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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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36~40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38페이지에 있습니다.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수요기도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예전에 개그콘서트에 “아빠와 아들”이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뚱뚱한 아빠와 뚱뚱한 아들이 나와서 뚱뚱한 사람들의 특징을 콩트로 재현했던
재미있는 코너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빠와 아들이 레스토랑에 왔습니다.
“오우~, 이렇게 비싼 식당은 처음 와본다.”
“우와~, 아빠 여기 되게 좋다.”
“어우~, 이게 메뉴판인가보네.. 어디 보자...
한우안심 스테이크, 티본 스테이크, 한돈 목살 스테이크, 그릴드 폭립, 크림파스타,
빠네 해산물 파스타, 봉골레 파스타, 씨푸드단호박 치즈필라프, 베이컨 김치 볶음밥...
네~ 이렇게 주문해주세요.”
“아, 그리고 수영아, 네껀 네가 따로 시켜.”
배경음, 뚠두다~ 뚠두다~ 아빠와 아들~
“큰일이네 이거, 저녁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배고프네”
“나도” “이거 큰일났네”
“안되겠다. 출출한데 우리 라면이라도 끓여먹을까?”
“어, 진짜?”
“그래, 몇 개 끓을까?”
“음... 10개!”
“어? 뭐? 10개? 넌 안먹을 거야?”
뚠두다~ 뚠두다~ 아빠와 아들~
이런 내용의 꽁트입니다.
이 꽁트를 보면, 아빠와 아들이 참 많이 닮는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제 아들 이안이가 이제 “아빠, 엄마”를 조금씩 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숫자에 대해서는 빨리 배우고 있습니다.
1부터 7까지 숫자가 적혀있는 고무 원판이 있는데,
순서대로 저한테 가져오면서 숫자를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수학을 좋아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들이 왜 아빠를 닮는 것일까요?
자녀는 왜 부모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일까요?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도 있겠지만,
동시에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 성장의 요인을 유전과 환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앙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은 세대가 있으면, 그 모습을 보며 배우고 성장하는 다음세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부모세대의 믿음을 보고 자랐지만,
더 중요한 본은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한 평생을 살아 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아버지께서 하시기 때문에, 나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셔서, 나도 말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았던 그 신앙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따라 배우듯이,
첫 시작이 좋으면, 그 시작점 위에서 시작하는 다음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우선순위를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첫째와 둘째를 구분하지 못하고 열심히만 하는 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와 둘째를 잘 알고 신앙생활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뜻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신앙의 첫째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2장 37~38절에서
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여기서 말하는 첫째란, 가장 처음에 해야될 것을 말합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써야될 일을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처음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이 첫 번째는 하지 않고, 나머지 8개를 잘하려고 애썼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3, 6절
2 내가 네 ①행위와 ②수고와 네 ③인내를 알고 또 ④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⑤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⑥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⑦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⑧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교회는 참으로 정의롭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인내할 줄 아는
참으로 모든 일에 열심히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를 이 모든 것보다 첫째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는 첫째는 잘 못하면서 나머지를 잔뜩 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앙은 이 하나만 잘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식도 좀 부족하고, 가진 것도 별로 없고, 몸도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하나만 가득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이지선 자매나 또는 닉 부이치치 같은 사람은
온 몸이 망가지고, 일반인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며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하나로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우수한데
주님 사랑하는 면에서 시들시들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바쁜 일과들이 많아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첫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주신 주님을 위해서
그 주님과의 참된 사랑을 지켜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너무도 적은 것 같습니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보잘 것 없지만,
내 가슴 속에서 만큼은 주님이 첫 번째가 되고, 주님이 제일 소중한 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면,
주님은 놀라운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어떤 길로 와서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마지막은 항상 주님을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것도, 은혜받은 것도, 건짐받은 것도,
사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기위한 주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어보십니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어보시니, 나중에는 베드로가 근심하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3번은 완전한 횟수를 의미합니다.
첫째, 정말로 사랑하느냐고 진정성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둘째, 끝까지 사랑하느냐고 영원성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셋째, 가장 먼저 사랑하느냐고 우선성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물어도, 그 다음에 물어도, 베드로에게 물을 것은
“네가 나를 사랑햐느냐” 이 질문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지금도, 나중에도, 죽어서도
영원히 동일한 대답인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떠나가지만 저 봐좌 위에서 너에게 계속 물을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느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풍성한 열매가 있을 때에도,
핍박을 받고, 환난과 고난이 다가올 때에도
너는 끝까지 나를 사랑하느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세 번만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묻는 물음이고, 이 땅을 떠나서 주님을 만나 볼 그 때까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헬라어는 현재형의 뜻이 현재 한 번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의 시점을 가리킬 때는 단순과거를 사용합니다.
단순과거를 사용하면 그 때 딱 한 번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을 뜻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네가 변함없는 마음으로 나를 언제나 항상 사랑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에베소서 6장 2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Grace to all who love our Lord Jesus Christ with an undying love.
영어로 말하면 undying love.
죽지않는, 꺼지지 않는, 계속 이어지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변함없이, 언제나, 영원히 사랑해야 합니까?
주님이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냥 ‘주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사랑’ 이정도로 번역되어 있지만,
unfailing love 로 번역되어있는 본문이 많이 있습니다.
그 뜻을 직역하면, ‘실패하지 않는 사랑’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절대 물러서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시편 44: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Rise up and help us; redeem us because of your unfailing love.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편 48:9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Within your temple, O God, we meditate on your unfailing love.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3절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In your unfailing love you will lead the people you have redeemed. In your strength you will guide them to your holy dwelling.
절대 물러서지 않는 사랑으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했지만, 네가 너무 고집이 세고, 삶을 엉망으로 살아서
더 이상 사랑하기 힘들어서 포기해야될 것 같다. 내가 할만큼 했다.”
절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러셨다면, 여기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이 신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왜 부르셨다고 생각합니까?
학생들이 각자 받은 소명을 생각하며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 때문에요.
저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시려고요.
무너진 한국교회를 개혁시키려고요.
모든 대답을 다 듣고는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이 아니면 개차반으로 살 것 같아서 불쌍해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가장 정확합니다.
우리 중에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하나님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한데, 우리를 써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 동역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처럼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널 떠나야겠다.” 이런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주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맞바꿔서라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undying love 죽지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unfailing love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날마다 이 물음에 우리가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잘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께서 말없이 조용히 우리 마음에 물어보시는데,
이 물음에 내가 미흡해서 죄송하다며, 온전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본질을 잃어버린 겉치레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매일 실패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생은 못되더라도
주님의 이 물음에 “네, 주님! 사랑합니다.” 자신있게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인줄 믿습니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의 대답은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온 신앙생활 전체의 요약입니다.
과거에는 사랑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짜로 사랑했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정말 열심히 섬겼었는데...
그때는 많이 사랑했었는데, 지금은 열정이 식어서 조금 사랑합니다.
사랑은 몸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먼저는 우리의 첫 마음이 주님께 있냐는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일도, 사역도, 나의 꿈과 비전도 아닌
네가 나를 가장 먼저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우리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부모님도,
여러분의 그 누구도 주님보다 먼저 사랑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장 먼저 사랑할 때, 그 사람을 변함없이 계속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부모님을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항상 부모님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부모님을 늘 먼저 생각해서, 계속 그렇게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부모님이 병에 들고, 몸이 불편해지자
부모님께 대한 사랑이 지루하고 피곤해지면서 결국은 그만두고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현실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사람은
부모님께 대한 변함없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로부터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변함없이 한결같이 죽지않는 영원한 사랑으로
절대 실패하지 않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혼자 하면, 그건 짝사랑입니다.
이미 우리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그렇게 큰데, 그 사랑을 어떻게 흘러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고, 부모님을 먼저, 자녀를 먼저 사랑하다보면,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언젠가는 메마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효도를 가르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속에 엄마가 먼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네 마음속에 예수님이 먼저가 되기를 원한다.”
그 자녀는 틀림없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내가 먼저, 나의 부모님, 나의 자녀가 먼저라고 마음 먹으면
머지 않아 그 사랑은 식어버리기 쉽습니다.
주님에게 첫 마음을 드립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남편 아침식사, 자녀 기저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중에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아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가정일을, 회사일을 시작합니다. 도와주세요.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가운데 자녀를 돌보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 주님을 먼저 모신 가운데서 행하십시다.
“주님,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해도 항상 나의 첫째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입술 가운데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보다도 먼저, 첫 번째 해야될 일을 늘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의 사랑의 사귐이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그 피곤한 몸을 가지고 광야의 한적한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뭐하러 가셨을까요? 첫 번째 일을 하려고 나갔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첫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기도할 곳을 찾아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군산삼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새벽에 기도하나요?
왜 새벽에 아무도 깨어있지 않는 그 때에, 조용한 성전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나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려고,
이미 받은 사랑, 지금도 받고 있는 사랑, 오늘 하루도 주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과 교제하려고 나아오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첫 번째 일을 한다고
밤새도록 잠을 못 잤습니다.
다음 날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몸에 힘이 없어 쓰러지셨습니다.
그 평범한 구레네 시몬도 지고갈만한 십자가인데,
우리 주님은 힘이 없어 쓰러지셨습니다.
여러분, 첫 번째 일에 성실함으로 두 번째 임을 감당하지 못해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절대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영혼이 첫 번째 일을 게일리 했을 때는 몸이 멀쩡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틀림없이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을 때,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모두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지기 전날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한 시간도 깨어서 기도할 수 없냐고 다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시느라 힘이 다 빠지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힘이 남아있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기에는 제자들의 에너지가 훨씬 더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몸이 쓰러져도,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이 첫 번째 일에 대해서 중점을 두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6~37절
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7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크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큰 만큼 중요하다고 하면, 나머지는 그에 비해 작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교수님이 문제 3가지를 내주었을 때
1번 문제가 어려우면, 2번 3번 문제를 먼저 풀어도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내시면서 1번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때는
아무리 2번 3번 문제를 잘 풀었어도, 1번 문제를 틀리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
우리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하고, 마음을 쏟을 수 없습니다.
분명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한가지는 가벼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제일 우선순위에 두고 잘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다른 것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가족이 사랑스럽고, 친구가 좋고, 직장이 내 밥벌이를 쥐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가볍게 여겨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본질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게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도 있고, 자녀도 있고, 부모님이 계셔도
우리가 주님을 가장 첫째 자리에 언제나 모시고 되면, 마음에는 늘 자유가 있습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을 잘 해내게 되면, 나머지는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에도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4~25절에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몸과 마음을 정욕대로 내버려두어 욕되게 하는 것이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우리는 아무리 가족, 이웃, 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우선시 해서는 안됩니다.
이 점을 절대 양보하면 안됩니다.
첫째와 둘째가 바뀌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나 자신도 첫째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첫째가 되면 끝장입니다.
항상 주님이 첫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제자의 길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부모, 배우자, 자녀, 가족,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면서
따라와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한다고 해서 일부러 미워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먼저 사랑하다보면, 두 번째 사람을 서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 번째 중요한 일도 하나님 사랑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 사랑,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 사랑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하나님 사랑
선교도, 봉사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다.
둘째나 첫째나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굳이, 첫째와 둘째를 나눠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둘째를 말하는 것은, 첫째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별하고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신앙생활 한다면,
주님은 여전히 첫째와 둘째를 오고가며 어느순간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될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가 잘 구분되었을 때,
두 번째 일을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두 번째가 짐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입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아빠가 먼저 본을 보이면, 아들이 따라하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먼저 행할 때,
그 다음 이웃사랑, 봉사, 섬김, 전도 모든 일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이고, 우선이고, 가장 큰 전부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했다면, 두 번째를 위해 남겨둘 것이 없습니다.
첫 번째 일에 전부를 쏟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는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이 그렇게 주님 사랑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전부를 드릴 수 있기를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영원히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더 원합니다” 라는 찬양을 함께 고백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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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1.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들로 채우지 않고,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도록
2.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3.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게 하시고, 이태원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위로하여 주시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이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고, 각자 주기도문으로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안수 기도를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기도방석으로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 한번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