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만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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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36–16:5 NKSV
36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 봅시다.” 37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도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38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39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40 그러나 바울은 실라를 택하고, 신도들로부터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인사를 받고서, 길을 떠났다. 41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며, 모든 교회를 튼튼하게 하였다. 1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갔다. 거기에는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신앙이 돈독한 유대 여자이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도들에게 호평받는 사람이었다. 3 바울은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생각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그것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바울 일행은 여러 도시를 두루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5 교회들은, 그 믿음이 점점 더 튼튼해지고, 그 수가 나날이 늘어갔다.

새로운 복음의 도전과 인간의 연약함

옛날 어려서 들었던 찬양들을 요즘 다시 편곡해서 듣거나, 예전에 불러 주신 분들이 그 노래를 유튜브에서 불러 주셔서 은혜를 받게 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한곡은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복음성가 남성 듀오, 두분의 목사님께서 부르신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입니다.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니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돼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돼
하날세 우리 모두 다 하날세 우리 모두 다
하날세 우리 모두 다 하날세
우리 주 사랑 안에 사네 주 우릴 하나로 회복했네
한 집에 사는 우리 형제자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린 하날세
형제들 하나 안에 살 때 얼마나 좋고도 즐거운가
달콤한 기름 부은 이슬처럼 우리 위에 내리네
생명 호흡 항상 새롭다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이찬양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모릅니다. 특히 수련회 마지막날 캠프 파이어 하면서 중고등부 선후배 친구들과 모닥불 아래에서 기타치고 노래할 때면 꼭 불렀던 노래 입니다. 그런데 조금 신앙생활 하다보면, 다음과 같은 찬양을 부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 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때 나는 만족하였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교회 다니면서, 목회자들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실망할 때 “ 그래, 교회 사람보고 다니나 하나님 보고 다니지”라는 자조 섞인 말을 많이 하곤 합니다. 교회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지만, 죄인인 연약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가슴아픈 관계의 어려움과 실망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행전_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한 중요한 결정이 편지로 전달되어 교회들은 이방인들이 더이상 유대인의 예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기쁘게 반응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바울과 바나바는 제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크게 다투는 일이 생겼습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큰 복음의 진전과 함께 꼭 일어났던 문제들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이별

사도행전 15:36 NKSV
36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 봅시다.”
영화를 보면 이런 자막이 많이 나오죠? “일년뒤” 또는 “몇년뒤"라는 이야기 처럼 이 며칠뒤에 라는 관용구는 앞서 있었던 사건 즉, 예루살렘 공의회와 전달된 편지와 함께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친지 시간이 흐른 어느시점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이제 사도행전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 사도행전은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했던 도시들에 있는 형제들을 찾아가 잘 지내는 지, 복음을 전할 뿐아니라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37절과 3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37–39 NKSV
37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도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38 그러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39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앞서 1차 전도여행에서 마가라는 요한이 어떤 이유인지 전도여행을 포기 하고 집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안디옥교회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마가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에 함께 동행하자고 하였고, 바울은 마가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사역에 동행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함께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성경 속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은혜 떨어진다고 생각하실거 같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이와 동일한 문제를 겪습니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이것을 그대로 기록해 놓았을까요?
바울과 바나라라고 하는 성경 속에의 초기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들이라 할 지라도 중요한 사역을 앞두고 심하게 다투고, 앞서 예루살렘교회가 중요한 합의점을 찾아낸 것과 달리, 둘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가고 싶었기에 먼저 바나바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누가는 행9:27 “27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바울을 맞아들여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만큼 사람에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마가의 삼촌이었으므로 마가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바울은 전도여행의 일정이 이전의 교회들을 방문하는 것이었으므로 마가가 이 전도여행의 모든 일정과 전도여행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을 지에대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지금 이 문제 이전에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방인과의 식사 문제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4 NKSV
11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12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13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아마도 예루살렘 공의회 전에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가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파 유대인들을 의식해서 그 자리를 떠난 일에대해서 바울은 베드로가 위선적인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 속깊이 자리 잡고 있던 유대 민족 우월감이 하나님께서 주셨던 경험으로 이방인인 고넬료와 식사하였던 복음적 경험과 다른 행동을 하였고, 베드로가 그렇게 행동하니 그와 같이 행동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한명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바나바가 유대인 중심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같은 행동에 실망을 하였고, 마가를 데리고 간다고 하는 것이 그런면에서 유대인 중심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이번 전도여행에 동행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분명 유대인이면서도 너무도 무모하게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에대한 우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두 사람의 갈등은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두길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습니다. 그 이후 바나바의 전도여행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들고 왔던 로마식 이름을 가진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교회의 파송을 받고 떠납니다.
사도행전 15:40–41 NKSV
40 그러나 바울은 실라를 택하고, 신도들로부터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인사를 받고서, 길을 떠났다. 41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며, 모든 교회를 튼튼하게 하였다.
바울은 내륙으로 , 바나바는 배를 타고 정 반대로 움직였습니다. 싸움의 결과 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 따르면, 바나바와 사울에서 바울과 바나바로 바뀐 시점을 볼 때 그 때가 1차 전도여행 중이었습니다. 유대식 이름 사울에서 로마식 이름 바울로 그 이름이 바뀌면서 바울이 먼저 이름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선교의 관점으로 볼 때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이 전개되기 시작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나바는 교회의 파송을 받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나바가 바울 보다 더 잘못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다툼 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의 편을 들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바나바는 선교 역사속에서 버림받은 것입니까?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에 이와같은 인간의 다툼과 갈등으로 갈라선 상황에서 성령님은 함께 하고 계십니까?

바울의 일행, 실라와 디모데

예루살렘 공의회가 오직 믿음, 오직은혜, 오직 말씀, 그리고 성령의 동행하심으로 이방인 할례문제와 식사문제를 결정하였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의 모습을 통해서 여전히 교회 안에 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일행으로서 실라와 동행합니다. 실라는 앞서 예루살렘으로 부터 편지를 가져온 사람인데, 행15:34 “” 은 공란인데, 각주에 의하면 어떤 사본들에는34절의 내용이 첨가되어 있음. ‘34. 그러나 실라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려고 하였다’라고 합니다. 로마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실라가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전도여행에 합류하게 되는 데, 바로 디모데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를 염려했던 바울은 디모데를 전도여행에 동행하게 합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 사람에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2 NKSV
1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갔다. 거기에는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신앙이 돈독한 유대 여자이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도들에게 호평받는 사람이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갔는데, 어머니가 유대인으로서 신앙이 돈독한 유대사람이었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 즉 헬라인 이방인이었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딤후1:5 “5 나는 그대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합니다. 그 믿음은 먼저 그대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깃들여 있었는데, 그것이 그대 속에도 깃들여 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과 같이 여깁니다. 이를 통해서 디모데가 어린 나이에 바울과 동행하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은 약 30km 떨어진 곳인데 그만큼 넓은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고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와 같이 사역을 함에 있어서 준비된 사람과 함께 하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고생스럽고 힘들기에 이방인들을 이해하고 유대인들과도 갈등이 없는 사람이어야 되는데, 디모데는 준비가 되었고, 당시 마가 요한은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사역자의 자질 뿐 아니라 당시 문화에 따라서 상황에 맞는 결정들을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 이기 때문에 그는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디모데의 아버지가 이방인으로서 디모데가 할례를 받기를 원하지 않았거나,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커뮤니티인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할례가 필요하다면 할례를 받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디모데라는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문제가 될 만한 여지를 제공하지 않고 효과적인 사역을 하고자 한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19 NKSV
19 할례를 받은 것이나 안 받은 것이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루는 하나님 나라.

이렇게 어렵게 구성된 바울의 전도여행 일행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행전 16:4–5 NKSV
4 바울 일행은 여러 도시를 두루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5 교회들은, 그 믿음이 점점 더 튼튼해지고, 그 수가 나날이 늘어갔다.
누가는 바울이 바나바와의 갈등으로 인해 새롭게 구성된 바울의 전도여행 팀을 통해서 행하신 일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들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 어떤 것도 짐을 지우지 않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식사 교제 공동체를 위한 권면들이었습니다. 결국 누가는 이 모든 사건들의 결과 교회들은 믿음이 점점 더 튼튼해 지고 그 수가 나날이 늘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썼던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그 말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연약함 속에서도 선을 이루시며, 우리들의 복음 증거의 노력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나아가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마가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골4:10
골로새서 4:10 NKSV
10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마가가 여러분에게 가거든 잘 영접하라는 지시를 여러분이 이미 받았을 줄 압니다).
빌레몬서 24 NKSV
24 나의 동역자인 마가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누가도 문안합니다.
마가는 로마에 가택연금된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이 바울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주석가들은 이 때 바나바와 바울의 두가지 전도여행의 줄기가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과 결별을 사용하셔서 선교의 두갈래가 이뤄지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8:28
로마서 8:28 NKSV
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 전할 수록 바울은 하나님에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시점에 마가를 받아들였고, 그를 동역자로 고백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시점에만 해도 사역중심이었고 사람의 자질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지만, 이후에 그도 온유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품어내는 화해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과 같은 설교도 설교자인 저로서는 살아내기 힘든 설교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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