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 : 빛 좋은 개살구(행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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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제목 : 공허함 : 빛 좋은 개살구
본문 : 사도행전 13장 4-12절 *신209
결단찬양 :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도입_채워지지 않는 만족함
제 주변에 문신을 정말 즐겨하시는 분이 계신데,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문신을 할 예정이냐?’ 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분께서 대답하시길, ‘빈 공간이 보이면 참을 수가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럼 이 팔은 다 채웠으니, 끝인거냐?’ 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분께서 대답하시길, ‘예전에 했던 그림 중 맘에 들지 않아 지우고 새로운 걸 채우려고 한다.’ 라고 말입니다.
‘지우고 그리고’ 를 반복하다보면 끝없는 레이싱일 것 같아 이해는 안 되지만, 여하튼 그 분은 여전히 새로운 그림들을 추가해 나가고 계십니다.
저는 이미 완성형 얼굴을 가졌기에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지만, 성형 중독에 빠진 분들도 앞서 말씀 드린 분과 같은 심리를 지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 두 곳 정도 고치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하다보니 다른 곳이 눈에 띄고 또 그곳에 손을 대니 보이지 않았던 곳이 보이기 시작해서 끝없는 레이싱을 달리는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문신이든 성형이든 ‘한 두개 정도는’ 으로 시작했지만, 이것이 시간이 지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의 마음으로 바뀌었고, 결국 어느 것 하나 만족하지 못한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서 여전히 고쳐나가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게 교회에서도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교역자들이 함께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님들이 기뻐하실까? 행복해 하실까?’
이런 고민이 있었기에 작년 한 해, 너무 재미있었고 아름다웠고 즐거웠습니다. 또 행복해 하시는 성도님들의 자그마한 미소와 표현을 보며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제게 마냥 ‘만족’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저 역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좋았을 텐데.’ 의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 한켠에, ‘어떻게 해야 100% 채울 수 있을까, 100%를 채우면 과연 만족해 할까?’ 라는 질문과 의문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100%를 채운다해도 마냥 만족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점심에 호화스러운 식당에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배터지게 먹어도 저녁 되면 배가 고파서 집 냉장고 문을 열어 김치에 밥을 먹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또 먹고 싶은 음식을 이것, 저것 시켜 먹어서 배가 불러 만족할 줄 알았는데, 더이상 못먹을 만큼 배를 채우면 늘 드는 생각이, ‘아~ 아까 그만 먹을껄..’
그러니 100%를 채운다해서 또 반드시 만족할 수 있다는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음 한켠에 있던 질문 중, ‘100%를 채우면 만족할까?’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만, ’어떻게 해야 100%를 채울까?’ 에 대한 질문의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의 공허함을 이대로 두기에는 너무 무방비 상태이고, 또 나태한 것 같아 보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나의 공허함을, 우리의 공허함을 만족시킬만큼 채워갈 수 있을까?’
도입_세상은 공허함을 어떻게 채우려 하는가?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공허함’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잘 나가는 지식인들은 어떻게 말하고, 나름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나 타종교인들은 어떻게 이 공허함을 해결하고자 하는가를 찾아보았습니다.
이들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는 것’ 으로부터 공허함을 채운다 말하였고, 또 누군가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뚜렷한 목적’ 을 찾을 때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 말하고, 또 누군가는 ‘나를 내려 놓을 때 비로소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 고 말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소견과 주장들을 내세우는데, 저는 이 대답들을 들으며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너무 두루뭉술한 대답이다. 그리고 둘째, 이들도 확신에 차있지 않다.
세상이 말하는 공허함을 채우는 방법에는 결코 신빙성도 없고 효과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답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았고, 이 방법을 오늘 함께 말씀을 통해 나누고 결단하며 나아가고자 합니다.
본문_헛것으로 초대하는 엘루마, 헛것으로 초대 당하는 우리
먼저 오늘 본문의 상황은 ‘바나바’와 ‘사울’이 전도여행 중 겪은 내용입니다. 이들이 구브로의 살라미에 이르러, 바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마술사의 이름은 ‘바예수’ 그리고 그의 활동명은 ‘엘루마’ 입니다. 엘루마라는 이름의 뜻은 ‘점을 치는 자’, ‘마술사, 마법사’ 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누가 들어도 허황된 자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에도 많은 이들이 ‘오늘의 운세’ 라던가,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보면, 이 당시에는 더 획기적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루마의 본명인 바예수는 조금 뜻이 다릅니다. 본 이름의 뜻은 ‘여호수아의 아들’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구원자’ 라는 뜻이며, 이는 헬라 단어로 ‘예수’ 라는 해석이 됩니다. 그러니 바예수 라는 이름의 뜻은 보기보다 너무 좋은 단어입니다.
그런 그가 활동하던 무대는 어느 지방 아무도 모르는 구석에 있는 점집도 아니었고, 총독의 측근으로 꽤나 메인 되는 곳에서 활동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진 ‘거짓의 혀’를 활용해 총독 서기오 바울을 현혹시킵니다. 자신이 전하는 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총독은 기록된 것처럼 지혜로운 자였고, 엘루마의 지식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이 공허함을 결국 채우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본문 7절에 기록된 것처럼 마침 전도여행 중이던 ‘사울’과 ‘바나바’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해달라 요청합니다. 어떤 이야기도 자신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기에, 아마 그의 마음밭은 ‘그래, 너도 한 번 너가 주장하는 그 예수라는 작자의 이야기를 해봐. 내가 들어나 보자.’ 의 심리였을 것입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의 모습을 보며 결코 남 일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 삶의 공허함이 느껴집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공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3년 전 보고 자료에 의하면 무려 67%가 공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상대적인 기록이겠지만, 그래도 꽤나 많은 퍼센트가 공허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이들이 공허함을 느낄까 하고 이유를 보니,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공허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허함을 채우고자 ‘직장 생활’을 합니다. 직장 생활을 통해 경제적 활동을 하니, 수입이 있어 공허함의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았는데, 다른 이들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또 다른 공허함에 빠진다는 겁니다.
마치 공허함이라는 항목의 뫼비우스 띠에 갇힌 것 마냥, 희망없는 돌림만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상대적 박탈감’ 에는 단순 ‘쟤가 나보다 잘나가네?’ 정도가 아닙니다. ‘나는 어려운데 쟤들은 행복하네? 나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구나.’ 좌절하게 된답니다.
누가봐도 20대 청년들로부터 나오는 생각같아 보이는데, 1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평이한 그래프를 보이며, 모두가 같은 고민 속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10대에 했던 고민이 20대에 와서도 해결되지 않고, 20대의 고민이 30대까지, 40대까지 계속 이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고민 속에 빠져 좌절과 우울과 불신에 빠져 해결되지 않는 문제 속에 갇혀 사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 짠하고 안타깝습니다.
결코 남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잠시잠깐 방심하면 넘어지고 공허함에 빠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허함 속으로 초대합니다. 너무나 화려한 세상 속으로.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는 현혹된 세상으로. 보기에 좋고 탐스러워 보이는 선악과를 잔뜩 깔아둔 밥상 앞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압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되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 하나 없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말입니다.
본문_진짜로 초대하는 바나바와 사울, 진짜로 초대 당하는 우리
그래서 사울과 바나바는 현혹되는 갈림길 속에 놓여진 우리와 같은 자들을 향해, 어떻게 해야 공허함을 해결할 수 있는지 전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사단은 갈급함이 있는 자들에게 진리가 들어가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단이 엘루마를 통해 어떻게 행동합니까? 8절입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진짜가 등장하자 거짓이 불안해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둔 허황된 세상이 곧 무너질 것이 보이니 두려움 가운데 빠집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진짜 진리’ 가 전해지지 않도록 훼방합니다.
하지만, 그게 됩니까? 가짜는 결코 진짜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 그 어떤 것도 ‘진리’ 를 넘어트릴 수 없고,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총독에게 심기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껏 총독에게 진리라 속여 가르친 거짓 선지자 엘루마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까? 11절을 보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어둠 가운데 헤메는 존재가 됩니다.
이 장면을 누가 목격합니다. 총독이 목격 합니다. 지금껏 진리라고 들어왔던 것이 거짓이었음을. 자신에게 구원자라고 다가왔던 엘루마가 어둠 가운데 갇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총독은 보았습니다. 지금껏 진리라 믿었던 것이 가짜였음을. 그리고 이제 총독은 보았습니다. 진짜 진리를.
그리고 총독의 삶은 변화됩니다. 단순 지적 호기심에 불과했던 ‘하나님의 말씀’ 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향한 경외’로 나아가게 됩니다.
본문_진리가 우리를 채울 때 : 1. 진짜를 ‘보게’ 된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세상 어떤 것도 채우지 못한 우리의 공허함을 ‘진리’가 채울 때 우리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먼저, 진짜를 ‘보게’ 됩니다.
거짓을 따르고 주장하고 가르쳤던 거짓 선지자 엘루마는 어둠 속에 갇히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진짜를 마음 가운데 채우게 된 총독은 어떻게 됩니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진짜와 거짓을 구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진짜가 중요한건 당연한거지. 뭘 그리 호들갑을 떨어.’ 정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진짜와 거짓을 구별하는 것은, 여러분,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뒤덮인, 거짓 투성이인 이 삶 속에서 우리가 진짜를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죽게 됩니다.
2000여년 전 이 세상에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렸고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이들은 많은 이들을 향해, ‘나를 믿으면 너가 행복해질거야. 내가 말해주는대로만 살면 너는 성공할꺼야.’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그 손길을 붙잡고 다같이 넘어졌습니다. ‘그래, 나도 이제 인생역전 해야지. 나도 이제 부유한 삶 살아보는거야.’
그렇게 거짓의 손을 잡게 될 때, 먼저는 헤어나올 수 없는 ‘욕망’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빠져 허황된 목표를 향해 발버둥 칠 때, 이들은 ‘무지’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진짜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무지함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진짜와 거짓을 보는 것,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를 가능케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진짜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본문_진리가 우리를 채울 때 : 2. 진짜를 ‘믿게’ 된다.
진리로 우리를 채워 진짜를 보게 된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 진짜를 ‘믿게’ 됩니다.
12절을 보니, 총독은 먼저 보았고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삶의 놀라운 변화의 발걸음을 걸어가게 됩니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왠지 모를 아름다움에 감싸여진 돌들을 보면 ‘비쌀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 비쌀리는 없습니다.
예전 방송 프로그램 중 의뢰자가 물건을 가지고 나오면, 그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또 얼마짜리 물건인지 구별해주는 방송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결과로 값비싼 진짜라 판정될 때, 의뢰자는 너무나 행복해 합니다. 왜요? 왜냐하면 진짜라는 결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총독이 진짜를 보았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들었고, 이제는 그것을 믿게 됩니다.
이영표 선수가 간증한 내용 중 일부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축구계에서도 그렇고 꽤나 유명한 전도꾼입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과 선수들에게 예수를 전하기 때문에, 농담으로 안정환 선수가 ‘나는 이영표랑 말을 섞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만날 때마다 전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어느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가 있을 수 있겠다. 그게 귀신일꺼고 이에 대한 확신은 50%에 불과하다. 동일한 개념에서 하나님도 내가 50%는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를 확인하려고 성경책을 읽었는데, 하나님을 그냥 믿으라 말하는데, 이게 믿어지겠는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근데 이 말을 내가 무시할 수는 없겠더라. 나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지만, 인류가 기독교를 인정하더라. B.C와 A.D의 기준점을 예수로 나누더라. 또 일주일을 6일로 할 수 있었고, 8일로 할 수 있었을텐데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따라 7일로 정했더라. 나는 인정할 수 없지만, 인류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있더라.’
그러면서 이영표 선수가 성경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그 결과 진짜 진리를 보았고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진짜를 보면 그렇습니다. 무시하고 넘길 수가 없습니다. 진짜가 다가오는데 이를 어찌 우리가 지나치겠습니까? 하나님의 강력한 이끄심이 있는데, 하나님의 완전하신 부르심이 있는데, 이를 어찌 우리가 감히 지나치겠습니까? 절대요. 우리는 이를 지나칠래야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보는 순간 우리는 믿게 될 것입니다.
본문_진리가 우리를 채울 때 : 3. 진짜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진리를 믿게 되니, 세번째, 우리는 ‘진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이후의 우리 삶이 바뀌게 됩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진짜를 맞이하자 놀랍니다. 지금껏 자기가 들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에 놀랍니다. 말씀은 그렇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를 보고 믿어 삶이 바뀐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장 총독에게 복음을 전한 사울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에게 성령이 임하자 이름이 바뀌어 버립니다. 9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구하였다’ 라는 뜻의 사울로 지금까지 살았지만, 성령이 임하자 그의 이름은 ‘작다’ 라는 뜻을 가진 바울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 앞에 지극히 낮고 작은 자로써의 삶을 살아내는 바울로 삶이 변화됩니다.
이영표 선수도 그랬습니다. 진짜를 보고 믿으니 이전의 삶이 진짜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새 삶을 살아냅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자의 삶으로. 삶의 주권이 내가 아닌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거부하는 자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짜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진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삶을 살아낼 생각도 못합니다. 늘 아쉽고 부족함 속에서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공허함을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 복음이 우리를 채울 때 우리는 만족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고, 진짜를 보게 되고, 진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바라옵기로는 세상의 헛된 것들로부터 우리를 채울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족시키고자 헛걸음 할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붙잡고 우리의 마음밭을 채워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기도제목]
1) 세상 헛된 것이 아닌 진짜 진리로 우리를 채우는 한 해 되게 하소서
2) 진짜 진리 붙잡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3) 다음세대를 위해서
4) 이번주 있을 어린이부 겨울성경학교와 청년부 겨울수련회를 위해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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