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 다섯에게
Notes
Transcript
선교
내 형제 다섯에게
눅 16:19-31
본문의 부자와 거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때가 되어 인생의 종말이 부자에게도, 거지에게도 여지없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음부에,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의 손에 받들려져 천국으로 갔습니다.
우선 부자가 얼마나 후회하며 탄식하고 있는지 들어보십시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는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4절)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7,28절)
울부짖는 부자의 “내 형제 다섯!”은 이 비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섯 형제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인지 구체적으로 이름을 아수 없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그 형제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 다섯에 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내 형제 다섯이 누구입니까?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 부자에게 “얘”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이로 보아서 이들은 아브라함과 혈통적 관계가 있습니다.
부자와 아브라함과 관계에서처럼 그 다섯 형제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문과 연관시켜 말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의 다섯 형제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마 사두개인, 제사장, 율법학자, 서기관, 열심 당원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자와 그 형제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와 그 다섯 형제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본문 앞의 말씀인 눅 16:14, 15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들은 돈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부자와 다섯 형제의 삶을 본문에서는
육체적 쾌락의 추구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부자가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는 사실은 육체적인 쾌락의 추구에 몰두하였음을 보여준다. 부자와 그 형제들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았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가르친다(롬8:13).
부자와 그 다섯 형제들은 대문에 누워 있는 거지가 자신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조차도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은 빈민에 대해 그가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파티를 성대하게 여는 데만 관심을 가졌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준비치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미래를 전혀 준비치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습니다. 현실에 눈이 멀어서 미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아 둘 기회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활용치 못했으므로 실패하고 말았다. 미래, 내세를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이 갈 곳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지옥뿐이다.
부자와 그 다섯 형제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달리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였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마 7:21) 말씀의 대상이 되는 삶이 이 부자와 그 형제 다섯의 삶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자가 내 형제 다섯을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 하는 가운데 부자는 천국과 지옥을 모르고 세상에서 자신 못지않게, 자신의 배만을 위하여 살며, 육신의 정욕과 쾌락과 좇아서 사는 형제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웃도 모르고, 오직 자신만을 우하여 살며, 보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서 사는 그 형제들이, 자신이 온 이 고통스런 지옥에 올 것이 뻔하게 여겨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간청했습니다.
부자는 지옥과 천국이 있는 죽음이후의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경고하기 위해 대사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부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면 다섯 형제의 마음이 변화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누군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 해도 그로 인해 그들이 회개할 보장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개인의 삶속에서 믿음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세상을 향한 이기심, 탐욕, 자기 안일 그리고 무관심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겠습니까?
무엇이 사람의 마음속에 회개와 믿음을 일으키고 그로 하여금 천국 가는 길을 걷게 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적과 기사가 그 대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사로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부자의 요구처럼 초자연적 기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잘 믿을 것 같으나 작은 기적을 본 사람은 더 큰 기적을 요구하며, 그로 인해 진실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우리들에게 성경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도 크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들이 복된 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는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째 부자와 그의 다섯 형제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이 어떤 형태로 전달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와 그 다섯 형제들과 같은 이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들으라”는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말입니다.
유대민족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교육인 쉐마 교육을 통해서 매일 같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그들에게 “들으라” 하는 외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듣는 정도가 아니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요구합니다.
부자는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늘 듣고 살았지만 그 가르침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부자로 호화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분복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축복받은 것은 자신의 삶을 이미 주께서 인정하신 표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 때문에 부자의 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부자에게 늘 듣기만 했던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이 실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부자에게 찾아온 나사로는 단순히 거지가 아닙니다.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요 선지자였습니다.
나사로가 부자의 집 대문 앞에 굶주려 누워있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생각하도록 보내신 사자였습니다.
부자와 그 형제들은 나사로를 통해 호소하는 모세와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죄인으로 보았지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회개의 기회, 사랑을 회복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자기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섯 형제들에게도 그들의 참 믿음을 증거 할 기회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모세와 선지자의 외침을 듣게 하려고 주께서 이미 제2, 제3의 나사로를 보내셔서 그들 주위에 두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여러 모양의 나사로들을 우리 주위에 이미 보내 주셨습니다.
각 개인에 따라 그 나사로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사로가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귀가 가려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부자와 그 다섯 형제들에게 하나님 말씀은 하나의 장식품이었을 뿐입니다 .
그들은 말씀에 의해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 살았습니다.
부자는 살아 있을 때에 말씀을 통해 깨달으며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값싼 것으로 생각하고 내 팽개쳤습니다.
부자와 다섯 형제는 하나같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문제가 덮여 있었을 따름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첫 번째 문제는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극한 가난에 빠진 사람은 대게의 경우 복수심이나 원한을 품고 살기 쉽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자신의 비참한 인생을 두고 하나님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이름의 거지 나사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의 삶을 보면 고난의 연속 이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개의 습성을 보면 지저분합니다.
피를 핥으며(왕상21:1922:38), 상처나 헌 데를 핥으며(눅16:21), 토한 것을 다시 먹는(잠26:11벧후2:22)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개를 경멸하는 뜻으로 비유하고 계시며 특히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로 묘사하고 있다(시22:16). 그리고 미련한 자(잠26:11), 거짓 교사, 타락한자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개들이 끊임없이 나사로에게 달려들어 나사로를 괴롭게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인내와 믿음을 통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삶은 주의 아신 바가 되는 삶입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꿈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가 단지 세상에서 가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삶이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으므로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진정한 부유는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지녔어도 그분의 아신 바가 되지 못한다면 그의 일생의 수고는 헛 달음질에 지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는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부자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나사로는 내세의 소망이 확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내세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만 아브라함의 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평안과 기쁨만을 추구하고 내세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은 부자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현재는 잠깐 지나가지만 내세는 영원합니다.
나사로가 세상에서 살 때에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그가 가진 것이 전혀 없어서 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가난한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세상도 또한 내게 그리 될 때에 진정한 부유를 누리게 된다(갈6:14). 세상에 대해 부유한 삶은 미래가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꽃과 같으며, 이 세상 행적은 속히 지나갑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 즉 시련을 통해 분개감이나 자기 연민이 아닌 믿음을 키운 사람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나사로입니다.
부자는 저 지옥 불에 고통당하지만 그의 다섯 형제는 아직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지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적 쾌락을 쫓아 살며,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기 바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삶을 사는 부자의 다섯 형제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바로 곁에서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며,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사람들,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들의 부자의 형제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죽어 지옥으로 간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기의 다섯 형제를 향해 선지자의 역할을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죽어 지옥으로 가는 영혼을 구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
다섯 형제를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할 선지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으므로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며, 내세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면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여 하나님이 도우시는 오늘의 나사로가 필요합니다.
다섯 형제에게 보내어질 나사로를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그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순종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반응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길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 다섯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