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알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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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1장 19~25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240페이지에 있습니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주일 오후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오늘 로마서 1장 19절부터의 말씀은, 바울이 17절에서 언급한 이신득의의 교리를
바울이 왜 확신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의 서론부분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7절에서 언급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선포는
하박국2장 4절에서의 말씀을 인용한 메시지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서는 바벨론 심판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악의 세력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예언합니다.
방금 살펴본, 하박국 2장 4절의 전반절에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나’
여기서 ‘그’는 바벨론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하박국 2장 4절의 내용은
바벨론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당시 많은 나라를 정복하며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에도
자신의 군사력을 믿고 교만하여 하나님께 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은 블레셋이 거짓말을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정직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야솨르’라는 단어로, ‘곧다, 바르다’라는 뜻으로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도덕하게, 비윤리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방식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보지 못한 것을 믿고, 서로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믿어주고,
눈감아주고,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그렇게 믿어주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라는 단어로,
‘견고함’, ‘굳건함’, ‘충실’, ‘성실’, ‘충성’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깐 바벨론 사람들은 교만하고, 비도덕적으로 행동해서 성공하는 것 같지만,
의인, 곧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견고함, 성실함, 하나님께 충성을 다함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박국의 메시지를 인용하면서
이신득의, 믿음으로 ‘의’, 곧 ‘구원’을 얻는다. 이 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18절에서부터 3장 20절까지 바울은 왜 이신득의인가?
왜 구원은 믿음으로 받아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먼저 인간들의 죄악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수준 이하의 죄인인지 스스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진노하셨습니다.
수요예배 때 로마서 1장 18절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깊이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 고통이나, 실패, 좌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깊은 죄의 빠지도록 방치하고, 쌓아두시고, 덮어두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그 모든 죄의 대가를 지옥에서 치르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유명한 변증가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보면,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편지를 쓰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더 악마다워지기 위해서 조언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한 가지를 가르쳐주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무 큰 시험이나, 너무 큰 성공은 가급적 피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너무 큰 시험을 받거나, 너무 큰 성공을 하게 되면
급격하게 변화된 상황에 깊이 생각하며 인간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큰 변동없이 적당히 성공하고,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잘되고, 남들과 다르지 않게 평범하게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다보면,
내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정말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과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마들의 목적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넘어뜨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그대로 두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붙잡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19절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알만한 것들을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떠나면 더 이상 하나님이 붙잡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창조하신 모든 것,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줍니다.
집, 건물은 건축가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건물, 유명한 건물을 보면 건축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림도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만물의 조화, 질서, 풍요로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알려줍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의 행위, 의도, 성격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양심이라는 영어 단어 conscience(컨시언스)의 유래가 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라는 단어는 ‘함께 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양심이란, 개인적으로 느끼는 선과 악의 도덕적 기준, 가치 판단인데,
그 단어 자체가 함께 알고 있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주는 것은
세상의 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의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 관습, 종교적 상황에 따라 가볍고 무거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죄가 되는 행동이, 다른 나라에서는 선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을 선이라고 말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과거의 법을 보아도 그 기준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경의 법, 특별히 십계명을 보아도
초등학생한테 설명해도 도저히 납득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계명은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 안에 주어진 모든 양심이 사실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해서 그 양심을 100% 따라가지 못할 뿐이고,
사람마다 태어난 환경, 선천적인 성격, 유전 등의 이유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같은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양심의 근원이 되는 무언가, 누군가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 양심, 종교심과 같은 것들을 심어 두셨다는 말입니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여러분,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예를 들면, 건물은 설계도에서 나오고, 설계도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고,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즉,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먼저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될 때는 언제입니까?
그 사람과 오랜시간을 함께 보낼 때 알게 되지 않습니까?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은 정말 못생기고 별로였는데,
같이 대화도 해보고, 밥도 먹어보고, 일도 해보고, 어려운 일도 같이 경험해보니깐
그 사람의 말, 행동, 생각, 습관, 가치관 등이 너무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내면, 머리, 그 사람이 살아온 성장 과정, 교육환경 등 모든 것
그 사람을 만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이면서 나타난 결과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보이거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이 말은 아무 무지한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만물은 보이지 않는 힘과 아주 정교한 질서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과학잡지나 과학서적을 좋아하나요?
저는 학창시절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과 과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설책, 인문서적, 고전서적은 잘 안 읽었고,
주로 과학, 수학 관련 책들은 자주 보았습니다.
그 중에 프랙탈 이론에 관한 책을 본적이 있는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어떤 세포나 큰 조직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작은 규칙과 큰 규칙이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나뭇가지를 예를 들면 Y 모양으로 뻗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무 전체의 모양을 살펴보면, Y 모양과 비슷하게 전체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거대한 우주의 모습과 작은 세포하나에 담겨있는 모습이
닮아있다는 과학적 증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놀랍도록 오묘하고 신기합니다.
현미경으로 보는 미세한 세포의 세계와
만원경으로 보는 광대한 우주의 세계가 닮아있습니다.
이렇다는 것은 모든 만물을 만드신 어떤 분의 오묘한 섭리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기 중에 80%나 차지하는 질소를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자 양을 줄이고, 봉지를 커보이게 하기 위해서 질소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실제로 생명체를 존재하게 하는 근육, 세포, 단백질을 만드는 요소가 질소입니다.
그리고 그 질소를 생산하고, 실제로 식물과 생명체까지 옮겨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하늘에서 내리는 천둥 번개입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칠 때, 뜨거운 열을 발생시키면서 질소를 만들고
번개에너지와 산소가 만나 질소화합물을 만들어서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지면, 식물이 그 질소화합물을 먹고, 자연 만물을 소생시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 만물은 아주 오묘한 섭리로
사람이 살기에 딱 좋은 환경을 계속에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만물이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시고, 그대로 유지만 시키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만물을 소생시키고, 우리가 살기 좋은 땅을 매일 준비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피부가 20살 때 고정되어서 점점 늙어가서 이렇게 만들어진 피부가 아닙니다.
오늘의 피부는 30일 지나면 새 피부로 교체됩니다.
몸에서부터 매일 새로운 피부조직을 만들어내서 겉에 있는 피부를 밀어내며
새로운 피부를 계속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충만하게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만물은 그냥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물이 우연히 그냥 생겼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 또다른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빅뱅이나 진화론은 기원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이럴 것이다 하는 가설에 불과합니다.
만물의 기원은 누군가 만들었다, 또는 우연히 생겨났다. 사실 두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물의 기원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큰 의미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의 생명도 우연히 생겨난, 큰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인생에서 의미나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이 세상 즐기면서 마음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에서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그러면 사람 안에 양심이란 것도 없어야 하는 것인데,
마음대로 살려고 하면, 양심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죄책감, 종교심, 도덕심, 이성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심어줍니다.
기독교는 성악설을 주장합니다.
사람은 원래 태어나면서 죄인이다.
원래 악하다고 말하면서도 정말 심각한 죄악을 저지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착하게 살고 싶은 강한 욕구, 본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어찌보면 성악설, 성선설 둘 다 맞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우리의 이성은 만물에 이미 충만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증거를 보고도,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부인한 것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합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사람은 급할 때 누구나 하나님을 찾습니다.
비가 안오면 기우제를 지내고, 첨단시대에 우주선을 띄우면서도 돼지머리에 고사를 지냅니다.
뭐가 잘 안되면 이상하게도 평소에 찾지도 않던 하나님부터 원망합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러실 수 있어!”
미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찾나요? 다같이 해볼까요?
“오~ 마이~ 갓”
평소에 죽으면 끝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던 사람들도 막상 가족이 돌아가시면
“좋은데 가셨으면...” 죽음 이후의 운명에 대해서 희망을 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명백하게, 자기 안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본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순식간에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본성이 분명하게 뚜렷하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의한 것을 보면 “이런 천벌을 받을 놈...”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어떤 절대자가 이런 불의한 상황을 재판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자기가 맘대로 하는 것이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지식에서 하나님을 배제해버립니다.
아주 조그만 논리적 이유만 있으면, 바로 하나님을 부인해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기로 하자’ 이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다고 해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대로 살기 위해서 창조자를 부인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아기가 기저귀에 오줌을 싼다고 해서 부모가 야단치지 않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오작동을 한다고 해서 기계에게 책임을 묻고 야단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화가 나서 발로 찰 순 있지만, 그렇다고 기계 잘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양심과 이성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내린 결정은 무거운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이성을 믿기로 하자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최고의 가치로 평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세상적 지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지독한 무지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세상적 지혜는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어 참된 지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는 멀리하게 만듬으로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본래 지식, 이성은 하나님을 인지하는 통로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성을 숭배하게 된 결과,
사람들은 어떻게 인생을 약삭빠르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은 풍부해지지만
정작 왜 사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수많은 논리와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만물의 목적과 삶의 목적,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니깐, 사람들은 스스로 생존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겨야되고, 평생 인정받기 위해서 애써야 됩니다.
남들에게 잊혀질까봐 전전긍긍하고, 뒤처지거나 실패하면 어쩔줄 몰라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해서
일생을 죽음에 매여서 종노릇 하는 그림자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탐욕스러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남들보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직업, 좋은 환경, 좋은 외모 등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사람의 본능과 양심은 이것에 동의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땅히 하나님이 계셔야 할 그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채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대체할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안도감을 가지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속에 컵 모양의 구멍이 뚫려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마음의 구멍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네, 맞습니다. 반드시 이 컵이 필요합니다.
더 비싸고 좋은 컵이라고 해도, 이 컵이 아니면 안됩니다.
더 커도 안되고, 더 비싸도, 더 재질이 좋아도 아무 의미없습니다.
이 컵 모양의 구멍은 이 컵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없는 삶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만 가능합니다.
우상은 ‘짝 우’, ‘형상 상’, 한마디로 ‘짝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대체하는 무언가, 짝퉁을 만들어서 내 마음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신, 마호메트, 부처, 알라 모든 신이
사람을 섬기는 종교는 결국 가짜 신입니다. 짝퉁입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뜻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패하고, 이기적인 사람의 뜻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창조자이고 절대자인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맞지
하나님이 사람이 입에 맞게, 사람의 요구에 순응해서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은
짝퉁 신,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짝퉁 신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내 입맛에 맞는 말씀만 찾아서 읽고,
내가 좋아하는 주제의 설교만 귀담아 듣는 것 또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연말에 하는 말씀뽑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말씀뽑기에는 성경 66권, 3만 993구절 모두가 다 있지도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절 50-60개 정말 많으면 120개 정도 모아놓은 것중에 뽑습니다.
약간 불편하고 권면하는 내용도 별로 없습니다.
괜히 걸리면 시험들까봐 다 빼놓고 뽑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꺼는 제일 좋은 말씀 미리 뽑아서
강대상에 준비해놓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하고 하나, 둘, 셋 하면 다같이 열어봐야 되는데
그때 불편한 말씀 걸리면 표정관리가 안될 수도 있고,
그 말씀 읽을 때, 혹여나 성도님 중에 우리 목사님 올 한에 목회가 잘 안되시려나보다
생각하면서 시험드는 성도님들 계실까봐 은혜롭게 하려고 그렇게 한다는거에요.
모두 사람의 뜻을 섬기는, 자기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탐욕과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하니깐
역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는 거에요.
자기가 믿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거에요. 진짜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전쟁해서 이기면, 이긴 나라의 신이 진짜 신이 되는거에요.
하나님이 이긴 나라의 탐욕과 욕심에 순응해서 소원을 들어준 것이에요.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면, 공부를 덜했어도 남의 집 자식은 떨어지고,
우리 집 자식은 대학에 붙는다는 거에요.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지혜있다고 말하지만, 한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하고, 탐욕스러운 것이 사람의 지혜이고, 이성입니다.
결국 그 지혜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요즘 영화를 보면, 사람에게 절대 권력이나 초자연적인 힘이 주어지는
마블 시리즈가 인기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심리를 교묘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정말 내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질까요?
내가 싫어하거나 가치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고통을 겪거나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을 가장 빨리 망하게 하는 길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동시에 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은 이중적이고 아주 추악합니다.
사람이 마음을 서로 들키지 않아서 그렇지, 만일 들켜버린다면
이 세상에서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서로 깜짝 놀라고, 두려워 할 것입니다.
사실 남들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겨우 체면을 유지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자기를 포장하고, 가면을 쓴 채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니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이나 욕망은, 개선이나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본성은 어려서부터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을 가르치지 위해서 거짓말 학원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아주
창조적으로, 능동적으로, 아주 복잡한 계산을 해서 할 줄 압니다.
거짓말은 알아서 배웁니다.
그러나 바른 말, 바른 태도, 바른 습관은 회초리로 때려서 가르쳐도 쉽게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제일먼저 하는 말이 대개 “싫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선을 배워도, 그것을 스스로 따라해보려고, 잘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나이가 먹는다고 자연스레 선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에 대해서 더 잘 변명하고, 합리화시킬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라는 선을 풀어버리면, 못할 짓이 없고,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악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추악한 모습을 볼 때, 세상은 왜 이러냐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탐욕과 악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망과 뜻대로 내버려둔 세상이 얼마나 추하고 악하고 모순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방치하심으로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 서서 아무 변명할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진리를 거짓 진리로 바꾸고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섬기며 우상숭배한 결과입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불경건입니다.
불경건이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르고 저지른 죄는
비교적 추궁하기가 어렵습니다.
재판장에서도 정상 참작이라고 하여 형벌을 가볍게 해줍니다.
그러나 반면에, 나쁜 줄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가중처벌이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47, 48절입니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만한 수많은 증거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증거를 믿고 여기까지 나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옛사람에 끌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세상의 지혜를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숭배하며,
하나님을 나의 욕심과 만족을 채우기 위해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중처벌 하십니다.
쌓아두고, 방치해주셨다가,
마지막 날에 우리가 변명하지 못할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증거를 마음에 잘 새기고, 깨달아서
어리석은 세상의 지혜을 쫓지 않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감으로 성실과 충성함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을 누리시는
군산삼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꽃들도
결단기도
1. 모든 만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매일 느끼고, 깨닫는 지혜를 주시도록
2. 세상의 지혜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워갈 수 있도록
3. 나를 위한 하나님, 짝퉁 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3가지 기도제목으로 짧게 3분간 통성으로 기도하시고,
제가 축도로 예배 마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 크게 한번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우리 안에 지금도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모든 만물과 우리 안에 양심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증거를 발견하고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 원하는
여기 모인 군산삼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머리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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