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41UNLIKELY
Conscientiousness
0.31UNLIKELY
Extraversion
0.09UNLIKELY
Agreeableness
0.66LIKELY
Emotional Range
0.11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 .5
.5 - .6
.6 - .7
.7 - .8
.8 - .9
> .9
신앙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3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310장(아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의 백성들, 주의 존전에 나아와 주를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도 세상은 쾌락과 유혹 속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혼미하게 살아갑니다.
우리 교회가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본문: 출 20:1-2, 마 22:37-40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 ‘종’이라는 단어는 에베드라는 단어인데,
어근이 ‘아바드’입니다.
예배하다, 섬기다 라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본래 예배하는 존재, 신적인 대상을 섬기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 자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 이후에, 많은 조상을 거쳐서,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디에 있었느냐면,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
애굽 나라에서 우상을 ‘아바드’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십계명의 머리말은 무엇이고, 그 머리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소요리문답 제43문을 보겠습니다.
제43문 : 십계명의 머리말이 무엇입니까?
답 : 십계명의 머리말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머리말이 있습니다.
그냥 바로 명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명령이 있는 것인데,
이걸 신학적으로 ‘직설법’과 ‘명령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요리문답을 배웠는데.
제 1문부터 38문까지가 ‘직설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들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복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복이죠.
우리가 보호자가 없다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호자 없는 인생은 그 자체로 불행이고 고통이죠.
그런데 우리가 보호자 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보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적용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직설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이죠.
하나님 자신을 주시고,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값진 복을, 성령으로 얻어 누리게 하셨으니,
이것이 ‘직설법’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그 구원받은 자의 삶을 ‘명령법’으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롭게 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 논쟁]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성화 파트’를 보면,
순종에 대한 요청은 항상 직설법으로부터 나오거나 직설법을 따라 나온다.
개혁파 견해에서 도덕적인 명령법(행함)은 항상 직설법(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행함 이전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선행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설법은,
나는 당신의 은행 계좌에 100억원을 넣어 두었다.
그러므로 명령법은,
얘야, 이것 좀 사오너라.
이것 좀 나누어 주거라.
우리에게 이미 큰 사랑을 베푸시고,
큰 사랑을 이미 입금하셨기 때문에,
얘야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죠.
먼저 큰 사랑을 입금해주시고, 그 다음에 그 주심에 따라 너도 행하라고 명령하심.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도덕이고 윤리입니다.
*약간 어렵기는 한데,
그래서 오늘 본문도 보세요.
명령이 먼저가 아니에요.
십계명이 바로 시작되지 않고, 머리말이 먼저 있습니다.
머리말이 2절입니다.
2절을 보세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직설법이 먼저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일, 직설법이 먼저죠.
그 이후에 우리의 행함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이스라엘에게 행하셨습니까?
고통의 나라, 억압의 나라, 노예와 죽음의 나라, 애굽 땅에서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낸 일 아닙니까?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우상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
출애굽했어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 가운데 우상을 제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10가지 재앙으로 우상을 다 제거하셨습니다.
이미 우상은 제거된 상태에요.
이미 다 제거해주시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이죠.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게 뭡니까?
명령법이죠.
하나님은 이미 모든 우상들을 제거해주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우상 신들을 파괴하셨죠.
첫번째, 피의 재앙은,
애굽의 경제적 근원인 ‘나일 강’을 파괴해버렸습니다.
피 재앙은 우상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애굽의 우상을 파괴하신 것이죠.
개구리, 이, 파리, 가축의 죽음, 종기, 우박, 메뚜기, 어둠 등등
모두다 애굽의 우상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주는 재앙들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10가지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애굽의 신들을 파괴하고,
그 우상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신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이것이 ‘직설법’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짓누르고 괴롭히는 모든 ‘우상’들을 제거해주신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으로 그들을 구원하신 후에,
이제 10가지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요 십계명은
은혜의 법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롭게 살도록 하게 하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우상의 노예로 살았고,
애굽 땅 바로의 나라에서, 종처럼 살았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앞으로도 자유롭게 살아라.
앞으로도 우상의 지배를 받지 말아라.
라고 자유를 주시려고 주신 자유의 법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인간에게 주신 감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감정은 뭐에요?
감정은 세상을 해석한 결과에요.
진리가 아니라 주관이에요.
우리가 세상을 어둡게 해석하면 어때요?
그러면 우리 감정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생이 힘들고 어렵고 아파도,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면,
힘든 와중에도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행복이 있고, 그런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세상을 ‘천국화’하려고 해요.
물론 세상이 아름답죠.
그런데요.
타락 이후에 세상은 결코 자기 능력으로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슈퍼마켓이라 생각했는데,
가보니까 별로 살만한 물건이 없는 거에요.
광고는 화려한데, 가보니까 정작 물건들이 실망스러운 거에요.
그게 세상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최고의 슈퍼마켓 주인’이라고 하세요.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세요.
예수님 안에서 진짜 살만한 물건들이 많다고 해요.
예수 믿으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우리 영혼을 만족시킬 ‘슈퍼마켓 주인’이 없다고 하세요.
예수님 외에는 천국을 가져오실 분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무신론자들은 어때요?
감상적인 인본주의자들은 어때요?
성경도 안 믿고, 예수도 안 믿고, 천국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어떻게든 ‘천국화’하려는 것입니다.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상을 ‘천국화’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천국이 되었나요?
여러분,
인간은요.
영적인 X-Ray를 찍어보면, 다 병들었어요.
영적 MRI를 찍어보면, 다 아프고 상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인 거에요.
자기 영혼도 제대로 간수를 못하는데, 무슨 천국을 인간의 힘으로 만들까요?
자기 하나도 못 지키고,
가정 하나도 버겁고,
우리 삶 하나도 버거운데, 무슨 인간의 힘으로 천국을 만들까요?
여러분, 세상에는
‘직설법’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
명령대로 행할 수 있는 은혜가 없어요.
세상에는 그냥 명령대로 살라는 ‘명령법’만 있는 것입니다.
사람 차별하지 말아라.
인간의 권리를 존중해주어라.
'명령법’만 있는 거에요.
명령은 누구나 하죠.
누가 명령은 못 합니까?
유교도 보세요.
유교는 뭐에요?
하늘의 뜻을 실천하라는 ‘명령법’만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실천하는 사람이 “덕”이 있는 사람이죠.
유교는 ‘직설법’이 없어요.
아무 것도 해준 것도 없구요.
구원도 없구요.
은혜도 없습니다.
그냥 ‘명령’만 있는 거에요.
누가 명령은 못합니까?
그런데, 십계명은 달라요.
은혜가 먼저입니다.
십계명은 자유와 해방의 법입니다.
이미 주신 은혜가 있어요.
그리고 그 은혜에 따라 행하라고 하시죠.
*하나님은 악덕 사업주가 아닙니다.
재료도 안 주고, 물건 만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도 한 달란트, 너도 한 달란트,
다 각자에게 주신 한 달란트가 있는 거에요.
우리 각자에게 이미 주신 ‘직설법’의 은혜가 있는 거에요.
이 은혜에 기초해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100억원을 입금시켜 놓으시고,
얘야, 이것 좀 사와라.
저것 좀 사와라.
명령하시는 거죠.
이것이 십계명의 머리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너희에게 구원을 주셨고, 자유를 주셨고, 은혜를 주셨고, 사랑을 베푸셨다.
그러므로 너희도 하나님 사랑하라
예배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에 실패한 것입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꾸만 우상을 숭배하든지
반대로 하나님 은혜는 모르고 형식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든지..
‘사사기’ 성경이 그 증거 아닌가요?
그리고 열왕기상하 성경이 또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이 베푸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 아니?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예배했기 때문이란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시리아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다니엘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고향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먼 이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자유가 없는 이유는,
십계명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먼저이고,
하나님이 우선 순위입니다.
이것을 깨뜨리면, 우리 삶은 순식간에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다, 나 자신을 우선시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편에 따라,
기뻤다가 슬펐다가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내 소유를 우선시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소유에 따라,
기뻤다가 슬펐다가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저것들은 신이 아니다.
저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저것들은 무능한 것이다.
모두 다 나의 손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너희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오직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예수 처음 믿으면, 그렇게 은혜가 넘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은혜는 말라가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안계셔서가 아니고,
은혜가 사라져서가 아니고,
받은 은혜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장병에 걸린 환자를,
어떤 의사가 고쳐주었습니다.
은혜죠.
멀쩡한 위장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직설법이죠.
그래서 의사가 말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자극적인 음식 먹지 말고, 술 드시지 말고,
위장에 좋은 음식만 먹으세요.
이건 뭐에요?
은혜 베푼 후에 하는 명령법입니다.
내가 고쳐주었으니까, 앞으로도 건강하게 살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언제그랬냐는듯이
아팠던 기억은 잊고
회복하고 좋아졌다고,
다시 예전처럼 술 마시고, 자극적인 음식들만 찾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거죠.
분명 구원 받았는데,
이 환자의 삶은, 예전처럼 구원받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고통스러운 위장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십계명은 구약 백성들만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살아 있는 법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했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세요.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1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을 비추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였듯이,
이제는
자신의 제자들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제가 5장 14절,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고,
거룩한 백성이고, 제사장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살인하지 말라는 법에서 더 나아가서,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더 뚜렷하게 십계명을 해석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더더욱 십계명을 철저히 순종해야 하는 것이죠.
이걸 안하면 세상의 빛이 아닌 것이죠.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시작되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 즉 직설법에 기초하여 하시는 명령들.
그러니까,
이미 입금하신 은혜에 기초하여,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들입니다.
십계명의 머리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은, 세상의 법들이나 유교의 예법과는 다른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기 때문에, 십계명은 무거운 법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나누어주는 법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법인 것이죠.
여러분이 지금까지
십계명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았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불렀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신들을 예배하느라,
하나님 예배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면,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열방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값없는 크신 은혜를 베푸신 것이죠.
십계명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순종을 쓰시는 것이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죠.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순간,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땅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력을 잃고,
아무 쓸데 없어,
하나님 앞에서도,
세상에서도 무의미한 존재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드러내라고,
구원의 기쁨을 계속해서 누리며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평등법을 만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인간의 힘으로 천국을 만들 수 없습니다.
평등하게 살자.
존중하며 살자.
사랑하며 살자.
아무리 말해도 인간의 힘으로느느 자기 하나도 행복하게 할 수 없어요.
오직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우리는 천국을 맛볼 수 있고,
그 천국을 누리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은혜를 더욱더 알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더더욱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먼저는, 들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짐처럼 여깁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충분한 은혜를 주시고서, 그 명령대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행되는 은혜를 알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 말슴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도록.
더 나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둘째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의 영육의 강건함을 위해서.
병약한 성도들의 치유와 빠른 회복을 위해서.
더 나아가 우리 교회가 복음의 전달자가 되도록.
우리 교회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넉넉함을 깨달아,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주의 자녀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말하는 거짓된 인본주의적 유토피아를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 안에 천국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만 천국을 가져다주시는 가져오시는 분임을 알고, 세상의 거짓된 철학과 속임수에 속지 않는 주의 자녀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찰
1 엘로힘께서 말씀하셨다, 이 모든 다바르(말씀, 명령, 일)들로, 이르시기를,
2 아노키(나), 여호와 엘로힘(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나오게 하였다, 이집트 에레쯔(땅)으로부터, 에베드(종, 노비)의 바이트(집)으로부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나는 너를 나오게 하였다.
이집트 땅으로부터
노예의 집으로부터
2군데에서 나오도록 도우셨다.
연구
42-44문
제42문 : 십계명의 강령은 무엇입니까?
답 : 십계명의 강령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강령 : 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 / 핵심, 요점)
십계명을 한 번더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제43문 : 십계명의 머리말이 무엇입니까?
답 : 십계명의 머리말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신 것입니다.
머리말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근거가 됩니다.
제44문 : 십계명의 머리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십계명의 머리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고, 구속자이시므로, 우리가 마땅히 그분의 모든 게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분이 우리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석
에베드 : 종, 노예
아바드 : 노동하다, 일하다, 봉사하다
예배하다(섬기다) : 신을 예배하다
섬기다 : 종이 되다
일하다 : 목적이나 필요에 따라 육체적/정신적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발휘하다.
십계명의 말씀은 ‘모세의 중재 없이’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서워서’(출 20:19) 모세를 통해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되었다(출 20:18).
2절은 ‘언약의 서문’이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수단을 통하여 백성 전체를 속박에서 구출하시고 초강대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언약, 약정(言約, 約定, covenant)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지는 약속(계약, 맹세)’을 가리킨다.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간의 약속이 주류를 이룬다.
성경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으로 맺으신 구원 언약(testament)이 중심 주제이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언약의 형태로는 ① 계약 당사자 모두 그 동의된 내용을 받아들이는 ‘쌍방 언약’이 있다(창 31:43–46; 삼상 18:3–4; 말 2:14).
주로 상호간의 불가침이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창 31:50–52; 수 9:15,21), 우정을 위해서(삼상 18:3), 매매나 교역 촉진을 위해서(왕상 5:6–11; 렘 32:10–12), 군사적 동맹을 위해서(왕하 15:18–19) 이뤄졌다.
② 권위나 능력 등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는 쪽에서 주도하는 ‘일방 언약’이 있다(겔 17:13–14).
형식적으로는 서로간의 동의에 의한 쌍방 언약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명령과 순종, 약속과 믿음으로 이뤄지는 일종의 편무(片務) 언약이다(창 9:8–17; 15:4–11; 출 19:5; 신 23:16).
특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스스로 조항들을 부과하시면서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써 철저히 자신이 시작하여 자신이 완성하실 것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개입하신 것은,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하신 ‘언약’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다.(출 2:23-25)
출애굽기는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후손의 놀라운 확장과 관련된 약속이 성취를 강조하면서 시작된다.
시내산 언약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되기를 원하시는 국가의 유형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바라셨다.
이것은 ‘열방의 빛’이 되라는 명령이다.
이스라엘은 ‘십계명 언약’을 지킴으로써, ‘여호와’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공급에 대한 보답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은 충성을 나타나기를 기대하신다.
십계명은 그의 백성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박에서 풀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시간적 배경 :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지 3개월이 되는 날이다.
장소적 배경 : 애굽에서 팔레스타인을 연결하는 길은 3개의 길이 있었다.
북쪽 길 : 가장 빠르고 가까운 길이었다.
하지만 애굽의 군대가 곳곳에 주둔하고 있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갔다가는 무장충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중간 길 : 시내 반도의 중앙에 위차한 방패 모양의 석회암 지대를 관통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물을 전혀 얻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남동쪽 길 :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길을 택했을 것으로 강력히 추정한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산, 시내산, 호렙산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 지리적인 위치에 대하여 확실한 해결점을 찾아주지 못한다.
출, 19:5에서 ‘나의 소유’라는 표현을 한다.
‘하나님의 소유’를 의미한다.
‘세굴라’ ‘여호와 자신의 특별한 존재’
세굴라는 평범한 소유가 아니라, ‘아주 값진 것으로 소중해서 따로 떼어놓은 것’을 의미한다.
‘사갈’의 의미가 ‘따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은과 금과 같은 보물.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따로 구분하여 놓은 보물로 대하신다.
이제는 ‘언약 백성’으로서 특별한 삶을 살아야 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특정한 시간’ 또는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적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언약관계가 거룩함을 기초로 하고 있기에 거룩한 백성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출애굽에 나타나는 구속의 양식, 곧 구원(‘직설법’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먼저이며, 경배로 이어지는 율법 수여(‘명령법’,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일)가 다음인 것은 성경신학에서 율법과 언약을 위한 구조를 제공한다.
모세 율법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성경 중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욕하시는 바에 대한 가장 완전한 설명이다.
십계명이 오늘날에도 구속력이 있는가?
어찌 되었든,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강령으로 십계명을 요약하셨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빛’이 되도록 여호와께 선택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다.
도덕법 차원:
시민법 차원 :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재판법
의식법 차원 :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와 관련
그러나 우리는 어디서도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의 구별에 따라 나누는 것을 듣지 못한다.
그렇지만 십계명만 하나님이 주신 돌판에 새겨지고 언약궤에 보관되어 따로 구별된 모습도 있다.
십계명은 구체적 형벌을 규정하지 않으며 율법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체계에 더 가깝다.
제사보다 순종을 강조하는 모습.
하나님의 백성은 심지어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기는 중에도 하나님의 율법 중에 ‘의식법의 측면’은 지킬 때가 많았다.
따라서 율법의 삼중 분할이 모세 율법을 너무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일 수 있으나, 적어도 우리가 율법의 삼중 차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절대성 vs 상대성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 vs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
율법
율법 律法 (법칙 율, 법 법)
던지다’, ‘(물을) 뿌리다’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말로, 지시, 교훈, 법령, 계명, 법, 관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민 15:16; 시 19:8).
또 헬라어 ‘노모스’는 ‘분배(할당)하다’, ‘나누다’, ‘분리시키다’는 뜻의 ‘네모’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거룩히 구별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법을 말한다(요 7:19; 롬 10:4).
율법이란, 일차적으로는 십계명(출 20:3-17; 신 5:6-21)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법(계명, 법령, 규례, 교훈, 명령), 또는 구약성경(요 10:34; 12:34), 혹은 좀 더 포괄적으로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전체를 가리킨다.
복음서에서는 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모세가 기록한 오경을 가리켜 묘사하고 있다(마 5:17; 8:12; 눅 16:16; 요 7:19).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반드시 율법을 배워야 하며(출 24:12), 들어야 하고(느 8:1), 늘 묵상해야 하며(시 1:2; 119:97), 온 인격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출 16:4; 신 30:10; 수 1:7; 22:5; 왕상 2:3; 시 119:44).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며(신 30:10),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수 1:7-8; 왕상 2:3).
그리고 율법을 굳게 지키는 자는 영혼이 살고 지혜롭게 되며(시 19:7; 잠 28:7), 그 기도가 외면당하지 않고(잠 28:9), 하나님께 잊혀지지 않는다(호 4:6).
한편, 예수께서는 율법의 문자적 준수보다 그 정신과 원리를 더 강조하셨다(마 5:17-48).
그런 맥락에서 율법에 대한 외적인 순종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인격적인 신뢰와 순종 그리고 동기의 순수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또 모든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마 22:35-40).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 (30주제 기독교 강요, 106)
율법은 삶의 규범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율법은 그것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지혜, 의, 인자, 긍휼, 진리, 능력, 생명”을 계시한다.
예수님의 ‘명령’은 예수님의 ‘성품’을 계시한다.
예수님은 용서가 한계가 없으신 분이시다.
‘용서’라는 성품은 공유적 속성인데,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용서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사랑
깊은 애정의 느낌
성경과 기독교 신학 및 윤리의 중심주제
‘아하브’
사랑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흔한 사랑의 단어.
mry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에도 사용되며 종종 성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실질적인 mrw.t는 사랑과 호의의 의미를 모두 전달합니다.
사랑(mry)은 또한 파라오에 대한 최고 신(예: Re)의 사랑뿐만 아니라 왕과 그의 백성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묘사합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고전적인 학술 논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On the Love of God)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악해서 자신을 사랑하고, 가장 먼저 자신에게 헌신하도록 강요한다”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사랑하는 동안 고통스러운 이유다.
베르나르는 사랑의 네 단계를 설명했다.
1. 자기 유익을 위한 자기 사랑.
베르나르는 이런 종류의 사랑이 쉽게 정욕으로 변질된다고 지적했다.
2. 자기 유익을 위한 하나님 사랑.
이는 인간이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할 때 생겨난다.
3.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자기 사랑.
베르나르는 말하기를, 이런 방식의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이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계속해서 맛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얼마나 달콤한 분인지를 증거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하나님의 달콤함을 맛본 후에는 우리의 필요 때문에 그를 사랑하도록 우리 자신을 강요하기보다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했다.
4.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 사랑.
베르나르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사랑은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는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다.”
물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오직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진실로 따를 수 있다.
‘사랑 계명’의 사법적 적용에 관한 논의, 한철(한남대학교 법학부 명예교수)
법은 이 땅에서 인간 상호간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한다.
법의 해석 및 적용과 관련하여 이웃사랑의 목표를 잃어버린다면 공허한 논리의 유희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의 법문화나 법 집행은 법의 정신이나 근본원리는 무시하면서 법의 문자적 해석에만 집착하는 천박한 법실증주의적 태도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이웃’의 범주를 ‘이방인’들까지로 확장하셨다.
법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법에서의 사랑 계명의 역할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법과 도덕의 분리를 강조하고, 법과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사랑’에 관한 현대 기독교윤리학계의 담론 탐색, 이창호(장로회신학대학교 겸임교수)
자기사랑은 ‘아가페’(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반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가 먼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도 있다
자기 자신도 ‘동등배려’의 대상이다.
어거스틴은, '자아가 다른 피조 세계를 등지고 자기 자신 안에서 완숙을 찾으려 할 때 자기사랑은 부패하게 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참된’ 자기 사랑과 ‘부패한’ 자기 사랑을 구분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자기 사랑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아퀴나스는 사랑의 ‘질서’를 말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대상의 관점에서 선후와 질서가 있다.
원수보다 친구를 또 악한 이들보다 덕스러운 이들을 더 사랑해야 한다.
아퀴나스는 이 ‘질서’의 관점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구보다 또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기 사랑이 먼저이고, 타자에 대한 사랑은 자기사랑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흐름을 분명하게 거부하면서, 자기사랑은 죄악된 본성에 뿌리고 두고 있는 왜곡된 사랑의 형태이고,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의 사랑의 계명에 부합된다고 강조했다.
묵상
십계명의 핵심은, 1) 하나님 사랑, 2) 이웃 사랑이므로, 십계명은 = 사랑이다.
하나님의 성품 =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법 ‘십계명’은 ‘관계를 세우는 법’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서로 사랑
이스라엘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고자 하는 의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들은 애굽의 압제로 인해 오히려 ‘개입하지 말도록’ 원망하기도 하였다.
1. 십계명은 자유의 법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자유가 없었다.
애굽은 우상의 나라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신들을 파괴하셨다.
2. 십계명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제자에게도 유효하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부르셨다.
예수님은 산에서 하나님의 법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셨다.
3. 십계명의 핵심은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중요하다.
이것은 ‘인권’이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이 먼저다.
이것은 ‘예배’다.
예배가 없는 ‘인권’은 어떤가?
어떤 사람은 성경이 ‘죄책감을 유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가 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어떤 환자가 병원에 왜 MRI 장비를 들여다 놓아서, 내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하느냐고 언성을 높인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왜냐하면, 환자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빨리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이 그러하다.
십계명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우리 곁에 두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영적 질병인 죄를 조기에 발견하게 하고, 조기에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 MRI 장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좋은 것이다.
십계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길을 깨달을 수 있고, 또 그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속적 심리학은 어떤가?
세속적 심리학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하지 않는다.
우리 고통의 원인을 어떠한 ‘트라우마’로 돌리도록 만든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고백하게 만들기보다는, 회개 없이도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치료가 되는가?
거의 치료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지 않고는, 결코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사람을 기대하는 것도 인본주의적 사고다.
유토피아적 사고다.
요즘 청년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의’가 있고, ‘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세상은 전쟁터다.
세상은 악과 ‘죄’가 가득한 장소이다.
그런 곳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오류다.
그런 곳에서는 ‘생존’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감’도 커지는 것이다.
세상은 기대할 만한 곳이 아니다.
무신론자들은 ‘천국’을 내다버리고는, 세상을 ‘천국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인권, 자유, 해방 등을 외치면서, 인간의 힘으로 ‘아름다운 천국’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교회가, ‘천국’에 대해서 침묵하자,
세상이 ‘가짜 천국’을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곳에는 ‘진정한 천국’이 있을 수 없다.
죄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질지라도 ‘진정한 천국’을 이룰 수 없다.
물론, 우리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곧 천국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가지고, 그들의 이념을 실천했으나, 인간은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쉽게 부패하는 음식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도 숭배하지 말라고 했다.
그 우상에는 물질적인 우상도 있지만, 이념과 사상과 같은 정신적인 우상도 있는 것이다.
천국은 오직 ‘예수 안’에만 존재한다.
그 외에 모든 ‘세속적 천국’은 우리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가짜 환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열 가지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은 임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셨다.
그들은 우상의 나라에서 노역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자유의 나라로 옮기시고 계시다.
그 옮기는 과정에서 ‘자유의 법’을 하사하고 계시다.
십계명은 자유의 법이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섬길 때 자유가 찾아온다.
나 자신의 감정을 섬기면, 고통이 찾아온다.
우리는 나의 감정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감정은 무엇인가?
감정은 세상에 대한 해석이다.
세상을 어둡게 보는 사람은, 감정도 어둡다.
그러니 감정을 믿으면 안 된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계속 바꾸어야 한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세상은 고통을 악으로 간주하지만,
성경은 고통을 통해서 선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감정도 바뀌는 것이다.
감정에 따라 살지 말아라.
감정에 따라 살면 고통에 매몰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감정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노래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는 세상을 ‘천국’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았다.
우리는 자꾸 세상에 ‘정착’하려고 한다.
세상을 ‘천국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행이 습관이 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불행하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특징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곧 ‘우상 숭배’다.
행복을 이상화하고, 행복을 지향하고, 행복을 바라보는 것이 ‘우상숭배’다.
그러기에 이런 인생을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행복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갇히고, 자기 감정에 갇히고, 자기 삶에 갇혀서,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 바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행복하다.
왜냐하면, 나의 고난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도 환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했다.
내가 받는 고난은 너희를 위한 고난이라고.
적용 / 서론
“삶의 지침”
무신론자들도 각자 ‘삶의 지침’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에 따라 삶의 지침이 다르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이다.
< .5
.5 - .6
.6 - .7
.7 - .8
.8 - .9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