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도 가까이 계셨습니까?(욥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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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2월 5일 주일 성인예배
제목 : 이리도 가까이 계셨습니까?
본문 : 욥기 42장 1-6절 *구803
결단찬양 : 아름답고 놀라운 주 예수
1. 입례송(15초)
영광스러운 주일 아침입니다. 이 시간 우리 다함께 자리에 일어나셔서 언제나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그 주님의 이름을 높여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함께 고백합니다. 날 부르신.
2. 합심기도 견인
예배자로 합당치 못한 우리의 삶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 앞에 예배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주여,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시옵소서.
예배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 담아,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3. 봉헌안내
다함께 자리에 앉으시겠습니다. 함께 찬송하시면서 봉헌하시겠습니다.
4. 봉헌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시간 모든 것이 주님께로 왔음을 고백하며 감사함으로 예물을 올려 드립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만물의 주재이신 주께 있음을, 주의 사랑과 능력이 주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께서 헤아려 주시고, 주의 강하신 손으로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5. 광고
6. 성경봉독
이 시간 우리 함께 말씀 찾아보길 원합니다. 욥기 42장 1절에서 6절, 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함께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리도 가까이 계셨습니까?
욥기 42:1-6
[도입_하나님 베개]
저마다의 습관이란게 참으로 많고 또 다양하지만, 제 어린 시절 유독 기억에 남는 습관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늘 제 잠자리에 베개를 하나 더 두는 것’ 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생하고 같이 잠을 잤던 것도 아닌데, 늘 제 옆에는 베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중앙에 누워 자기보다는 한쪽 켠에 쏠려 잠을 자곤 했는데, 이게 지금까지도 습관이 된 건지 베개가 하나만 있어도 이제는 사이드에 누워 잠을 잡니다.
제 어릴 적 베개를 하나 더 두었던 것은 그 자리가 하나님 자리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그 베개는 ‘하나님 베개’ 였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이야 하나님이 잠을 주무신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베개를 하나 더 두려고 행동하지도 않지만, 당시 나름 순수했던 생각으로는 ‘하나님,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여기서 주무세요.’ 라 생각했고 그래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사이드에 눕는 습관만이 몸에 베었을 뿐, 하나님 베개를 따로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하여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 건 아닙니다. 또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하나님 자리가 부처의 자리로 바뀌어 있다거나, 어떤 교주의 자리로 바뀌어 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또 제가 하나님의 일꾼이고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자녀임을 고백함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도입_본문 속으로]
과거 하나님과 나름의 깊은 교제로 살아가려했던 제가 지금은 그런 감격이 없는 그런 삶. 이런 평이한 신앙 속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저는 ‘어쩌면 지금의 제 모습’은 욥기서 초반 등장하는 욥의 평이한 신앙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라고 설명할 정도의 신앙이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또 부럽기도 합니다. 물론 이 자리 가운데 모인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자로써 끊임없이 싸움을 이어가고 계시겠지만, 욥은 정말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로 속임 없이 살던 말 그대로, ‘코람데오’의 삶을 잘 살아내던 자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고난이 옵니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건강도 잃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로 온전함을 유지했습니다.
누가봐도 딱한 처지에 놓인 욥을 향해 세 친구가 ‘약속’하고 다가옵니다. 어떤 약속이요? ‘위로’하기로 약속이요.
그러나 고난이 유지되는 삶 속에 놓여진 욥은 끝내 자신의 생일을 원망합니다. ‘내가 태어난 날 지구가 멸망했더라면..’ 매우 극단적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에 탄력을 받아 욥의 친구들도 ‘그래, 분명 너가 잘못한 게 있을거야. 너가 하나님 앞에 범한 죄가 없이, 어찌 고난을 받겠어?’, ‘네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다니더니..’
분명 위로하기로 약속했던 이들이 모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욥을 훈계합니다. 비난하고 책망합니다. 비로소 욥에게 진짜 고난이 찾아옵니다. 영적 건강을 잃게 됩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신앙 지키기 게임’ 은 너무나 어려운 게임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고난이 왔을 때, 차라리 세상 사람들처럼 술같은 유흥거리로 해소시키고 ‘그래, 이제부터 잘 해보자.’ 라고 마음 먹는 것이 더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올 때 어떻게 합니까? ‘그래, 이제라도 기도해보자.’ 그러다 잘 안되면, ‘주님, 제 고통에는 전혀 관심도 없으십니까?’ 하소연과 부르짖음에도 바뀌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 실망입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제 저는 제 갈 길 가겠습니다. 신은 없군요.’
그래서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게보면 욥의 고난은, 어쩌면 십분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합니다. 욥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 같아 보입니다. 우리나 욥이나 뻔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욥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보이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욥이 지금의 고난을 극복한 길, 닥쳐온 문제를 해결한 방법을 우리가 걷는다면, 우리 또한 회복의 모습으로, 또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욥이 걸어간 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는 회복과 성숙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욥이 선택한 회복과 성숙의 길 : 끊임없이 하나님과 싸우다]
그가 택한 방법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싸웠다.’ 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늘 욥의 곁에 계셨다는거죠.
가시적으로는 욥의 세 친구들이 곁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가까이서 함께 싸우고 곁을 지키신 건 하나님 아닙니까?
요즘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을 보면, ‘나 혼자 신앙생활’ 할 때 어려움에 빠져 교회를 떠나거나 도망가지 않습니다. 욥에게 친구들이 다가왔고, 그 친구들로 영적 건강을 잃기 시작한 것처럼, 청년들도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떠나는 경우가 대다수 입니다.
도대체 왜 떠나는가? 이들이 어떤 상처를 받았기에 교회를 떠나는가 보니까 이래서 떠난다는 겁니다. ‘교회는 사랑이 있는 곳이라매요. 근데 사랑이 없던걸요?’, ‘교회는 사랑으로 품어주는 곳이라매요? 근데 서로 서열과 계급으로 품어주지 않던데요?’, ‘저한테는 늘, 아빠는 장로님이고 엄마가 권사님인데 너는 그러면 안되지! 라고 말하며 핀잔을 주던걸요?’, ‘너는 지각하면 안되지’, ‘너는 실수하면 안되지.’ ‘교회가 아니라 소속사에 들어온거 같아요. 너밖에 없어, 너밖에 없어 라는 말로 늘 일을 시키던데요?’
이들이 떠나는 이유는 내 자신으로부터 회의감이 들어서 떠나는게 아닙니다. 나를 전도했던 당사자로부터,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친구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으로부터 상처 받고 떠나는 것입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혼자서 고난을 겪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친구들이 내 옆으로 오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이 너무 큰겁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이 너무 아픈거죠. 근데, 여기서 핵심이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는 고통 속에서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라고 고백했고,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그는 끝까지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하나님께서 직접 등판하십니다. 38장 1절을 보니 이렇게 등장하십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등장이 욥에게 있어서는 꽤나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욥이 그만큼 원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두려워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9장 16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그는 간절히 하나님이 대답해 주기를, 음성을 듣고 반응해 주기를 너무나 바랬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폭풍으로 치실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숨통을 옥죄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그런 두려움이 있는 욥 앞에 하필 폭풍우 가운데 등장하시니 얼마나 충격적 이겠습니까? 자신의 두려움이었고, 또 삶이 되버린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등장하시니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두려웠겠냐는 겁니다.
그러나 이 등장으로 이제 욥은 하나님과의 진짜 관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멀리 계신 줄로만 알았던 하나님이, 나의 음성을 듣고는 계신 것인지, 내 고난은 알고는 계실련지 알 길이 없이, 정말 먼 곳에서 방관하시던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리도 가까이 계신줄 이제야 알게 됩니다.
[관계가 회복되니 : 1. 하나님께만 관심을 가지다]
이제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 회복을 통해 욥의 삶이 변화되는데, 먼저 ‘하나님께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는 분명 하나님을 향해 ‘내가 부르짖는다 한들,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 믿지 않는다.’ 고 말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까이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니, ‘주께서는 못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로 탈바꿈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돈독해진다면 그의 일하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 놓여진들 믿고 온전히 의지한다는거죠. 욥이 지금 관계 회복을 하게 되었지만 당장 육신의 질병이 회복 되었습니까? 아니요. 여전히 소유물은 없습니다. 여전히 자녀들은 죽어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질그릇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내는 고통 속에 거합니다. 그런데, 욥은 관계가 회복되니 하나님만을 봅니다. 즉 영적 건강의 회복을 얻게 됩니다.
욥 뿐입니까? 요셉의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말도 안되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핍박과 고난을 받습니다. 팔려가는 것도 부당한데, 오해로 감옥에 갇힙니다.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하나님께만 온전한 관심을 쏟으니 감옥이 거룩한 곳이 됩니다. 2년 이라는 시간 동안 요셉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2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하고 계셨고, 또 모든 세팅을 마치시고 요셉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욥도 이제는 주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관심을 가지며 나아가니 어떤 모습이 욥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까?
[관계가 회복되니 : 2. 진짜 회개가 나오다]
두번째가 바로 ‘회개’하게 된다는 겁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지난 날 자신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오해했던 모든 것들을, 이제 욥은 거두어 들이고자 합니다. 자신의 지난 날 행동이 결코 옳지 않았음을 인지합니다. 그리고 옳지 못한 삶 속에서 그는 회개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맥스 루케이도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죄를 회개하는 일에 있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하지 말라. 넘어지지 않는 척하지 말라. 그대로 다시 시합에 뛰어들려 하지 말라. 먼저 하나님께 가라. 넘어진 후의 첫걸음은 십자가를 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척, 척 하는 삶을 유지하며 그대로 다시 인생의 삶이라는 시험 속으로 뛰어들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였고, 범한 상태로 다시 시합에 뛰어든다면 우린 동일한 문제로 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장애물 달리기 선수가 계속 실수하는 구간에 있어, 자기 스스로 자세에 대한 연구가 없거나 대안 없이 다시 시합에 뛰어든다면, 그 선수는 동일한 구간에 여전히 넘어지게 됩니다. (+ 체대준비때 멀리뛰기 자세 고정)
죄가 그렇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가 없다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절차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나오는 그 절차가 없다면 우리는 또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 똑같은 죄를 범하여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너무나 중요한 삶이 됩니다. 그런데 회개에 대한 우리의 삶이 참으로 낯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주님 앞에 말하는 것이 왜인지 어렵습니다. ‘그래도 주님, 이 부분에서만큼은 이해관계가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물으며 오히려 자기의 모습을 합리화 시키려 하는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목사님께서는 ‘회개'를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과란 실수한 사람의 자기 존중이지, 결코 굴욕이나 패배가 아닙니다. 누구나 실수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실수 그 자체가 아니라 실수 이후의 태도입니다.’
욥이 만약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주님이 뭔데, 제 삶에 고난을 줍니까? 제가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의 적반하장식의 태도로 나왔더라면, 저는 이제 전할 세번째 내용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관계가 회복되니 : 3. 하나님께서 나를 준비시키다]
그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또 회개하고자 엎드려 나오니, 그렇게 관계가 회복되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세번째, 하나님께서 ‘욥을 준비’시켰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 욥에게 갑절의 은혜가 허락됨을 잘 아실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그래서 많이들 오해하는게 뭐냐면, ‘고난의 결과는 물질의 복’ 이라는 생각입니다. ‘갑절의 복을 받을 수 있다면, 고난 까짓거 견디면 되지! 주님 고난을 주세요!’ 라고 말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삶에 고난이 없던 것 아닙니다. 가벼운 고난만 존재한 것도 아니고, 분명 우리의 삶을 찢어지게 하는 고난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보상이 진짜 물질적 보상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 후 갑절의 은혜를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질적 보상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있어 욥을 준비하고자 허락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욥에게 허락한 양 만 사천마리, 낙타 육천마리, 소 천 겨리, 암나귀 천, 아들 일곱과 딸 여미마, 긋시아, 세렌합북 괜히 주신게 아니라는 겁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 일하시고자 준비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시고자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 일하시고자 준비하심이지, 고난의 결과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코로나가 우리 삶을 지배하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찌 안녕들 하셨습니까? 코로나로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 분들이 꽤나 많을겁니다. 어쩌면 형식적인 예배와 자리지킴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저도 만약 제가 목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교회에 남았을까? 생각해보면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한인교회가 코로나때 오히려 교회가 단단해졌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핵심 키워드로 내세운 것이 ‘소그룹’ 이었습니다.
저는 이 보고를 보며 ‘희망이 있다.’ 확신에 차 올랐습니다. ‘우리 교회도 소그룹을 강화해야 합니다.’ 를 말하고 싶은게 아니라, 소그룹은 곧 관계 아닙니까? 관계가 돈독해지고 견고해지니까 교회가 삽니다.
그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견고해진다면? 더 가까워진다면, 늘 가까이 계신 하나님과 이제는 뻔한 관계가 아니라 더 깊어지는 관계가 된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간다면, 주님 앞에 담대히 서 있게 된다면, 우리가 살아나고, 교회가 회복되어 지고, 이 땅과 세계 열방 및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기쁜 일에, 하나님께서 욥을 준비시키심처럼, 오늘날 우리 또한 준비되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어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평생의 사는 동안 주님 앞에 서 있는 우리 되게 하소서
2. 하나님께만 온전한 관심을 두는 우리 되게 하소서
3. 올 한 해, 하나님과 가까워 지는 한 해, 우리 가정 되게 하소서
4. 욥처럼 준비되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우리, 가정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하심이
평생 주님 앞에 서 있겠노라, 주께만 관심 두겠노라 다짐하는 자들과
서로 함께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자 힘쓰기로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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