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02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15UNLIKELY
Conscientiousness
0.13UNLIKELY
Extraversion
0.44UN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5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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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인은 지혜의 보고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노인은 지혜의 상징으로 통한다.
많은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말도 많지만 그 만큼 경험 속에서 깨닫게 된 지혜도 많다.
2 그렇다고 나이많은 사람이 무조건 지혜로운 사람이고, 나이 어린 사람은 지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리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한 순간 판단력이 흐려져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3 다시 말해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험을 통해서 쌓은,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은 모든 지혜들은 실수 투성이라는 것이다.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언제 넘어질지 외줄타기처럼 말이다.
4 성경은 그것을 세상의 지혜라고 말한다.
세상의 지혜와 반대되는 것은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할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5 성경에서는 지혜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 (잠언 9:10) /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 (전도서 9:18) /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 (로마서 12:16) 등등.
성경은 지혜라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아주 중요한 지혜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5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도대체 세상의 지혜와 어떻게 다른 것일가?
6 A와 B 라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 다른 의견으로 충돌이 있다.
이 충돌을 어떻게 해결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A와 B가 합리적인 중간 타협점을 적당히 찾고 논쟁을 그쳐 서로 평화한다 ... 이것이 이 시대가 말하는 '선한 것'이다.
7 하지만 A와 B의 충돌이 세상의 쓸데없는 의견들이 아니라 만약 진리와 비진리의 충돌이었다면 어떻겠는가?
정반합, 적당한 중간 타협점을 찾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진리는 타협 될 수가 없다.
진리와 비진리가 부딪친다면 당연히 비진리가 진리에 순복해야만한다.
그것이 선하고 옳은 것이다.
8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을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위해서 내가 대신 처벌 받는 것이 과연 지혜로워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 누가 보더라도 미련한 행동이고 지혜롭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
9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시작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혜는 자기 자신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댓가를 치뤄서하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10 롬 16:19에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 말한다.
‘선에 대해서 지혜롭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고 사랑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선한 것.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우리에게 주시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다.
11 전도의 미련한 것을 가지고 이 세상의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의 삶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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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의 때를 일컬어 ‘청소년’이라고 합니다.
청소년이 뭡니까? 청년과 소년을 통칭해서 청소년이라고 해요.
푸를靑 적을少 해 연年 청소년을 여린 청년이라고 생각해요.
/ 그런데 한참 푸르러야 하는 이 여린 청년의 때가 아름답게 빛나기도 전에 벌써부터 노년을 준비하는 기간이 된 것 같습니다.
노년은 여러분에게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소년,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때를 따라 살아가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의 청소년의 시기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 더 푸르른 시기가 됐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푸른 시절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위치가 참 중요해요.
내가 지금 어디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모든 것은 경계선이 존재합니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지점을 솔트라인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데드 존(dead zone)이라고도 해요.
이 솔트라인은 딱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수시로 움직여요.
가뭄으로 강물의 양이 줄어들면 솔트라인은 강 위쪽에 형성되고, 비가 와서 강물의 양이 많아지면 솔트라인은 바다 쪽으로 깊이 들어가죠.
두 물의 차이는 염분이 있느냐 없느냐인데 그 경계는 극명하죠.
또 트리라인이 있어요.
삼림한계선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의 록키 산맥처럼 만년설로 뒤덮인 높은 산에는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곳이죠.
일년 내내 찬바람만 불고 얼음 때문에 풀 한포기 자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만년설에서 조금만, 조금만 더 내려오다 보면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환경 바로 트리라인이 형성된다.
모든 것에는 솔트라인, 트리라인 같은 경계가 있어요.
관계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친구들과 관계를 정의 할 때 쉽게 결혼식에 비유는데요.
이 친구의 결혼식은 3만원, 저 친구의 결혼식은 5만원, 또 저 친구는 10만원 이런 식으로 축의금을 통해서 친구들의 선을 긋는거죠.
친구는 친군데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친구라고 친밀감이 다르기 때문이죠.
# 신앙의 경계를 구분지어라
우리 신앙생활에도 경계가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경계가 필요해요.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12년째 집필하고 있는 <트랜드코리아>는 10개의 키워드로 한국사회의 소비트랜드를 제시해 줘요.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어서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시대의 트렌드가 나를 압박한다는 걸 느꼈어요.
왜 인줄 아세요? 시대의 트렌드가 곧 신앙의 트랜드가 되어가기 때문이에요.
<트렌드>라는 건 한 사회가 지나가고 있는 어느 시점에서 특정한 생각이나 표현방식 또는 분위기가 그 사회에 확산해 가는 과정과 상태를 말하는게 트렌드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시대의 분위기를 따라가서는 안되요.
오히려 때로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거스를 수도 있어야 해요.
그게 신앙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즘 시대는 이래야해!’ 라고 말하는 것 중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한 맹신이 있죠.
쉽게 말해서 나는 나를 믿지 다른 누구도 안믿는 다는 생각이 팽배해요.
이런 시대 정신이 주류가 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시대정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의 경계선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지혜가 당신의 신앙의 경계가 되게 하라
그리스도인에게도 경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경계입니다.
그것을 두고 성경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해요.
성경에서는 지혜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언 9:10),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전도서 9:18), 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하지 말라(로마서 12:16) 등등.
성경은 지혜에 대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혜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명시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A와 B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으로 충돌이 있어요.
이 충돌을 어떻게 해결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A와 B가 합리적인 중간 타협점을 적당히 찾고 논쟁을 그쳐 서로 평화한다.’
이것이 이 시대가 말하는 ‘지혜롭고,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A와 B의 충돌이 세상의 쓸데없는 의견들이 아니라 만약 진리와 비진리의 충돌이라면 어떻겠는가?
정·반·합, 적당하게 중간 타협점을 찾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여러분 이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는 타협 될 수가 없어요.
진리와 비진리가 부딪친다면 당연히 비진리가 진리 앞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하고,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겹도록 듣고, 또 들어서 알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위해서 내가 대신 처벌 받는 것이 과연 지혜로워 보이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보내셨던 A.D 1세기에도 그랬고, 21세기인 지금도 똑같이 생각해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 누가 보더라도 미련한 행동이고, 지혜롭지 못한 방법이죠.
여러분의 손에 쥐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뭐라고 하죠.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시작부터가 달라요.
사람의 지혜는 자기 자신애(愛)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내가 손해 보지 않는데 초점을 두고, 내가 좀 더 앞서나가는데 목적을 두어요.
트렌드라는 것도 그렇죠.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시대에 민감하게 따라가야지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나은 사람이 된다는 거죠.
한 번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정치판이건, 동네 길거리건.
기를 쓰고 자기거 하나 더 챙기려는 사람들이 수북합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내 앞을 가로막는다 싶으면 경적을 울리면서 죽일 듯이 달려들어서 보복운전으로 위협을 해야 분이 풀리는 사람들을 종종 봐요.
내가 손해보기 싫고, 내가 피해보기 싫고, 내가 무시당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이 세상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댓가를 치루고 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고 마는데 초점을 둡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을 담고 전하는 거죠.
롬 16:19에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 말씀합니다.
‘선에 대해서 지혜롭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고, 사랑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선한 것.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우리에게 주시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푸르고 푸른 시절에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다면 이 세상의 미련한 것을 가지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에 여러분의 삶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만 가능함을 믿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곧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갈 2:20).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학벌이나, 집안, 인간적인 세상의 지혜와 돈, 권력.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랑할 때 십자가의 도는 실종되는 거예요.
교회는 교회다움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길은 모든 자랑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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