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당한 이들을 위한 공동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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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제가 우리 하름교회에 부임한 지 어느덧 5개월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궁금하진 않으셨죠?) 지난 주일에 전정재 목사님 담임목사 취임식을 보면서 저도 엊그제 취임한 것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리 교회에서 한 10년 정도 지났을 때, 만일 누군가가 ‘하름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라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우리 교회는 아둘람 공동체와 같은 교회입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아둘람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였길래 그런 말을 하고 싶을까요? 이 아둘람 공동체를 딱 한 마디로 설명해야 한다면,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에는 번성하고 축복받은 시작보다 나중이 더 잘된 공동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라이벌로 여겨지는 관계들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다윗과 사울왕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요. 혹시 사울과 다윗의 첫 만남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처음 만난 장소 역시 오늘날에도 라이벌로 여겨지는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쟁 한복판이었습니다.
이때 한낱 양치기에 불과한 다윗이 이 거대한 장수 골리앗에게 맞서게 되는데요. 놀랍게도 거대한 힘의 상징이던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하루아침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 되지 않습니까? 이후에 사울왕은 다윗을 한동안 아꼈습니다만, 사람들이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는 노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를 듣고 마음이 확 바뀝니다. 이 노래를 듣는 순간부터요.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겠다고 작정을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심리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높은 위치에 있을 때, 혹은 내가 더 잘하고 많이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고 훨씬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건강하지 않으면 나의 실제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열등감이라는 것이 스멀스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울왕과 다윗을 어떻게 견줄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왕이잖아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을지언정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가진 실세 중의 실세 아닙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부르는 그 노래하나에 사울의 질투와 시기가 시작되더라고요. 그리고 그 시기와 질투가 한때 사랑하고 아끼던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데까지 이른 것 아닙니까?
마침내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망간 장소가 공교롭게도 블레셋의 5대 성읍 중 하나이며,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 성이었습니다. 여기가 어디냐면은요. 불과 얼마 전 블레셋과 전쟁할 때 골리앗을 무너뜨렸던 그 블레셋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사람들이 골리앗을 이겼던 자신을 알아볼 거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죠. 그러나 워낙 골리앗과의 싸움이 인상적이었기에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의 모든 이들에게 전설처럼 기억되는 사건이었잖아요? 그런데도 다윗의 상황이 얼마나 매우 급했으면 적국인 블레셋으로 다 도망했겠습니까? 마침 가드 성에 있던 신하들이 다윗을 대번에 알아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21:11
11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는 노래가 블레셋 땅에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사울왕이 미칠 만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적국의 신하들까지도 단번에 알아볼 만큼 명성이 높았던 사람입니다. 이 예상치 못한 명성 때문에 다윗은 더욱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삼상21:12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다윗이 이 순간에요.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대문짝에 몸을 막 그적거리면서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척 연기를 했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무찔렀던 그 용맹한 다윗이 이렇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아진다 한들 피조물일 뿐이며, 진짜 위대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다윗일지라도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의 연기에 속은 아기스왕은 다윗을 죽이지 않고 쫓아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은 다시 한번 가까스로 위기에서 탈출합니다. 이후 다윗이 도망간 장소가 바로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블레셋의 수장 앞에서 침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인생의 치욕이 지나자 곧바로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자신의 형제와 아버지 등 자기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무려 10년 이상의 도망자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간 다윗의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그에게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아둘람 공동체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 사울 공동체와 아둘람 공동체의 차이가 뭘까? 무슨 차이가 이렇게 대조적인 결과를 가져왔을까? 가만히 본문을 가지고 묵상을 해 보니까요. 바로 지도자의 차이더라고요.
사울 공동체는 모든 물질과 권력과 부와 명예와 이런 것들을 다 갖추었지만, 거기는 악한 사울이 지도자로 다스리던 공동체였고 아둘람 공동체는 아무것도 없었고 상처받았고 초라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거기에는 훌륭한 지도자 다윗이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은요, 여러분. 우리 하름교회가 사울 공동체가 아닌 아둘람 공동체가 되려면, 처음에는 미약하고 초라했지만, 나중에 저 더 잘 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딱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좋은 지도자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좋은 지도자가 뭐, 인간이 뭐 조금 유능하고 똑똑하고 뭐 인간이 좀 인격적이고 이런 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아둘람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필수 조건으로 갖추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하름교회를 다스리는 공동체 그러면 우리 교회는 아둘람 공동체처럼 갈수록 더 잘되는 교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담임목사인 저는 다윗과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고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름교회의 최고 지도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케스트라로 따지자면, 예수님이 우리 교회를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도록 지휘하는 지휘자이시고요. 여러분들이 악기 하나 하나를 연주하는 멋진 연주자들이세요. 그리고 저는 그냥 지휘자가 주는 악보를 나누어 주는 사람일 뿐이에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주님께서 이렇게 연주하시면 된대요.” 이게 제 역할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면 됩니다. 제가 뭐 담임목사라고해서 주제넘게 예수님의 자리를 넘보지 않으면 됩니다. 주님의 교회잖아요? 그러면 우리 교회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시대의 아둘람 공동체로 삼아주시고 가면 갈수록 영적으로 더 부흥하고 잘 되는 교회로 자라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어떤 가정이 좋은 가정입니까? 세상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단칸방에서 초라하게 시작하더라도요. 부부가 한마음이 되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런 가정이 처음에는 미약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창대해지는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후에도 다윗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둘람 굴에 모이기 시작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2절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
‘아둘람’이란 말은 ‘피난처, 은신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가족에게 연락해서 먼저 이곳으로 피난시켰는데요. 그 과정에서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두 환난 당한 자, 빚진 모든 자였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들을 두고 ”사회 부적응자, 오합지졸의 무리였다“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400명이나 모였으니 여러분, 초반에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다 상처받은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상처 많은 분들의 특징을 아시죠? 내가 제일 상처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저도 목회를 쉴 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목사가 저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누가 저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냐?”라고 물어보기만 해도 ‘이분이 왜 나를 불쌍하게 보는 거지?’ 막 이랬습니다. 그 시절에 제가 사울이 되가지고 제 아내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요. 제 아내가 살이 한창 빠졌었거든요. 다이어트가 필요 없는 정말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좀 평안하지 다시 회복되는 걸 봐요. 제가 오늘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무튼 그렇게 지도자부터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상처가 많고 피해가 많았던 그런 공동체인데요. 놀라운 것은요. 그 상처 많은 아둘람 공동체에서 나중에 위대한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다윗 공동체’라면은요. 이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또 다른 공동체가 있는데, 바로 ‘사울 공동체’입니다.
말 그대로 사울 밑에 있던 공동체로 권력도 있고 기득권도 있습니다. 이들은 동굴이 아닌, 궁궐에서 지냈고요.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요. 아둘람을 거점으로 한 다윗 공동체가 모이는 공동체라면, 이스라엘의 사울 공동체는 사람들이 떠나는 공동체더라고요.
사울 공동체는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망하는 공동체가 되었고 아둘람 공동체는 아무것도 없고 상처투성이였는데, 한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인물을 배출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자, 이 두 공동체를 교회라고 생각해보시고요. 어떤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일까요?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화려하게 시작했다가 점점 초라해지고 어려워지는 그런 사울 공동체가 아니라, 시작은 비록 미약하고 막 대단하지 않더라도 갈수록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 갈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는 아둘람 공동체 같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비록 교회라고 불리지는 않았지만, 구약성경에서 교회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이 아둘람 공동체는 과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꿔야 할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지 함께 나누길 원하는데요. 먼저 아둘람 공동체의 특징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아둘람 공동체의 특징은, 환난당한 사람들이 환영받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무엘상 22장에는 아비아달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을 피해 달아난 다윗은 놉 땅에 있는 성소에서 제사장 이히멜렉으로부터 진설병을 얻어먹고 골리앗의 칼도 받게 되거든요. 그때 에돔 사람 도엑이 이 사실을 사울에게 밀고해 버립니다. 사울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히멜렉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막 추궁합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사울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다윗은 당신의 신하 중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사위인데 그를 도와줬다고 그렇게 역정을 내십니까?”(삼상22:14-15) 라고 직언을 하는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사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아히멜렉을 죽이라고 하는데, 제사장이다 보니까 누구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는 거예요. 이때 또 그 기회주의자인 도엑이 칼을 들어서 제사장들을 죽이는데 무려 85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때 죽임당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도망쳐서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를 찾아간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아, 교회가 그런 곳이구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세상의 압제에서 신음했던 사람들이 공동체로 모이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뭐예요? 서로 처지가 같았기 때문 아닙니까? 사울에게 억울하게 쫓기는 다윗과 그 아둘람 사람들이 사울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아비아달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요?
여러분 교회는, 환난 당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꼭 병원 같은 곳이에요.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상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치유받고 퇴원해서 세상에 나가 소명자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병명도 다양합니다. 외롭고 소외되고 중독에 빠진 이들, 파산하고 이혼하고 실패하고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분들, 궁핍하고 실직하고 가정의 불화로 환란과 아픔을 가슴에 응어리처럼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유일하게 피난처로 삼아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낙심과 절망에 빠져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분들, 열등감에 쌓인 분들, 이렇게 아둘람 공동체는 환란 당한 이들이 환영받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이죠.
두 번째는, 아둘람 공동체는 아픔까지 함께 나누는 공감 공동체였습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원통함을 가지고 찾아온 아비아달에게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삼상 22:22-23 화면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23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여러분, 다윗이요. ‘네 아버지 아히멜렉이 죽은 것은 다 내 탓’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나와 함께 하면 안전하리라’ 이런 엄청난 공감을 보여줍니다. 와~ 너무 든든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의 탓입니다’라는 고백을 우리 인생에 몇 번이나 할까요? 저도 그렇고요. 대부분 하지 않습니다. 내가 권위 있는 위치에 있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남편되시는 분들은 정말 언어습관을 좀 돌아봐야 해요. 더더군다나 교회 공동체에서 누군가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가지고 왔을 때, ‘저도 그렇습니다.’ 공감해 주어야 하고요. 누군가가 나의 잘못에 대해 조언을 해 줄 때 ‘제 탓입니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공동체에 사람이 모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그런 공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둘람 공동체는 사울왕 때문에 고통받았던 것들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소망 가운데 서로를 치유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들이 두려움과 불안, 좌절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이 아닌 내 탓입니다’ 말할 수 있는 다윗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려운 사람들끼리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치유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이제 새로 오픈하는 홈페이지에 중보기도 요청 게시판을 만들었습니다. (화면) 누군가를 위한 최고의 사랑 표현이 무엇인가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는 것 아닌가요? 우리 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익명이든, 실명이든 기도를 요청할 수 있고요. 그를 위해서 영적으로 후원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죠.
여러분, 인간의 허물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저도 엄청나게 허물이 많은 인간인지라, 지금이야 부임 초반이니까 그런 게 잘 안 보이시죠? 한 해만 지나 보세요. “어휴~ 우리 목사님은 못하는 것도 없지만,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 진짜 온통 허물투성일 수도 있어요.
여러분, 교회가 정말 건강하게 부흥하려면은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서로 아픔을 나누고 치유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목장같은 소그룹을 중심으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는 신뢰와 안정감이 있어야 합니다. 아둘람 공동체는 동굴에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서로를 치유하는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꿈꿔야 하는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여야 하는 것이죠.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요.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요.
지난주일 결단찬양으로 “선한 능력으로”이라는 곡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이 곡을 쓰신 디트리트 본회퍼 목사님의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 유명한 문구가 생각나는 거예요. (화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여러분들은 이 문장을 딱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제가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그 본회퍼 목사님의 찬양을 계속 묵상하다가 이 말을 이렇게 해석을 되었습니다. (화면)
“예수님이 아니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관계도 우리는 만나야 한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만남이 아니면 이렇게 함께 한 교회에서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와 여러분들이 만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지금 이렇게 만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요. 심지어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의 지도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군대장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 삶의 자리로 막 몰아넣으시더라고요.
아니 지금 다윗은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상황 아닙니까? 다윗 혼자만 도망 다니는 것도 버겁기만 한데, 이 상처받은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을 다녀야 하는 상황에 아둘람 굴도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실제로 사울이 끊임없이 다윗을 잡으러 오니까요. 사무엘상 22장 3절을 보면 다윗이 유다 땅 안에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고 판단해서 사울의 통치 영역이 미치지 않는 이방지역인 모압 땅 미스베로 도망을 가거든요.
여러분, 다윗 딴에는 얼마나 고민해서 이방 땅까지 도망을 갔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계획을 다 무너뜨려 버리십니다. 5절을 보니까요. 갓 선지자를 미스베로 보내셔서 막 다윗을 책망하시면서요. 다시 유다 땅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환난 당한 자, 마음이 원통한 이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온 곳이 어디냐면 5절에 보니까요. 유다 땅 헤렛 수풀가입니다. (화면 – 다윗의 도피 여정)
여러분, 이 다윗의 도피 여정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10년을 이렇게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요? 그 상처 많고 고통 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문제를 떠안으면서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이방 땅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되는 고된 여정과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삶을 다윗에게 허락하시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다윗을 통하여 어떤 일을 이루어 내십니까? 다윗이 그 시간 이후로도 매일매일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도망 다녀야 하는 도망자의 신세인데 놀라운 것은요. 아둘람 굴로 찾아왔던 환난 당한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빚진 자들이 다윗의 이 도망 다니는 여정에서 가장 큰 위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국이 세워졌을 때, 그 아둘람 공동체 사람들이요. 다윗 왕국의 기둥들이 됩니다. 그래서 시편 57편에 보면, 이 아둘람 굴에 있었을 때 그가 불렀던 찬양이 나오는데요. 시57:7,8절 합독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새벽은요. ‘새벽기도 하라’는 그 새벽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깜깜하고 완전히 어두워진 이 유다 땅에 새날을 만들겠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 억울하고 원통하고 빚진 자가 없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임하는 언약의 땅으로 제가 이 나라를 세우겠습니다.”라는 고백을 이 400명의 환난 당한자들과 함께 결의를 다지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요. 우리 모두가 환난당한 자이고 우리가 억울한 자이고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빚진 자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거예요. 우리는 초라할 수 있어요. 우리가 가난하고 우리가 내세울 것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제 자리로 돌아오라는 거예요.
이런 연약한 인생들을 붙잡아서 이 하름교회라는 아둘람 공동체로 모이게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내가 반드시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 “그러니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말고, 일어나 새벽을 깨워 이 어두운 땅에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교회, 그 이름에 걸맞게 이 시대의 아둘람 공동체가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들이 별 볼 일 없는, 눈물 흘리고 한숨을 토해놓으면서도 함께 걸어가야 할 삶과 하나님이 세워주실 새날을 기대하면서 어딘가에 있을 다윗과 같은 이를 일으켜 세워 줄 이 시대의 아둘람 공동체가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우리 이 찬양 같이 불러보시면 좋겠습니다. 가사를 가만히 묵상하면서 불러보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 찬양인지 모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처럼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그 400명의 환난 당한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에 행복이라오.” 함께 찬양
❙찬양 : 행복
❙합심기도
우리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우리 하름교회가 새날을 기대하면서 어딘가에서 절망에 빠져 이방 땅으로 갔다가 유다 땅으로 돌아왔다가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그 다윗을 일으켜 세워줄 아둘람 공동체가 되게 해 달라고 이 시간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 목소리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세상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화려하지도 가진 것도 없는 인생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신실하게 세상에서는 진실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환난을 당하거나 무시당하고 버림을 당해도 찾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우리 하름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이 공동체로 인도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외로움과 고독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특히 다윗처럼 사울의 위협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는 영혼들을 품고 다시 세우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새롭게 열어 주실 새날을 기대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지키는 저희들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감사드리며 새일을 행하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