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대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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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대하는 태도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함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저는 이 시의 담쟁이 같은 존재가 바로 제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하나로 보면 참 보잘것없고, 연약한 존재지만 함께할 때 커다란 벽도 넘는 존재가 바로 제자들입니다.
지난주 우리가 성경공부할 때 존스토트의 책, 제자도의 마지막 주제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조차도 제자들을 막지 못했기에 기독교는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터튤리안이라는 초대 기독교 목사는 교회라는 나무는 세가지 액체, 즉 땀과 눈물과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묵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받을 박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은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소개한 후 제자들이 가야할 길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다면 그에 대한 반응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 바로 고난과 박해의 길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신앙에 대한 박해나 죽음은 굉장히 생소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 신앙생활한다고 어떤 물리적 박해나 핍박을 받는 일이 거의 없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고난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제자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본론]
첫째, 고난은 제자의 숙명입니다.
16절입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은 공격능력도 없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도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보니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은 참 위험하고 무모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아시지만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낼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존재 이유이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양들이 이리 떼에게 전혀 공격을 받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양이 양이 아니거나, 이리 떼에게 양이 가지 않았거나 둘중 하나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아직 제자가 아니던지 아니면 우리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던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제자에게는 숙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을 고난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7-18절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을 싫어하고 미워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법정, 회당, 총독이나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것은 공개적으로 박해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비유하자면 학교나 회사에서 신앙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여기에 속할 수 있습니다.
제가 취업 면접을 볼때도 기독교인으로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사 면접에서 탈락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렇게 밖에서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박해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가족들간의 갈등입니다.
21절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는 지 아셨나요?
신앙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져서 가족간의 불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현재 무슬림국가에서도 예수님을 믿게되면 그게 자식일지라도 가문의 수치가 되기 때문에 가만두지 않습니다.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북한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는 없겠지만 여전히 신앙때문에 가족들과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부모가 너무 기독교를 싫어해서 자식이 몰래 교회를 다니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또는 조상들 제사문제로 인해 가족들과 갈등을 겪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저희 집도 원래 제사를 지내던 집이어서 저는 신앙을 갖고난후 제사 안 지내려고 자는 척 한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희 집은 이 일로 불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마음이 저에게 불편하기는 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여전히 신앙은 갈등을 일으키는 주제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무슨 위협을 가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큰 잘못을 한것도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 나라 복음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는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삶의 방식과 태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지난주에 말씀드린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가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어 버립니다.
그렇다보니 제자들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그냥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적용]
그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믿음을 갖는데 누구의 방해나 저항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앙때문에 누군가와 부딪혀본적이 있습니까?
나의 믿음이나 신앙때문에 손해본적 있습니까?
물론 목사인 저부터 회개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하면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고 말입니다.
참된 제자가 되려한다면 고난은 숙명입니다.
그래서 제자의 길이 좁고, 험난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숙명이라고해서 무작정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때 지혜와 순결을 잃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악한 자들이 제자들을 속이려 할 때 속지 않는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악한 자일지라도 그들을 속이려하거나 그들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괴물과 싸우려다 괴물이 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이 순결하기만 하면 무지하거나 무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순결함 없이 지혜롭기만 하면 간사하거나 교활해질 수 있습니다.
융통성과 순수함을 동시에 갖기 힘든 것처럼 두가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한가지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럼 주님은 고난이 무엇이길래 제자들에게 고난을 숙명으로 주셨을까요?
둘째, 고난은 믿음의 통로입니다.
19,20절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제자들은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역전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앞에 끌려가면 오히려 그 때가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 때 아버지의 영, 즉 성령께서 그 사람이 할 말을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위기는 자신들의 믿음을 드러낼 기회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을 받는데도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만큼 진정성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면 그만두거나 주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이기 때문에 더욱 고난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숨이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중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죽음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초대기독교때도 그렇게 많은 박해가 있었음에도 복음의 전파를 막을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28절에 단서가 있습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것은 제자들이 고난 앞에서도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시적인 육체의 생명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제자들의 담대함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사자밥으로 던져져도, 십자가에 처형을 당해도, 돌로 쳐죽여도 제자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밟아도 밟아도 생겨나는 잡초처럼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났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이것은 입으로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 앞에서 그 사람이 취하는 태도가 바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태도가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시고 심판의 날 우리들을 인정하실지 결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은 일방적으로 고난을 견디라고만 하셨을까요?
29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당시 동전 한 냥이면 참새 두마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참새는 서민들에게 가장 흔하고 구하기 쉬운 먹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중에 가장 작은 부분이 머리카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새보다 귀하고, 머리카락보다 귀한 제자들을 돕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고난가운데 홀로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도우심을 믿었기에 고난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적 연결]
성경 속에서 주님께 쓰임받은 인물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하나만 믿고 25년을 기다려 이삭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삭은 우물을 팔때마다 사람들이 가로채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사람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삼촌에게 도망갔다가 삼촌에게 속아 고생만 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노예로 팔린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감옥까지 갔었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자였지만 도망자 신세가 되어 40년을 양치기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어릴적 왕으로 택함받았지만 미움받아 10년 넘게 광야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40년의 광야세월이 주어진 이유도 그들의 믿음이 깊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고난을 거쳐 찐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우리의 성품을 성숙케하여주며,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양분이며, 우리의 소망을 튼튼하게 만드는 힘줄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럼 우리들은 고난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우리들중 누구도 제가 주님의 제자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주님의 제자까지는 아닐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그리스도인인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고난은 찾아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자에게 고난은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복음이 진리인지 아닌지 우리의 태도를 보고 판단합니다.
나의 감정, 나의 상태도 움직이지 못할 믿음이라면 누가 그것이 진리라고 믿을까요?
말씀이 나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면 누가 그것을 진리라고 믿을까요?
그러나 고난가운데서도 꺾이지 않는 믿음과 변함없는 태도가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했는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하나님은 왜 아무런 도움을 안 주시지?
이런 질문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자주 겪게 되면 신앙생활에 힘이 쭉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목사인지라 제 기도에 하나님이 다 응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때는 제 자신에게 또는 하나님께 원망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고난은 하나님의 큰 계획가운데 있는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는 내 앞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를 보고 내다보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고난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만큼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인내로 이겨내면 분명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숙해질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더 견고한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으며, 비바람을 겪지 않고 열매맺는 과일이 없습니다.
거센 비, 바람과 태풍을 이겨낸 나무의 뿌리는 매우 깊고 단단합니다.
조개가 거센 파도를 겪고나서야 값진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성도분들 모두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