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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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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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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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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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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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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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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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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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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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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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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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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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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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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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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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또는 우리의 믿음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의 힘과 능력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12장에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언약은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대신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서 떠나라는 말씀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자식과도 같은 롯과 헤어지면서 허전해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다시한번 아브람이 볼 수 있는 모든 땅을 아브람과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뿐아니라 15장에서도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별과같이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다시한번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다시한번 많은 자손과 함께 가나안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계속해서 같은 약속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장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실 때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여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람은 별과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의 부인인 사래를 통해 자녀를 주시겠다는 그 약속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다는 것은 이스마엘을 낳으지 13년이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13년동안 아내 사래를 통해 자녀가 출산하지 않았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자녀를 출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도 인식한 시기입니다.
물론 사래의 몸 상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람의 후손은 이스마엘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시 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때 다시말해 하나님의 약속이 점점 희미해지는 그누구도 하나님의 약속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포기한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 아브람에게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못 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한번 아브람을 크게 번성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당시의 이름은 단순히 한 개인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과 인격의 표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람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제 앞으로 아브라함의 인격과 운명이 변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아브람에게 이름을 바꿔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더 신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또 때때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신앙안에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를 절대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마다 찬양을 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고 명령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할례의 범위는 가족, 종들중에 모든 남자들에게 해당되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상징으로 주신 할례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애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할례는 매우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할례를 행하면 몸에 흉이 남습니다.
할례를 행하기 이전으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평생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영원한 흉터 입니다.
그러기에 할례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이유를 묵상하게 하기 위함 입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언약의 증거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잃어 버리고 망각하는 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몸에 영구적인 언약의 증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할례는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할례는 언약의 증표이지 언약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과 후손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표징 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땅을 돌아가는 것으로 인해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습니다.
이소리를 들은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이 물려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못을 인정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걸고 그것을 처다보면 살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말 그 놋뱀을 본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놋뱀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 놋뱀을 보며 자신들의 죄와 그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지 않고 그 놋뱀이 하나님 인것처럼 놋뱀을 수백년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8:4 에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그때까지 섬겼던 놋뱀을 부셨습니다.
우리는 표징과 하나님의 약속을 구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표징은 단순히 표징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할례는 절대적인 믿음이 되었습니다.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변질이 되어 할례가 구원의 유일한 조건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의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할례가 하나님의 자녀 자격증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시약 시대에 와서 유대주의 성도들은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온전히 살아가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기에 그 서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겠다는 백성의 결심이지, 할례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증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2:29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할례는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포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선포되었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4:4 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아, 너희는 나 주가 원하는 할례를 받고, 너희 마음의 포피를 잘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처럼 이렁나서 너희를 태울 것이니, 아무도 글 수 없을 것이다.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포피, 가죽을 잘라내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10:16 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구원을 얻어준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매주 예배에 참석했다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많은 헌금을 하는것, 우리가 교회에서 이리저리 봉사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직분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성경을 많이 읽은 것 그런것이 우리를 구원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의 신앙과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이런 것들을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할례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지난주에 청년교회 겨울 수련회가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집회가 8시에 시작해 새벽 2시가 넘어 끝났습니다.
6시간동안 청년들이 한 자리에 앉아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고 기도하는데 집회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청년들이 땅이 꺼져라 뛰며 찬양을 하고 목이 터져라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청년들이 목이 터져라 기도를 하였는데 제 목만 터졌다는게 아이러니 하지만 여튼 너무나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이 시대에 이러한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막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은혜 받았다, 너무 좋았다 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저는 잘 압니다.
그거 오래 못갑니다.
그 시간을 기억하며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는 싸움이 없으면 아무리 뜨겁게 찬양하고 목이 터져라 기도한 모든 것들이 단순히 이벤트와 다를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삶이 변하지 않으면, 내 생활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정말 받아야 하는 할례는 겉으로 들어나는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새번역 빌립보서 3:2-3
하나님의 영 다시말해 성령 충만하여 예배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으며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지금의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던지 포기하지 않고 오직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허락하신 그 길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그 길가기가 버겁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힘들면 힘든대로 버거우면 버거운대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길을 한발 한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 하나님께서 힘주심을 믿으며 내게 허락하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나에게 순종하며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안에계신 성령하나님을 매순간 바라보며 의지하며 물으며 살아가는 것밖엔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순간에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을 의식하며 바라보며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게 살아가는 온전한 성도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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