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70 views
Notes
Transcript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299페이지에 있습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수요기도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저는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참 많이 즐겨봤었습니다.
때론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동물들의 행동방식을 보면 사람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동물들은 싸움을 하거나 짝을 유혹할 때 몸집을 부풀려서 크게 만듭니다.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강함을 우대하는 세상이기에 어떻게든 강하려 하고, 강하게 보이려 합니다.
그래야 남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남들 위에 자리할 수 있습니다.
잘난 게 없으면 잘난 체라도 해야하고,
아는 게 없으면 아는 체라도 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몸에 문신이라도 새겨서 위협을 주어야 합니다.
강함의 실제적인 유익을 잘 알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약함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든 연약함을 피하거나 부인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연약함을 곧 패배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은 우리 인간들이 좋아하는 단어나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힘과 기술과 탁월한 재능에 대해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와는 달리 그분은 우리의 똑똑함과 미모와 남다른 능력에 크게 인상을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눈여겨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숨기고 없애고 싶은 약점을 찾으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 관심을 두시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연약함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연약함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바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위대한 역설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과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첫째, 연약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어떤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연약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연약함은 심각한 질병이나 장애 등 신체적인 것이거나,
성격이나 성장 과정에서 받은 깊은 상처와 같은 정서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때론 부모나 배우자 같은 인간관계에 관련된 것이거나, 선천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연약함이 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고통을 주며, 나의 삶과 사역을 제한합니다.
그러나 당장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한계와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도 치명적인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7절에서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바울은 밝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라리아’, 또는 ‘간질’이라고도 하며, 심각한 ‘시각 장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죄책감이나 우울증, 또는 언어 장애나 계속적인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바울에게 이 연약함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웠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울을 계속해서 ‘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시”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예리하고 뾰족한 나뭇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예리한 나뭇조각이 몸에 계속 박혀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요?
이 육체의 가시에 대한 바울의 불쾌감을, 바울은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의 연약함 그 자체는, 바울을 해치고 어렵게 만드는 사탄의 하수인,
사탄의 계락과도 같았습니다.
만약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바울의 생각이 여기에만 고정되어 있었다면,
그는 평생 원망하며 고통 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연약함의 창조자, 근원자로부터 그 목적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이런 가시를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본문의 7절 중간을 보면,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이 나옵니다.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가시를 주신 분이 가장 선하시고, 자기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 그것은 형벌이 아닌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 특이한 선물의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7절의 앞 부분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라며
가시의 목적을 말한 바울은 뒤에서 또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며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아마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발견은 너무도 중요한 진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앞에서 설명하고, 뒤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보통 사람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놀라운 영적 체험을
여러 번 했던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4절을 보면, 그는 낙원에 이끌려 가서
(4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엄청난 환상과 계시와 영적 경험들로 인해,
그는 영적 교만에 빠질 위험에 직면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있는 바울을 위험에서 건지시기 위해
바울에게 가시를 주심으로 그 위기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실 교만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훌륭한 목회자 중에도 교만하여 말로가 참으로 안타깝게 끝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쓰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멀리서 성공한 사람들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얼마나 교만에 잘 빠져듭니까?
남들보다 쪼금 성경을 더 알고, 쪼금 더 기도하고, 쪼금 더 도덕적이라고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를 높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합니다.
타이타닉호를 기억하시나요?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큰 소리와 함께 출범한 그 배는
대서양을 떠도는 한 빙하에 부딪혀 1,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침몰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교만입니다.
교만 때문에 구명정이나 조끼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고,
거듭되는 경고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파선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계속 하나님께 의지하며 겸손히 그분의 인도를 따르기 원하십니다.
연약함을 역설적으로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연약함이 여러분을 괴롭힐 때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그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감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가시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성자라도 고통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견디기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를 제거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본문의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은 세 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드려진 가벼운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식사 기도처럼 했는지, 안했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차원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세 번 장시간에 걸쳐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듣기 원했던 그런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9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좋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거절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 그 가시를 지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연약함 가운데서도 바울에 대한 은혜가 충분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를 제거하심으로써가 아니라, 더 큰 은혜를 더하심으로써
연약함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가시의 연약함에 의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충만한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충족한 은혜의 약속을 주시면서, 그 은혜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십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온전해집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분의 능력이 가장 잘 드러납니다.
바울이 10절 말미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는 역설은 진리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넘칠 때, 하나님의 능력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능력은 밝게 빛납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약하고 부족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하기 때문에 능력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40세가 되어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을 때,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최강대국 애굽의 왕자였고, 용사였으며,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하나님은 쓰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40년을 더 기다려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를 쓰셨습니다.
어릴 때, 제가 체하면 어머니는 손으로 배를 살살 만져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힘 좀 빼라. 힘주면 효험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힘 좀 빼라. 그렇게 힘을 주면 내 능력과 은혜를 부어줄 수가 없단다.”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재능과 은사와 학벌을 의지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어떤 목사님의 설교제목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힘들땐 힘을 내야, 짝대기 쫙~,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힘과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겠으며, 우리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연약함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셋째, 연약함은 하나님의 자랑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는 자랑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고생고생해서 자식을 하버드 대학에 보냈습니다.
별로 넉넉지도 않은 집안인데 전액 장학금을 받고 보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분은 늘 자식 얘기를 하기 좋아했고, 자기 옷에 하버드 배지를 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은 담임목사님께도 그 배지를 주시면서,
“목사님, 양이 하버드에 다니면 목사님도 거기 다니시는 것과 같습니다” 라며
그 배지를 달고 다니기를 원했습니다.
그 논리는 수긍할 수 없지만,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만약 그 자녀가 대학을 가지 못하고,
사고를 쳐서 교도소에 갔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 집사님이 자식들의 이야기를 그처럼 많이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연약함에 대해 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할 수 만 있다면, 우리의 연약함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함을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며,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9절 하반부부터 10절까지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여기에 자신의 약점을 넣어 보십시오.
‘나는 나의 언어 장애, 신체적 결함에 대해, 정서적 문제에 대해, 부족한 학력에 대해,
실패와 실수에 대해 자랑하리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힘들 것입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그렇게 자랑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는 연약함의 유익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연약함은 더 이상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할 약점이 아니라
자랑해야 할 강점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첫 번째, 연약함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부인하거나 무시하거나 숨기거나 위장하거나 병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연약함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연약함이 있는데도 없는 척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두 번째, 연약함에 대해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그분의 능력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기도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태도로 그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감사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뒤따라야 진정한 감사입니다.
세 번째, 자신의 연약함을 적절한 상황에서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덕을 세우는 지혜와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연약함을 잘 나누면,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 큰 격려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교회 중에는 이런 나눔 문화가 잘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곳에 가면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끼리 소그룹을 묶어준다고 합니다.
이혼을 두 번이나 했던 집사님이 어렵게 자신의 아픔을 나누었는데
‘나는 세 번째에요. 나는 네 번째에요. 나는 벌써 다섯 번째 준비중이에요.’
알고보니 그 소그룹은 이혼한 사람들끼리 묶어놓은 나눔모임이었습니다.
물론 남의 아픔을 쉽게 생각할 수 없지만, 그곳에 가면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구나’ 이런 동질감과 동시에,
‘이렇게 힘든 사람도 견디며 살고 있는데... 나도 할 수 있구나.’
이런 긍정적인 생각과 힘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약함을 잘 나누게 되면, 덕을 세우고,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연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성숙해갈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적게 말하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이 높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은 그분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할 때, 우
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라는 책에서 고린도후서 12장 9~10절을 이렇게 의역합니다.
“내가 장애에 집착하는 것을 그만두고 연약함이라는 선물에 감사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약함 속으로 쇄도해 들어왔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한계들을 기꺼이 뚫고 나아갑니다. 나를 낮추는 이 약점들, 곧 모욕, 재난, 적대행위, 불운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나는 그저 그리스도에게 그런 것들을 넘겨 드릴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약하면 약할수록 더 강하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이것을 나눌 때,
그리고 능력있는 주님께 연약함을 맡길 때,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약한 것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그분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함의 강함이라는 이 위대한 역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 연약함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닉 부이치치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팔 다리가 없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여러번 자살 시도를 했던 닉 부이치치는 15살이 되던 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인생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을 후, 그는 팔 다리가 없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닉 부이치치의 약한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작곡가, 가수, 배우, 베스트셀러 작가, 인기 강사로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팔다리가 없는 한 사람을 들어, 이처럼 위대하게 쓰십니다.
그처럼 연약한 사람을, 이렇게 크게 사용하시는데, 왜 우리는 못쓰시겠습니까?
사실 닉 부이치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이지선 자매도 놀랍게 쓰고 계십니다.
아드레날린 충격 증후군으로 극심한 공황 장애의 고통을 겪고 있는 릭 워렌 목사도 쓰십니다.
학력이 부족하고, 문법이 엉망인 무디같은 사람을,
수백만의 영혼을 주님께 이끄는 위대한 전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약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함을 인정하며 주님만을 의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주 앞에 겸손히 자신을 드리며 기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함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높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약할 때가 가장 좋은 때입니다.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 됩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의 능력이 완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사람들은 우리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찬양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 찬양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1. 나의 연약함을 통해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도록
2.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만 영광받으시도록
3.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고, 이해함으로 서로에게 덕이 되는 아름다운 우리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이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고, 각자 주기도문으로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안수 기도를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기도방석으로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 한번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