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0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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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46차 하임캠프에 오신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저번 12월부터 학원선교부에 함께하게 된 맹주현 전도사입니다.
이렇게 소개했으니까 우리 한번 서로를 향해서도 인사를 해볼까요? 함께 만나서 반가워!~ 이렇게 인사해볼게요.
네. 우리 각자의 시간을 사용해서 이자리에 함께 나온 모든 친구들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사흘간 캠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친구들에게 크신 은혜를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누어야 할 텐데요, 혹시 이번 캠프의 주제가 뭔지 아시는 분 있나요?
네 맞습니다. 바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입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요한복음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사역들을 함께 보게 될 텐데요,
그래서 제가 이 시간에 준비한 말씀도 바로 요한복음, 그중에서도 가장 첫 부분의 말씀을 준비해봤어요.
1장 14절의 말씀 한구절인데, 우리 다함께 읽어보고 말씀 시작해 볼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네. 우리가 읽은 이 요한복음의 말씀, 그러니까 1장의 말씀은 다른 복음서들, 마태,마가,누가와는 다른 형식의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처음 요한복음을 읽게 되면 이게 무슨소린가 하면서 읽게 되는 경우들이 있었을거에요.
이 1장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이 목표로 하고 있는 독자들은 바로 이방 헬라문화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장의 내용은 다분히 헬라철학적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철학을 담고 있는지 아시겠나요? 바로 플라톤 철학을 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있어요.
자, 우리 잠시동안 철학 이야기를 해볼까요? 플라톤 철학 하면 떠오르는 그리스어가 있죠. 바로 이데아입니다. 플라톤에게 이 이데아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는 분리되어있는 형이상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든 진정한 것, 진리들은 그곳에 있고, 우리 현실세계에 있는 것들은 모두 그것에 비추어진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있는 이 마이크도 이데아에 있는 마이크라는 진정한 것을 비추고 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라는 것이죠.
이것을 바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원론적 세계관을 여기 1장에서 사용하고 있는거에요. 1절을 한번 볼까요? 뭐라고 말하고 있죠?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씀은 흔히 그리스어 ‘로고스’로 이야기합니다. 이 로고스 단어는 말 그대로 말씀, 말 이렇게 쓰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어떤 진리를 이야기할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오늘 본문 14장에서 뭐라고 해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는거에요. 그렇죠 여기서 로고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형이하의 세계, 아래의 세계인 우리 이땅가운데 오셨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원래 형이하의 세계인 이곳에서 진리를 절대로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진리이신 로고스 그 자체가 형이하의 세계로 오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를 통해 형이상의 세계, 본질의 세계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우리가 그의 영광, 로고스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에요.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오 그러면 플라톤 철학이 진짜 진리의 철학인 거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것은 그저 사도요한이 그가 목표로 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세계관을 가지고서 복음을 설명한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플라톤 철학을 이용하여 복음을 설명한 것 뿐이라는 거죠. 아마 만약 사도요한이 우리나라로 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면, 동양철학을 가지고서 복음을 설명했을 거에요.
자. 그러면 우리가 헬라인들은 아니니까, 다시 한번 이 말씀이 이야기하고 있는 본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아야겠죠?
앞서 우리가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형이상의 이데아, 형이하의 현상의 세계를 이야기했어요. 플라톤을 비롯한 당시 헬라 사람들은 이 형이상의 본질을 진리라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형이하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우리는 그것에 비춰진 그림자만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진리의 모방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이 이야기이죠.
사도요한이 이야기한 것도 지금 우리가 마찬가지의 상황에 있었다라는 거에요.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절대로 진리이신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형이하에 있으니까 당연히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실 원래 우리는 이 세계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었어요.
이 모든 세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한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본따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통해서, 또한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신학용어로 이것을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이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곧 가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원죄라는 것 때문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하면서 그 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가리워지게 된 것이에요.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죄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게 되었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하나님께 닿을 수 없게 된 것이죠. 마치 형이하의 세계로는 형이상의 이데아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우리는 죄속에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어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실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도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어요. 그가 지으신 백성들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죠. 그렇기에 위에서 아래로 진리이신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보내신 거에요.
그런데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그 사실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 그런가보다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만약 당시 헬라인들이 이 요한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면 엄청난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왜냐하면 플라톤 철학에서는 뭐라고 했어요. 형이상의 세계를 형이하에서는 그 진리 자체로 볼 수가 없다라는 거에요. 이 세계에서는 거짓의 그림자만이 넘친다는 것이죠.
하지만 진리 자체가, 형이하의 불완전한 육체를 입고 이 세계로 왔다라는 거에요. 이것은 헬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하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나셨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부족함이 전혀 없는 신이 부족함이 많은 인간의 육체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낮아지는 사건이라는 것이죠.
굳이 비유를 하자면, 혹시 친구들 토르 1편을 보셨나요? 거기 보면 토르가 아버지 오딘에게 대항하다가 토르의 힘을 잃고 묠니르를 잃은 채 인간 세계에 떨어집니다. 그가 다시 묠니르를 잡고 그의 자격을 증명할 때까지 그는 모든 힘을 잃게 됩니다.
당시 토르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절망의 상황이었고, 그래서 방황하는 모습들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힘을 찾고 다시 신으로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찌보면 그 토르보다도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가셔야 했어요. 토르는 방황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얻으며 살아갔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에서 인간의 자리로 엄청나게 낮아지셨음에도 거기에 더해 인간세상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하십니다. 고난 뿐만이 아니라 조롱과 멸시까지 당하시고 끝내는 죽음의 고통까지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모든 것들을 행해야 함을 아셨음에도 오로지 우리를 위해 그 모든 일들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에서도 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번 캠프를 통해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이 어떤 것인지, 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함께 살펴보게 될 거에요.
우리 모든 친구들이 이 캠프를 통해 그 아름다우신 사랑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한가지 말씀을 우리 친구들에게 전하고 마무리를 하도록 할게요.
우리가 이 한구절의 말씀을 보면서 플라톤 철학도 보고 여러가지로 살펴보았는데요, 결국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은혜라는 단어가 뭔가요? 그냥 주는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주는 것이 은혜에요.
어때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모진 고난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 그것에 마땅한 무엇인가를 기대하셨을까요? 아니죠. 그것에 합당한 무엇인가를 우리는 절대 드릴 수도, 할 수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거에요.
우리가 해야할 것은 그저 감사하며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이것을 이번 캠프동안 잘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혹여나 우리 친구들 중에 이번 캠프동안 내가 하나님 만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거야! 어떻게든 내가 하나님 만날거야! 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전에 우리 준비팀 분들한테는 나눴었지만, 저도 어릴 때에는 그러한 생각이 있었어요.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것이죠.
제게는 그것이 기도회때 흘리는 눈물이었어요.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제게 오시지 않은 것이고, 나오면 오신 것이었죠.
그래서 항상 수련회때마다 눈물을 흘리기 위해 오만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들이 제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앞에서 말했듯이, 합당한 정성을 보고 오고 안오고를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눈물을 뭐 그래도 다섯 방울은 흘려야지 그래 그정도면 됐다 이렇게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그 때 함께하시고,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함께하시고, 심지어는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함께하세요. 그냥 매시간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거에요.
우리 친구들이 이 자리로 오는 것, 손을 들어 캠프에 등록을 누른 것도 물론 쉽게 한 친구들도 있고, 정말 어렵게 한 친구들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이 자리로 모일 수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 우리 이 캠프에 모인 모든 친구들이, ‘아 왜 하나님 나를 안 만나주시는거야?’라고 생각하지 말고, ‘저를 이 자리로 인도하신 주님, 지금 이시간 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저와 함께해주세요’라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번 캠프동안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언제나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우리 모두 함께 깊이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시간에도, 캠프가 끝난 그 시기에도, 그 이후의 우리 삶에서도 함께하실 주님을 온전히 만나고 교제하는 우리모든 친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