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강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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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15장 1~3절까지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260페이지에 있습니다.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주일 오후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 마땅히 해야할 도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우리가 믿음이 강한 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사도바울은 자신을 포함시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가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강한 사람입니까?
“목사님, 저는 믿음이 약해요.”
그런데 어떻게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사실 오후예배라는 시간이 믿음이 없는 신앙인에게는 쉽지 않은 자리입니다.
다들 예배마치면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식사교제도 참여하지 않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요즘 현대 신앙인들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라고 모이기를 꺼려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 식사교제에 참여하시고,
오전예배를 드렸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갈급하여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분명 믿음이 강한 사람임에 틀림 없을 것입니다.
물론, 다들 믿음이 강하셔서, 겸손하기 때문에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 모두가 지금 사도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믿음의 강한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에게, 그 힘이 주어진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단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강함’이란 말은, 이미 상대적으로 ‘약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강하다는 뜻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 ‘자유함’에 이른 사람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사람, 천국의 영생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너무 좋은 의미이지만,
약한 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상대적으로
먼저 믿은 사람들, 먼저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 먼저 영생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강함이란, 상대적으로 먼저 주어진 특권, 기득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단지 구원받은 기쁨을 누리면서,
받은 은혜의 간증을 나누고, 복음을 전한 것 뿐이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기득권이나 특권의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기득권이든 사람은 그것을 보면, 확보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득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학연, 지연, 인연 등 수많은 기득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류 대학의 입시과정에서도 부정 사건이 심심치않게 터집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유명 인사의 결혼식이 붐비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있는 정치인이 출판 기념회를 하면, 책의 내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인사하고, 서로를 드러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 기득권을 쟁취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요즘 가장 핫한 드라마 중에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삼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여론 때문에 분위기가 뜨겁습니다.
그 드라마에서도 결국 재벌가 집안들은 절대 서민들과 어울리지 않고,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기업이 성장하고, 자신들의 부를 유지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돈과 명예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교제권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일단 어느 정도의 기득권을 확보해 두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너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번 그 맛을 보게 되면, 그러한 특권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더 견고하고 방대한 기득권을 얻기 위해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강함, 곧 믿음의 기득권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강함은 철저히 더 약한 이들을 섬기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강함, 우리의 믿음은 누가 주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신 것이
믿음이 약한 자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판단하여, 자기 자랑을 삼으라고 주신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하면서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그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믿음이 강한 자들을 선별하여, 교회에서 특별히 주는 것이 바로 직분입니다.
직분이란 것이 꼭 믿음이 강한 순서대로 주어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직분에 책임을 주는 이유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는 직분, 계급이 높을수록 위에 군림하고, 지시하고,
대접을 받으며 특권을 누립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직분이 높아질수록 더 낮은자세로 섬기고, 봉사하고, 대접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가장 아래 목회자들이 모든 성도님들을 섬기고,
장로님이 권사님을 섬기고, 권사님이 집사님을 섬기고, 집사님이 권찰님을 섬기고,
권찰님이 성도님을 섬기고, 성도님이 새신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믿음이 강한 우리가
아직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물들의 생존 방식이 무엇입니까?
적자 생존, 약육 강식입니다.
동물들은 약한 동물의 약점을 공격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동물들의 그런 방식을 두고, 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존 방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여 도우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강한 자는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게 만드는 차이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믿음이 강하다고 강한체 하며, 믿음이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하등한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군산삼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정말 강하고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군림하셨나요? 남을 판단하셨나요? 자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철저히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기되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더욱 섬기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약한 자들을 위해 쓰셨습니다.
능력도, 생명도 죄인들과 약한 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또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사도행전 20장 35절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자기 말대로 강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었고, 삼층천의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능력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성도들 위에 군림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 역시 주님처럼 철저히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강하게 하신 이유가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하기 위함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적으로, 영적으로 강하게 하셨다면
그 이유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기득권, 특권의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이 그러했듯이 주님을 닮아갑시다.
강함을 자랑이나 판단, 군림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섬김과 봉사의 기회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졌으나 누리지 아니하고, 약한 이들을 찾아가 섬기는 일,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오늘 본문의 3절은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하여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시편 69편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바울은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을 향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지셨다고 말합니다.
사실 시편 69편의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표현했던 고백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는지, 그 열정이 자신을 삼키고,
하나님을 향한 비난이 모두 자신에게 쏟아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이런 경험담을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던지,
새벽예배, 수요예배, 철야예배, 각종 집회, 모임을 빠지지 않고 참석하다가
남편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남편이 볼 때마다 하나님 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과하지 않나.
잘못된 열정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고, 하나님이 욕을 먹다니...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컸으면
저렇게 남편에게 시달리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내심 마음속으로 그 믿음을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지금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면서
자신의 거룩한 열정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시편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약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고,
그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비난이 모두 자신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을 때에도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2장 16~17절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수님께서 주의 전을 너무 사모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화를 참을 수 없어서 상을 엎고,
그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예수님을 사로잡아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강한 자였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로서, 약한 자들을 마땅히 섬겨야 하는 도리에 충실했습니다.
해야하는 책임이기 때문에 한 정도가 아니라,
약한 자를 섬기기 위한 열정이 자신을 삼켜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약한 자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창녀, 간음한 여인, 죄인들, 문둥병자, 눈먼 자, 거지, 세리...
세상 사람들이 멀리하는 연약한 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열정을 닮아야 될 줄 믿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매우 바쁘게 공생애 사역을 소화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라사 지역을 가시기 전에 이미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쳐주셨고,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침상에 들려 누운채로 왔던 중풍병자도 고쳐주시고,
혈루증 걸린 여인과 소경들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역을 소화하시고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역으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로 가는 중 풍랑이 일어서 그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그렇게 풍랑을 지나서 도착한 거라사 지방.
그곳에서 예수님은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십니다.
마가복음 5장 1~20절까지의 내용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마가복음 5장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리 바다 맞은편으로 건너가셔서
아직 마치지 못한 사역들을 다시 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역에 가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군대 귀신 들린 자 한 사람을 고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시간이 많은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년 뿐이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은 정말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2천년 구약 역사의 모든 예언을 이루어 내야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1분 1초가 아깝게 움직이는 스케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사역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었고,
그 계획의 완성이 곧 모든 인류의 구원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쉴 수 없으셨고, 항상 바쁘셨고,
그럼에도 항상 하나님과의 긴밀한 끈을 놓지 않으시려고 매순간 기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거라사 지역을 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은 자신만 고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실 호수입니다.
그 당시에는 지도가 발달하지 않아서 직접 반대편을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바다처럼 보였기 때문에 바다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호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하셨던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굳이 거라사 지역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러 가야 했다면,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여러 사역을 병행 하시면서
거라사 지역을 들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성비 높은 사역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곧장 바다를 가로질러 거라사 지역으로 향하셨습니다.
이미 풍랑이 일 것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에게 한 영혼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 강한 자의 열정입니다.
세상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찾아옵니다.
강한 자는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약한 자의 사정을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전도와 선교의 차이를 아시나요?
같은 것 같지만, 신학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전도는 같은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다른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면 전도,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면 선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나라에 살고있지만, 사실 같은 문화권은 아닙니다.
여러분, 요즘 애들과 대화가 잘 통하십니까?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제 거의 다 아시죠? 요즘은 이런말 하면 옛날사람이라고 합니다.
제가 딱 여기까지인데요. 저도 옛날사람입니다.
오늘 치킨 쌉가능? 완전 가능하냐고 묻는겁니다.
뇌절~ 무슨 말일까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서 뇌를 질리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1절, 2절, 3절, 명절에 큰 절, 뇌절... 이렇게 해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뇌가 절절거리도록 아프니깐 그만해라.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왜 이런말을 쓰는지 이해가 안되지요? 저도 안됩니다.
왜 이해가 안될까요? 다른 문화권에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라는 뜻을 검색해보면,
그 구성원이 함께 누리는 가치, 양식, 표현체계 등을 말합니다.
같은 생각, 같은 양식, 같은 표현체계들을 공유하면, 같은 문화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세대와 생각이 다르고, 양식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래서 요즘 세대를 MZ세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MZ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들만의 문화가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 저녁 축구모임이 있으면
그날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무조건 축구를 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만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로 들어가서
그들과 어울리면서 복음을 전하면 축구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운동이나 취미활동 등으로 같이 교제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그때는 전도라고 하지 않고, 선교라고 많이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르신들이 청년이나 청소년들에게 다가갈 때는
내가 MZ선교를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 청소년부 교사들은 모두 MZ선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교하는 마음으로 귀신들린 한 영혼을 위해 거라사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거라사 지방은 이방인의 땅이고, 로마인들이 살았습니다.
그곳은 특별히 돼지를 많이 키우는 지방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귀신을 쫓을 때 돼지 2천마리에 넣어서 바다에 던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레위기 율법에 돼새김질하지 않는 짐승은 먹지 말라는 법 때문에
돼지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마가복음 5장 2절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심지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시체 만지는 것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온다는 것은
무덤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계속 무덤에 있었습니다.
시체를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시체와 같이 살고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이신 예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뼈속까지 피하고 싶은
그런 곳에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창조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그분께서
낮고 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심지어 태어날 곳도 마땅치 않아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그분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낮고 천한 모습,
부족하고 연얀한 존재를 이해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고난 중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친히 내려 오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닮아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너무 힘이 들어서 ‘내가 다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 불 붙는 것같이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뿐입니까?
모세와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책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지워주기를 구하면서까지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바꿔서라도 한 영혼을 구했다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영혼을 향한 불타는 마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열정이 가득한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안된다고 말할 때에도, 사랑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가 말기 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도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포기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부모로서 할만큼 했으니, 이제 떠나 보내도 된다고 말하며 위로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숨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귀신들린 사람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마가복음 5장 1~20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더러운 귀신이 들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 여기는 무덤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쇠고랑까지 채웠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기 몸에 해를 가하는 사람입니다.
잘못하다간 그 돌에 맞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15절을 보면, 정신이 돌아온 후 옷을 입었다는 것을 볼 때, 옷도 벗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결론이 뭘까요? 끝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한 영혼입니다.
군대귀신이라는 어마어마한 귀신의 무리가 한 영혼에 들어갔으니 말 다했습니다.
그 귀신 쫓아낼 때 돼지 2천마리를 써야될 정도이니,
사실 고쳐 쓸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과학으로, 의학으로, 상식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능성 제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가능성 제로일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은 홍해바다로 막혔습니다.
가능성 제로입니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가능성 제로일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열정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버릴 수 없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거라사 지방으로 가셨던 이유도, 이 땅에 나를 구하러 내려오셨던 이유도 동일했습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대단할 때, 우리가 강할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약한 자들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낮은 자세로 그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강한 이유입니다.
📷
결단기도
우리가 강한 이유를 깨닫고,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주시도록
약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서 먼저 손 내밀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도록
우리의 상황이 제로일 때, 하나님의 때임을 기억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음의 담대함을 주시도록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고, 제가 축도로 예배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 한번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구원하여 주셔서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평안과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감사와 감격으로 받은 기쁨을 누릴 때마다 그 또한 받을 자격 없는 우리에게 특별한 사랑으로 부어주신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영적인 안목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가 죄인일 때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원수일 때에 부활의 산소망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다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나 또한 연약할 때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에 이미 받은 그 사랑을 약한 자들에게 흘려보내기 원합니다. 내가 할 수 없사오니 나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본받아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상황과 환경을 보지 않게 하시고, 가능성 제로일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의 때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우리 안에 지금도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우리가 강한 이유를 깨닫고,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본받아
약한 자들을 위해 낮은 자세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기를 원하는
여기 모인 군산삼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머리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