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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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2장 1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241페이지에 있습니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주일 오후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우리가 오후예배 때마다 로마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서론, 본론, 결론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1장 1절부터 17절까지가 서론이고,
1장 18절부터 15장 13절까지가 본론이며,
15장 14절부터 16장 27절 마지막 절까지가 본론입니다.
다시 본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5가지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두 번째 질문,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세 번째 질문,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네 번째 질문, 왜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린 것인가?
다섯 번째 질문,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첫 번째 질문, 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다시 말해, 왜 구원이 필요한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앞의 1장의 내용은 이방인 죄를 지적했습니다.
이방인의 죄에 대해서 자신들은 율법을 가진 선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이방인들이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에서 32절까지의 내용에서 말한 것처럼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상태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유대인에게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을 정죄하는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너희들도 이방인들과 별개로 따로 변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남을 판단하는 것”
곧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율법을 말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남을 판단하는 그 율법으로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은
유대인들의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났던 죄악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이방인에게만 적용시키고
자신들에게는 적용시키지 않았습니다.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결국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그들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것은 곧 자연과 양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더 믿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선민입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을 지킬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받았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았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이라는 사실로 구원을 얻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해졌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도 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신약의 유대인들도 율법의 내용은 알았지만,
율법이 가르쳐주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실천하지 못한 채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결국 율법 자체가 구원이 되어버린 율법주의가 곧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남을 판단했던 율법으로 자기 스스로를 정죄했고,
이방인과 똑같은 우상숭배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
남의 잘못을 판단하면서도 자신은 위선적으로 같은 일을 계속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지만, 자신들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계속 율법을 어기면서도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교만함으로 남을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은 공의를 말합니다. 죄를 받았으면 죄의 대가를 치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유대인이 이방인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부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한 심판자로서,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이 있으면서 죄를 짓는 유대인은 율법의 기준에 따라,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인 양심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 곧 말씀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1~2절과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지만, 그 율법으로 자신도 판단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심판은 공평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그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죄를 짓고도 심판받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들키지 않거나, 뇌물을 사용해 재판 결과가 잘못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사랑하셔서 회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징계하시며 돌이키시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징계하시냐며 오히려 하나님께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 회개하도록 인도하셨는데, 그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했을까요?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풍성함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멸시하다” 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타프로네오”라는 말로
“카타” 아래로, “프로네오” 이해하다, 즉 ‘아래로 이해하다’ 합쳐서
“경멸하다”, “무시하다” 쉽게 말해, 낮게 생각한다. 깔본다. 이런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깔본 것입니다.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니깐 그들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징계에 불만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아서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많이 지었음에도, 굳이 하나님이 노력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아도
당연히 얻어야 될 구원인데, 징계가 내려오니깐, 불만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자신들이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 그들이 지금의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데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당장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결코 죄를 심판하실 분이 아니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심판 날에 임할 진노를 계속 쌓고 있는 것입니다.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이스라엘은 아주 고집 불통입니다.
하나님이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은혜도 베풀어주시고,
깨달을 수 있도록 징계도 주시며, 가르쳐 주셨는데,
끝까지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도, 겉모습만 번지르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났으면서도
아직도 자신들이 선민이라면서 자신들만 구원받는다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 형벌을 쌓아놓는 일입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그 말씀이 말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 이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면,
우리는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나의 구원의 확신만 믿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최후의 심판 날, 하나님은 각 사라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날에 일어날 중요한 3가지를 말해줍니다.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첫째,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인류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개별적인 심판입니다.
“보응하시되”
보응이란, 빚을 되갚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로 인해서 지게 된 빚을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행위란, 단순히 육체적 행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모든 죄악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저버린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각 사람에게 그대로 갚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창조주 하나님은 마땅히 피조물에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분을 높이지 않고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죄악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빚을 졌고, 그 빚은 심판대 위에서
그대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둘째,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의인 아니면 악인으로 구별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의인입니다.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그러나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안히고 불의를 따르는 자”는 악인입니다.
의인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는 것을 구합니다.
악인은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면서 악을 행합니다.
의인 아니면 악인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 영생 곧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인데
7절에서 “참고 선을 행하여”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참고”라는 단어는 헬라어 “휘포모넨”으로
‘어떤 시험이나 훈련을 견뎌내어 남아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여’, 보통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깐, 어떤 시험이나 훈련을 견뎌내면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끝까지 유지하여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수만은 고난과 역경을 만납니다.
믿음이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견뎌내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만물의 창조주, 우리의 구원자 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과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붙잡게 됩니다.
그러나 힘들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없다하면서 떠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사실은 성경에서 중간은 없다고 말합니다.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곧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세상을, 물질을 더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인이고, 마지막 날에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의인들과 악인들에게 영원한 운명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의인들의 영원한 운명은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은 의인들에게는 영원히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영원한 운명은 진노와 분노입니다.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악인들은 영원히 환난과 곤고, 즉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사실은 순서입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유대인은 복음에도 우선권이 주어졌으므로 심판에서도 우선 순위가 고려됩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진노에 말씀을 나누면서,
알고 지은 죄는 가중처벌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심판이 임하는 것은 그만큼 율법과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음에도, 믿지 않는 것은 더 괴심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열 계’, ‘보일 시’ 열어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단어를 이단 교주들이 내가 하나님께 말씀을 계시받았다.
이렇게 잘못 사용하다보니, 특별한 비밀을 비유로 감추어둔 말씀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특별한 사람만 이해하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열어서 보여준 책이 바로 계시의 책, 성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계시가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신 일반계시와, 특별한 사람에게 보여주신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로마서 1장에서 말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던 자연과 양심입니다.
그리고 특별계시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성경이 아니라 율법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유대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알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말씀대로 섬기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방법을 먼저 일러 주셨는데,
그렇게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중 처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는 각 사람” 곧 의인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 곧 구원, 영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 또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결국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혈통적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들에게 그 구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계속해서 행위를 통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1절에 와서는 갑자기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선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선한 마음만 가질 수 있습니까?
선한 마음이 있으면, 선한 행동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음을 가지면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악한 마음을 가지면서, 선한 행동,
더 엄밀히 말하면 선해보이는 행동은 할 수 있습니다.
10절까지의 말씀은 믿음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다시 되짚어서 말합니다.
혹시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의 삶을 사는 척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 중심을 보십니다.
선한 동기로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다시 한번 정확히 짚어주는 것입니다.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 없이 범죄한 자” 곧 이방인은
“율법 없이” 곧 양심으로 망하고
“율법 있고 범죄한 자” 곧 유대인, 믿는 우리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지키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특별 대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행위에 따라 공평하게 심판하십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각각 하나님께 받은 율법과 양심의 법을
그 법에 순종했는지, 불순종했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도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살았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게 이방인보다 더욱 큰 책임,
더욱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는 양심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양심대로 산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온전히 양심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 행위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을 듣는 자” 여기에서 “듣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크로아테스”는
일반적으로 ‘듣는 사람’ 보다 더 전문적인 청취자를 말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듣는 자’는 회당에서 읽혀지는 율법을 듣거나
가정에서 쉐마 교육을 통해 의무적인 율법을 듣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듣고, 특별하게 율법 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의인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행해야 의인이라고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매주 예배를 듣고, 말씀을 잘 가르쳐주시는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대로 적용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교사들이 작년부터 주일마다 오후예배 마치고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2시간씩 성경강좌를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듣고, 배워도,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해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신앙생활, 예배, 기도, 성경공부, 모든 것이
말씀대로 직접 실천해보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본성으로 즉 양심에 따라 율법을 지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자기’라는 것은 양심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곧 율법이 되어서
그것을 잘 지키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을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심판의 기준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그 결과는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양심,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높은 양심의 기준에 어떤 실수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양심이란 ‘함께 아는 지식’입니다.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함께 알고 있는 무형의 지식’ 양심이 서로를 고발하고,
그 고발에 대해서 변명하고,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들을 대신해서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심판을 자신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된 우리가 회개하시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그 인자하심이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는 지금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에게 먼저 그 심판이 임했던 것처럼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구세주로 영접한 우리들도
그에 대한 책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미 의롭다 칭함받은 우리들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그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며, 받은 구원을 더 확실하게 세울 수 있도록
말씀대로 실천하며,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여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마지막 날에
의롭다 칭함받는 것 뿐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주님께 칭찬받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기도
1.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정죄하지 않고, 겸손하게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2.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죄악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이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3. 먼저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을 떠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고, 제가 축도로 예배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 한번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매일 죄를 짓는 추악한 죄인임을 보았습니다.
나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한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무지한 죄인임을 느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에도,
여전히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만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하오니, 다시 돌이켜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낼 힘과 지혜, 능력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우리 안에 지금도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의지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여기 모인 군산삼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머리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