 말도 안되는 핍박 속에서도 죽어라 주를 위해 살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심지어 죽기까지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름도 남지 않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이 땅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죽기까지 충성하라” 이 말을 바꿔 표현하면 “죽는 그 순간까지 너의 미음의 신실함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도무지 이 땅가운데 주님의 다스리심이 이해되지 않는 때가 있다. 이 땅은 도무지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주님은 뿌린대로 거둔다 하시는데, 막상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악인이 더 성공하는 것 같고, 늘 그리스도인들은 억울하고, 피해보고, 괴롭고 아프다. 이 땅은 인과율대로 움직이지 않고, 내일 당장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이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돌보심과 그분의 일하심에 대해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이다. 도무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다.
그나마 우리의 신앙을 붙들어주던 것이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교회됨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의 고난에 침묵하시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의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과 괴롬 속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붙들며 흐느끼는 우리보다 주변의 불신자들이 더 잘 사는 것 같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주변을 둘러보아도 나를 도와줄 만한 어떤 이도 보이지 않을 때, 사방팔방을 둘러보아도 피할 곳이 보이지 않을 때, 심지어 하나님도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도대체 어찌 해야 하는건가. 이러한 와중에도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러분, 주님은 변함없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의 돌보심이 언제나 변함없이 나에게 부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때로 고난의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나를 향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믿어야 하고 그분의 돌보심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의 유한한 짧은 지식으로 그분의 광대하신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을 전부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주님이시기에, 지금 눈 앞의 모든 악한 일들조차 선으로 바꾸실 주님되심을 확신해야 한다.
195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음악에 큰 기여를 미쳤던 음악가 존 윌라드 피터슨 역시도 이 점을 깨달았다. 인생 가운데 고난과 어려움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 늘 변함없는 사랑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붙들고 계심을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사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우리는 물론 한치 앞도 볼 수 없다. 인생 속에 찾아오는 여러 고난의 상황에서 주님의 돌보심을 이해할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그분의 선하신 계획을 신뢰해야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를 향하여 “죽기까지 너의 믿음의 신실함을 드러내라"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 오전에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넘어지고 실패한 우리 인생일지라도 끝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도록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 계시며, 그분이 명하시기를 죽기까지 충성하라 하시는데, 여러분, 계속해서 주저않아 있을 수 있는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계속 포기한 채로 낙담한 채로 멈춰있어서는 되겠는가?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지요! 어떤 권세보다 크고 강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다시 일어나야지요! 우리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이루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영원한 상급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의 상황이 괴롭고 힘들겠지만, 나를 향해 밀려오는 환란과 시험이 참으로 아프겠지만, 우리 함께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우리의 달려갈 길 끝에서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 사랑의 품에 안기기까지, 조금 더 힘 내자. 넘어진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자.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요동치 않고 주님께 충성함으로서, 우리의 신실함을 증명하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함께 기도하자. 주여, 상황과 형편만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주저앉던 우리의 믿음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죽기까지 우리의 신실함을 나타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나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다하기까지 최선을 다해 주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고난한 인생길, 여러 시험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난들을 아신다 하시니 감사합니다. 실패자 같은 인생이고 좌절할 인생 같아도, 변함없이 우리를 붙드시는 분을 의지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넘어진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죽기까지 우리 믿음의 신실함을 드러내라는 주님의 말씀 따라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형편을 초월하는 우리의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413[내평생에가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