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두 아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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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교회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께 질문 한 가지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시간에 제가 듬성듬성 사용했던 이 ‘율법주의’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하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아니면 종교개혁 시기에 개혁의 대상이었던 로마 가톨릭이 떠오르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리고 율법주의가 있다면 그 반대말인 ‘반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주의’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를 정리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래, 성경적인 복음과 그 능력을 놓쳐 버리게 만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오해나 오류가 지목되었다. 하나는 ‘율법주의’(legalism)라고 불리는데, 우리의 선함을 매개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빚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는 그분의 축복을 따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율법폐기주의’(antinomianism)로, 그분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각각 ‘율법’을 뜻하는 라틴어와 헬라어에서 나온 단어들인데, 복음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 결정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다.
팀 켈러, 『설교』, 채경락 역 (서울: 두란노, 2016), 70.
이렇게 쉽게 말로써는 정리가 가능하지만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다뤘던 오치터라더 장로회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양 쪽 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를 하는데도 서로를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로 비난하며 결국 한 교단이 분열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는 것 기억나십니까? 하지만 모두 자신이 율법주의자도, 율법폐기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하였고, 18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의 어떤 목회자도 구원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들었고 이 원인에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켜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는 율법주의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 그리고 복음을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면서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순종을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읽은 본문인 누가복음 15장 11-32절은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탕자 이야기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15장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사람이 얼마나 기쁜지를 이야기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비유가 담겨있는 장입니다. 사실 이 탕자 이야기라 불리는 본문의 제목을 보시면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제목을 저는 잃어버린 두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끝날 때 다들 아시게 될 것 같습니다.
이 비유는 앞의 두 비유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은 절을 차지고 있는 비유로 예수님께서 아주 자세하게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 사람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첫째 아들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고 둘째 아들부터 말씀하십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주 충격적인 말을 내뱉습니다.
12절에서 둘째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제가 받을 것을 저에게 주세요.” 둘째 아들의 이 말은 실로 충격적인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는 것은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소위 말하는 시퍼렇게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을 재산을 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인 즉슨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죽길 바란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 둘째 아들의 아버지가 죽길 바란다는 것과 같은 말은 패륜적인 말과 같습니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아버지에게 말한 것도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 말을 했습니다. 저 같았으면 정말 얘가 내 아들이 맞냐고 하면서 호적에서 파버릴까 라는 마음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재산을 순순히 줍니다. 그것도 첫째 아들에게도 줘야할 재산까지 말입니다. 이 당시에 둘째 아들이 받을 유산은 첫째 아들이 받을 재산의 절반이었습니다. 따라서 첫째 아들은 재산의 2/3를, 둘째 아들은 1/3을 아버지가 나눠줍니다. 이 아버지는 정말 마음이 넓고 관대한 아버지인 것 같습니다.
13절에서 이렇게 자기의 원대로 아버지의 재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떠나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신나게 씁니다. 이 둘째 아들은 이러한 삶을 꿈꿨나 봅니다. 그러다가 14절에서 둘째 아들은 일은 하지 않고 돈만 쓰니까 당연히 돈을 다 써버리게 되고 탕진하게 됩니다. 빈털터리가 된 것이죠.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그에게 빈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는 15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빌붙어 살게 되었고 들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비참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가 치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케럽나무라고도 하고 구주콩나무라고 하는 콩과 나무, 당 함류가 높고 초콜릿과 비슷한 맛이 나 현재는 초콜릿 대용으로 또는 음료나 시럽을 만드는 데 쓴다고 한다.)를 먹고 싶어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어떤 동물입니까? 바로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동물입니다. 율법에서는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동물을 부정하다고 하기 때문에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돼지는 부정합니다.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언약에서 이탈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레 11:7; 사 65:4, 66:17). 따라서 이 둘째 아들이 간 먼 나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둘째 아들이 돼지를 치는 일을 한다는 것과 돼지가 먹는 사료를 먹고 싶어한다는 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둘째 아들이 아주 불명예스럽고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비참한 것은 먹고 싶어하는 그 돼지 사료를 아무도 안 줬다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있을 때는 부족함 없이 잘 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받게 되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돈을 펑펑 쓰며 정말 신나게 지냈겠죠. 하지만 이제는 불명예스럽고 비참한 상황 속에 있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둘째 아들은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품꾼이 떠오른 것입니다. 1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있는지를 깨닫게 됨과 동시에 아버지가 고용한 품꾼들이 지금 자신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할 지에 대해 18-19절에서 계획을 세웁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가치가 없습니다. 저를 품꾼 중 하나로 삼아주세요.’라고 하고” 이렇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할 말을 생각해두고 20절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오고 있는 것을 아버지가 발견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이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저 같으면 “에이 쯧쯧쯧, 내가 저럴 줄 알았다. 봐봐. 내가 죽길 바라면서까지 유산을 달라고 하더니 결국 저런 꼴로 돌아왔구만?”이라고 반응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다르셨습니다.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아주 목빠지게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언제 돌아오나 하면서 아들이 떠나간 방향을 계속 바라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아들인 것을 알아보고는 달려가십니다. 이 당시 아버지가 뛴다는 것은 아주 품위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이 아들이 돌아온 모습을 발견하고는 뛰어갑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둘째 아들에게 한 아버지의 행동은 친근함을 뜻합니다. 이 둘째 아들이 돌아온게 너무 반가운 것이죠.
자신을 반기는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은 자기가 준비했던 말을 21절에서 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가치가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때 자기가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과 행동을 취하십니다.
22절에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서 입혀라, 그리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라.” 이 아버지의 말씀은 아주 파격적이었습니다. 이 당시 반지에는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었을 것인데, 반지를 낀 사람은 가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품꾼이 되어 아버지의 종이 되려고 했던 이 아들을 아버지는 다시 자신의 아들로 받아주신 겁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빈털터리로 돌아오니 신발을 신겨주심으로써 둘째 아들을 극도로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로부터 온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23절에 살진 송아지를 잡고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기 위한 파티를 여십니다. 이렇게 파티를 여신 이유를 24절에서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그 아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 가운데에 있다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을 아버지는 기뻐하셨습니다.
이 둘째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율법폐기주의자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과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뒤에 첫째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보게 되겠지만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은 원했어도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의 말씀은 지키기 싫고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죽길 바란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유산을 달라는 말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은 원했지만 아버지를 원하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자기가 진짜 원하는 아버지의 재산은 안 주시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원하는 악한 입법관으로서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바로 하와처럼 사랑 많으시고 인자하신 아버지의 성품과 아버지가 주시는 혜택들을 분리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성품을 왜곡시키고 아버지의 재산을 받기 위해서는 순종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폐기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왜곡시키면서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좋은 것들을 가지고는 싶지만 아버지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즐거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율법폐기주의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진짜 모습은 어떻습니까? 패륜적인 말과 행동을 저지른 아들임에도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고 그가 돌아오자 돌아온 것만으로도 너무 반가워서 달려가 껴안고 입맞추며 그를 종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아들로 받아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이 아들에 대한 기쁨을 혼자만 만끽하고 있을 수 없어 파티를 열어 여러 사람과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의 은혜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첫째 아들,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열심히 순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5절에 “밭에 있다가 돌아와”라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온 시점에 맏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밭에서 돌아왔을 때, 파티는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맏아들은 악기들을 연주하는 소리와 흥에 겨워 춤추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26절에 아버지의 종을 불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경위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27절에서 종은 맏아들의 질문에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여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종의 대답을 통해 두 번째로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 설명해줍니다. 다시 말해 24절에서 말했던 아버지가 기뻐하는 이유를 다시금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 여기까지 우리가 맏아들의 입장에서 종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니 아버지를 따라 기뻐했을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반응을 했을까요? 이 맏아들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맏아들은 종에게서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뻐하고 잔치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맏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에게 같이 참여하고 즐기자고 권유하십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이내 자신이 왜 이렇게 분노하고 잔치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지 아버지에게 29-30절에서 이유를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맏아들의 관심은 아버지와 동생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자기는 아버지의 명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고 심지어 종과 같이 열심히 일했음에도 아버지는 자신에게 송아지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염소 새끼라도 나에게 주어 나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게 하신적이 없다며 불평합니다(염소 새끼와 살진 송아지를 오늘날 우리의 음식 문화로 표현한다면, 맥도날드에서 파는 햄버거와 고급 한정식의 코스 요리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대럴 벅, 『BECNT: 누가복음2』, 신지철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538. 그 분노가 얼마나 심했는지 둘째 아들이 자신의 동생임에도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아버지와는 연관이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과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맏아들은 겉보기에는 동생에게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의 호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패륜적인 말과 행동을 하였고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해버리고 돌아온 천인공노할 자식인데 이 패륜아가 진짜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행위를 통해 판별한 다음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신 이 아버지의 은혜와 호의가 이해가 되지도 않고 화도 나고 너무나 싫었던겁니다. 또한 이미 나누어준 재산을 다 써버리고 다시 아들로 받아줬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 한번 재산을 또 나누어 주어 자기가 받을 몫이 더 적어지는 것은 아닌가 라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맏아들의 마음은 이런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고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아야 할 호의를 저 천박한 놈에게 어떻게 아버지는 호의를 베푸시는건가? 오히려 그를 잘 대해주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끊어야 하는게 아닌가? 아버지는 자신의 신실함보다 저 자의 부도덕한 행실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는건가? 그리고 재산을 다시 또 나눠줘야 하는건 아닌가?”
이렇게 자신에게 불평과 불만을 쏟고 있는,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오히려 자신의 호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이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따뜻한 말로 “얘야”라고 부르시면서 31절에서 대답하십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나의 것이 다 너의 것이란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염소 새끼라도 잡아주는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맏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같이 있으니 나의 것은 다 너의 것이란다.”라고 대답하십니다. 29절에서 맏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신 적이 없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너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 그 자체, 그 자체만으로도 맏아들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맏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해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짐승이 바로 자기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찾았기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단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맏아들에게 “너의 동생”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둘째 아들에게 왜 은혜를 베풀었는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이 맏아들의 마음이 바로 율법주의자의 마음입니다. 맏아들은 동생의 행위도 탐탁치 않았지만 거저 주시는 아버지의 은혜가 굉장히 거슬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은혜를 받을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아버지의 은혜를 받기에 자신의 동생의 모습은 부족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통해 율법주의자와 율법폐기주의자의 마음과 그 마음으로 비롯된 모습을 살펴보면서 문제점도 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둘의 마음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는 때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은혜에 치우쳐져 있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순종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거나 사람들이 너무 순종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정죄의 모습이 나타나고 분위기가 형성되면 은혜를 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어느 때는 율법폐기주의자가 됩니다. 이 마음은 목회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지만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은 모습이 보이면 목회자는 소위 기강 한번 잡아야겠다며 행위를 고치라는 혼내는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성도들이 말씀대로 사는 모습이 많이 나아진 거처럼 보이지만 서로 왜 말씀대로 살지 않냐면서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이 보이면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 두 설교의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진정한 치료제가 아닙니다. 사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두고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님은 같은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바로 이 둘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분리시켜 버렸을 때 나타나는 같은 현상들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한 것(율법폐기주의)은 사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시각(율법주의)의 열매였습니다.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109-10. 바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신에게서 뭐든 받아내려면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순종만을 원하는데 그분이 가지고 계신 혜택은 받고 싶고 누리고 싶어 그분의 명령을 기뻐하지 않으면서 순종하던지(율법주의), 아니면 순종하고 싶지 않아서 순종하지 않는(율법폐기주의) 모습이 나타나는겁니다. 아버지에게는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맏아들도 잃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치료제는 무엇일까요? 이 율법폐기주의자인 둘째 아들과 율법주의자인 맏아들을 다시 돌려놓을 치료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둘째 아들이 원하는 대로 품꾼으로 삼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일을 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얼마나 좋으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인지를 아버지가 하신 일을 통해 경험하게 하며 둘째 아들 마음 속에 이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어 이 아버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이 아버지의 말씀과 명령까지도 사랑하게 되어 기꺼이 순종하게 되는 것이 바로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가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받을 호의를 천박한 동생에게 베푼 것에 대해 분노한 맏아들에게도 아버지의 사랑이 치료제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아버지의 호의에 대한 분노와 그가 아버지의 것을 얻어내려고 했던 그 노력이 이제는 이미 누리고 있고 앞으로도 누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로 바뀌어 기쁨과 즐거움의 순종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치료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앞으로 율법주의자와 율법폐기주의자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지식을 넘어 우리에게 언제든지 나타나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주에 이야기했던 것을 이어나가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오치터라더 장로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오치터라더 장로회가 만든 신조를 옹호한 사람들과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 이 오치터라도 장로회의 신조를 옹호하는 사람들(매로우맨)과 이 신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총회파)이 나뉘어 매로우맨들 중 어스킨이라고 하는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 형제들이 중심이 된 분리파 교회는 이후에도 또 분리하게 됩니다. 이렇게 분리하게 된 중심 사건에는 조지 휫필드라는 영국에서 유명한 설교자와 분리교회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휫필드와 어스킨 형제는 복음에 대한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리교회는 휫필드의 순회 사역과 그와 연관된 부흥을 처음에는 환영하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교회론 때문에 분리하게 됩니다. 아래는 어스킨 형제와 휫필드가 나누었던 편지입니다.
“친애는 휫필드씨. 오십시오. 가능하면 오십시오. 제가 다른 누구의 얼굴을 이보다 더 간절히 보고 싶어 할는지요. 오시기는 하되 우리 주님의 나라와 또 개혁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서 크게 진전되도록 하는 그런 방식으로써만 오셔야 할 것입니다. 상황이 ....... 이러한지라, 우리 ‘연합 장로회’를 만나 함께하실 생각으로 오시지 않는다면 ...... 귀하의 방문이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똑같이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느 편으로 가시든, 귀하의 명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틀림없이 저들은 귀하를 자기들 쪽으로 모시려고 할 터인데, 그리하여 만약 저들의 설교단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 경우 그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이용될지 안 봐도 뻔합니다.”
이에 휫필드의 답장은 이랬습니다.
“그 말씀에 저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임시 설교자로 그곳에 가는 것뿐이며, 어느 교파에 속했든 제 설교를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단순한 복음을 설교할 것입니다. 위에서 제게 비춰 주신 빛을 벗어나, 교회 정치에 관한 어떤 개혁 작업에 동참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적절치 않은 행동일 것입니다. ..... 제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우리 사이에 조금의 오해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연합 장로회’를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 그러나 제가 그분들과 즉시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불쾌해하시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고, 그들은 결별하게 됩니다. 결별에 관한 마지막 휫필드의 말입니다.
“그랬더니 ‘당신이 엄숙 동맹에 즉시 가입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이 뭔가를 더 깨닫게 될 때까지 우리 편(연합 장로회)에서만 설교해 달라’고 하더군요. 저(휫필드)는 왜 당신들 편에서만 설교를 해야 하느냐고 물었지요. 랠프 어스킨씨가 대답하기를, “저들은 주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에 당신들 말고는 주님의 백성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다 마귀의 백성들이라면, 그럴수록 더 설교를 들어야 할 것이며, 그래서 나는 길과 산울로 가로 나가려는 마음이 더욱 굳어진다고 했습니다. 교황이 친히 자기 설교단을 빌려준다면 그 설교단에 서서라도 기쁘게 그리스도의 의를 선포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 이 모든 일의 결국은 공개적 결별이었습니다. 저는 홀로 물러나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설교한 뒤 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는 작별을 고했습니다.”
매로우맨들은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의 마음도 ‘율법주의’ 마음으로 기울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언제나 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주의 마음으로 기울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마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등장했던 맏아들은 율법주의자인 맏아들이었지만 이 율법주의적인 맏아들이 아닌 우리에게는 진정한 맏아들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맏아들은 자신이 동생이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품에서 떠나가는 것은 죽는 것이기에 만류하거나 동생을 찾으러 가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과 같이 죽음 속에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하나님의 독자로 오셨지만 승천하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맏아들이 되어 올라가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묵상하며 우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동생들로 삼아주시고 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 아버지의 명령도 사랑하게 되어 아버지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 좋고 즐거워 진정한 순종을 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