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리부동(表裏不同)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7 views
Notes
Transcript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사도행전 23장 1~11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228페이지에 있습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성전에 나아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로마로 이송되는 과정 중에 있던 사건입니다.
바울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황급히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에 끌려가기 전에 그에게 죄목을 확실히 뒤짚어 씌우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바울과 산헤드린 공회로 모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비교하며
우리가 정말 따라가야 할 신앙의 모델이 어디에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였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여기에서 ‘주목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테니조’‘노려보다’라고 번역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장면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뜻과는 조금 다릅니다.
1)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연민의 정을 가지고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바라볼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2) 또한 루스다라에서 사도 바울이, 역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고자
바라볼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9절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즉, 본문 1절에서 사도바울이 공회를 주목한 것은, 적대 감정에 의한 기 싸움에서
눌리지 않기 위해 바라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연민과 선대함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사도바울 앞에 모인 공회가 어떤 존재입니까?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던 유대인들의 배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왜 모였습니까? 사건의 정확한 전말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까?
바르고 공의로운 재판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도 바울을 정죄하고 죽이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 적대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산헤드린 공회를 바라보면서 던진 사도 바울의 첫 말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사도행전 23장 1절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그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해 모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형제로 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길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상대가 원수대하듯 나를 대할지라도 끝까지 선대해야 합니다.
상대가 우리를 원수로 대한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1) 이삭은 아비멜렉과 그랄의 목자들이 끝없이 자신을 괴롭혔지만, 끝까지 양보했습니다.
2)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사울을 살려주고 선대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원수들을 선대한 이삭이나 다윗이나 바울이 어리석게 느껴집니까?
세상의 관념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 그들은 어리석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누가복음 6장 35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본문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자기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3장 1절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하나님께 백성 노릇 하였노라’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본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외형만 그럴듯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직분을 받았다고, 특별한 사역을 감당한다고
자기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직분, 많은 사역을 감당한다 할지라도
양심이 죽어 있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교회의 거룩한 직분을 받은 후에도 양심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의 양심이 똑같다면,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이렇게 양심의 변화가 전혀 없고,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더러운 양심을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을 가리켜
사도바울은 ‘회칠함 담’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여러분, ‘회칠한 담’이 무엇입니까?
튼튼하지 못한 기초 위에 세운 흙별돌 담을, 단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겉에 회를 바른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던 말과
비슷한 의미의 표현입니다.
무덤에 회를 칠하여 아름답게 단장한다고 그 안에서 악취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로 대제사장 아나니아겉과 속이 다른 종교인이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아직 바울의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극한 감정에 못이겨 비인격적으로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는 유대교와 자신의 기득권을 뒤흔드는
바울과 그 일행,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하면 무너뜨릴 수 있을까
항상 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치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모든 정사를 내팽겨두고
다윗만 쫓았던 것처럼, 그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 사도가 로마 군인에게 잡혀 로마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바울의 죄를 묻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대제사장으로서 산헤드린 공의회를 진행하면서
바울의 죄목을 어떻게든 무겁게 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악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여전히 대제사장이라는 옷을 입고
거룩한 체하며 사람들 앞에 율법을 들먹이는 모습을 보자니
사도바울 눈에는 더러운 것을 가리기 위해 겉치장한 ‘회칠한 담’처럼 보였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겉으로만 드러나는 직분과 직책에 매여
양심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겉과 속이 같은, 하나님의 양심에 따라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그에 합당한 삶과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바울은 본문 3절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 ‘회칠한 담’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3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그런데 4절을 보면, 공회원들은 같은 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옹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일까요?
결과적으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유대 전쟁 초기에, 민중 봉기로 인해
민중들에게 심판을 받아 처형당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이 백성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지도해야하는 거룩한 직분이고, 모든 면에서 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중 봉기가 시작되자 백성들이 가장 먼저 죽이고자 달려들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권력을 탐하고, 겉과 속이 다른 악한 사람이었는지
입증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사도바울의 책망을 듣고 돌이켰다면,
같은 산헤드린 회원들이 그의 잘못을 바르게 지적하고 충고 했더라면,
그가 아첨하는 말을 분별하여 스스로 깨닫고 돌이켰더라면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양심에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한 질책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가장 온유했던 모세도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의 모습을 보면, 서슴없이 책망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책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아가 책망했던 나단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다윗 왕도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처럼 아첨하는 말로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도록 책망과 권면의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바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본문 5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대제사장인줄 모르고 비방한 발언에 대해서
즉각 사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5절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이런 사도바울의 모습 속에서 그의 평소 생활 습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실수나 오류가 인정되면 시간을 끌거나 변명하지 않고
즉시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완벽해야만 성도의 자질을 갖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실수와 오류가 인정되면 즉시로 시정하고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 또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번 주에 아내와 약간 말다툼을 했는데, 얘기를 할까요? 말까요?
사실은 이번 주에 이안이 응가를 치우다가 응가 안에서 장난감을 발견했습니다.
촛불놀이 장난감 중에 초가 응가랑 같이 묻어서 나온 것입니다.
요즘 이안이가 자꾸 기저귀 안에 손을 넣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이안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 넣은 줄 알고
철없이 신기해서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안이 응가에서 뭐가 나왔는지 알아? 한번 봐봐~”
저는 아내가 신기한 반응을 하면서 같이 웃어 넘길 줄 알았는데
아내는 보자마자 저에게 화를 내면서 왜 항상 일을 그렇게 처리하냐면서
기저귀 갈 때 초가 들어가는 것을 못봤냐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저는 왜 갑자기 제 탓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당황한 나머지
무조건 제가 안했다고, 내가 기저귀 갈 때 장난감이 들어갔는지
이안이가 장난치다가 스스로 넣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문득 생각해보니 제가 몇시간 전에 기저귀를 갈 때 침대 위에서 갈았었는데,
그 때 침대 위에 촛불놀이 장난감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같이 화를 낸 상태여서 자존심이 상해서
무조건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내가 대충대충 기저귀를 갈았는지 아느냐며
같이 화를 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사건이 기억나면서 스스로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말하는 중에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깨달았음에도 감정에 치우져
곧바로 인정하지 못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의 약점 중에 하나가 실수를 바로 인정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부끄러움이 많고, 자존심이 강해서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또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적절한 타이밍과 상황을 항상 살피면서 사과할 기회를 엿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적당한 기회를 잡지 못하면 시간이 흘러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 잘못을 그 자리에서 바로 지적하면, 곧바로 인정하는 것이 자존심상해
계속해서 변명거리를 찾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많이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감정에 근거하지 않고,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모두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감정과 의지를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을 놓고 더 기도하고 훈련하는 노력이 있을 때
우리가 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는 모습일 줄 믿습니다.
본문 6~9절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내용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공회원들간의 신학적 차이를 이용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장면입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서로 신학적 입장이 많이 다릅니다.
바리새파는 부활, 기적, 천사, 영의 존재를 믿는 입장이었다면
사두개파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것은 부정하는 현실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였던 바울이, 자신은 부활을 전한 까닭에 심문을 받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복음의 핵심인 부활을 증거하면서, 교묘하게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옹호하게 함여
사두개파와 신학적 논쟁을 부추기게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6~9절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바울의 순간적 기지가 돋보이는 장면인데,
한편으로는 해서는 안 될 사악한 세상의 지혜를 썼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비둘기같은 순결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순결이 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리 가운데로 보냄 받은 양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순결과 동시에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없는 순결은 곧 어리석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뱀의 지혜라고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했던 선악과 사건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혜라기보다 간교함입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사단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는 방어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원수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고, 적을 무력화시키는 지혜입니다.
다시말해 임박한 위험을 인식하고, 그것을 피할 줄 아는 뱀의 민첩한 본능같이,
위험을 인식할 줄 아는 분별력과 그것을 피하는 지혜입니다.
순수와 순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잔 두 개가 있습니다.
한 잔에는 깨끗한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한 잔에는 비워져 있습니다.
전자는 ‘순수’라고 말하고, 후자는 ‘순진’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순수’한 잔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깨끗함 그 자체가 순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순진’은 비어 있으므로 그 안에 순수처럼 깨끗한 물이 담길 수도 있고,
더러운 물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순수’의 사전적 의미는 ‘잡것이 섞임이 없는 것’,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진’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꾸밈이 없고 순박하고 참되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어수룩하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진하면 안됩니다. 순수해야 합니다.
지혜없는 순결은 곧 순진한 것을 말합니다.
분별력이 없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지혜가 없어서
세상에 있는 악한 것들까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신앙의 순수함이 삶 가운데 나타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지혜를 가장 빨리 얻는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특별히 올 한해 마땅히 행할바를 가르치는 교회가 되자고 표어를 선포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 성경을 읽고,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깨달아서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11절입니다.
고난의 밤에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 오십니다.
11절에 보면,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여기서 ‘그날 밤’이란 언제를 말합니까?
파티가 있던 날 밤이 아닙니다. 즐거웠거나 재미있던 날 밤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두들겨 맞다가
로마의 천부장으로 인해 겨우 목숨만 거졌던 날 다음날 밤입니다.
산헤드린에서 변론 끝에 유대인들에 의해 찢김을 당할 위기에서 건짐받은 날 밤입니다.
또 그날 밤은 40인의 암살단이 바울을 암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맹세하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그날 밤’은 외롭고, 힘들고, 너무 지쳐서
두려움이 엄습하는 위기의 밤이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가장 필요한 때였습니다.
비록 그의 가슴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식지는 않았지만
신체적으로 겪은 많은 고통으로 인해 좌절할 수 있는 때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그 때에 주님은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격려하고 위로하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격려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주님의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로 갈 때까지
고난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고난의 밤, 위기의 밤에 윌에게 찾아오셔서
격려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고난의 밤은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의 사별, 부모나 자녀의 죽음, 건강의 상실, 실직, 사업의 실패 등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에게 고난의 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의 밤이 찾아오면 어떤 사람은 낙심하거나 좌절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러한 고난의 밤에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이 찾아왔다고 해서 주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신앙은 어쩌면 마음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다기 보다
상황과 환경, 형편과 유익에 따라 신앙생활 했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표리부동한 종교인의 모습을 버리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고
고난의 밤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의지해야 될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군산삼학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혹시 고난의 밤을 맞으셨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위로의 말씀이 들려올 것입니다.
성경일 읽어 보십시오.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의 밤이 더 깊이 찾아올수록, 주님의 음성은 더 또렷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4~5절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부패하고 타락한 사단권세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고,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을 지키며, 온갖 위기를 극복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처럼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된 모습으로 본을 보이며 살아간다면,
신앙도 지키며, 온갖 위기도 잘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함에도
겉과 속이 다른 종교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겉과 속이 일치된 참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비둘기같이 순결하며 뱀같이 지혜로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불의한 재판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모습을 본받아,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표리부동안 종교인의 모습을 버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1. 직분과 직책, 사역의 많고 적음의 겉모습을 벗어버리고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도록
2. 겉과 속이 다른 종교지도자들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지혜로운 순결함으로 승리하도록
3. 고난의 위기 속에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도록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