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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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요한복음 15장 9~17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173페이지에 있습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수요기도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오늘은 ‘피보다 진한 우정’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눕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서 친구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피를 흘리신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흘러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지금 가족의 범위와 의미를 재정립하려는 과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사건들과 자기 정체성의 차이로 인해
가족의 의미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족의 범위를 생각한다면, 어디까지 가족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대개 부모, 자녀, 친척 등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이를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전에서도 그런 의미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 집단.
이렇게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족의 정의를 바꾸자는 주장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부부의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부부라고 하면 대개 성인 남·녀 커플이 정식으로 하나가 되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동성애자가 증가하면서 동성부부를 합법화 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동성 커플은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지 못하는데, 부부로서 가족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성 커플 간에도 자녀를 낳지 않는 부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성커플도, 이성커플도 어차피 똑같이 자녀를 낳지 않는데
사회 구조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어떤 차이를 둘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 생깁니다.
요즘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1인 가족이 늘고 있습니다.
2013년도에 처음 방영된 나혼자산다 라는 프로그램이
벌써 10년째 방송중인데, 아직도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만큼 1인 가족이 많아지고 있고, 관심있게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혼자 살면서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기는 가정도 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반려동물을 키우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부부를 중심으로 한 혈연관계의 가족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 개념의 가족이라면, 그들은 가족에서 제외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관점에서 가족의 정의를 새롭게 하자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가족이라는 개념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들을 보면 현실 가능한 얘기처럼 다가옵니다.
예전에는 간혹 자녀가 부모를 죽이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병이 있는 부모를 그냥 방치하거나, 은밀한 방법으로 죽이려다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가 자녀를 죽이는 경우는 들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기가 낳은 자식을 부모가 죽일 수 있을까?
이것이 모성애, 부모의 사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피로 맺어진 가족 사랑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부모가 자식을 버리거나,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옵니다.
그런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정말로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의 힘이
예전과는 다르게 많이 약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지구상에서 가족의 개념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밀려오면, 내면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고독이 올라옵니다.
심지어 두려움까지 엄습해 옵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여태껏 헌신과 사랑을 쏟아왔는데...
머잖은 미래에 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니...
그러면 모든게 한순간에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상상만 해도 형벌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자녀들을 성인 또는 결혼까지 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이 사는 동안에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수고를 헛되이 여길 일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우리 이안이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했는데,
나중에 이안이가 커서, 저의 수고와 헌신을 의미없고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사회가, 문화가, 환경이 부모의 수고를 의미없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처럼 허무하고 좌절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가족 해체의 위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동성 부부 가족, 1인 가족, 반려동물의 가족화 등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내부에 또 다른 원인들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가족의 해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가족이 다함께 논밭을 일구며 살았기 때문에, 가족의 일터가 곧 가족의 삶터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제작기 다양한 직업을 갖고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빠는 아빠의 직장으로, 엄마는 엄마의 직장으로
자녀들은 어린이집에, 학교에, 학원에 맡겨놓고 각자의 일터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밤이 돼서야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소년은 밤에도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닫고 안나오기 때문입니다.
밤에 가족이 모두 모인다 해도, 다들 녹초가 되어 그날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대화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부모는 과중한 업무에 치이고,
자녀들은 과중한 학업에 지쳐서 집에 돌아옵니다.
대화가 없는 가정들은 사실상 해체된 가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한국의 가족 공동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해체의 위기에 놓인 한 가정을 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한솥밥을 먹으며 3년 동안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오히려 가족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대부분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꿈을 꾸며, 함께 먹고 자는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낮에는 전도에 힘쓰고, 밤에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새로운 이상 공동체를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혈육까지 뒤로하면서 같은 꿈을 향해 3년간 생활했기 때문에,
그들은 가족 이상의 강렬한 연대감을 느꼈습니다.
서로 눈빛만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이해와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며칠 전, 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는 공동체에 더 깊은 애착이 생겼을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군중으로부터 환호를 받았을 때,
자기 선택에 대한 기쁨과 확신이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떠나 예수님과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그 날이,
예수공동체 정식 데뷔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아이돌이 긴 연습생 생활 끝에 드디어 데뷔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내가 JYP 들어오길 잘했다. 내가 SM 그룹에서 끝까지 버텨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이렇게 기뻐하듯이, 제자들 또한 감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면서 드디어 세상에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3년간 고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며, 큰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기쁨과 확신이 들면서 제자들이 하나되기 시작할 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새로운 가족의 중심이었던 예수님이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요한복음 15장은 예수님의 고별사 중 한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그들에게 마지막 명령이자 사랑을 재확인하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13장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통해
제자들의 우정과 사랑을 다시 한번 견고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자신이 떠난 후 성령께서 찾아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매워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지속적인 사귐이 가능하고,
절대로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과 어떻게 교제하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자들과 사랑의 교제를 이어가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금은 헤어짐에 관한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이해한다면,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과 더 깊은 단계의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다니... 도데체 어디로? 갑자기 왜?
지금껏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써 이뤄놓은 이 가족보다 더 중요한 예수공동체는 어떻게 하고.
갑자기 혼자 떠나시면, 남은 우리들은 어떻게 하라고.
이건 뭐,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도 아니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기약없는 죽음이라니...
이처럼 무책임하고 황당한 통보가 어디있나.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어떠한 말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수고하고 헌신한 것들에 대한 허탈감에 맺이 쭉 빠졌습니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가족도 다 버리고 3년을 따라다녔는데...
이제야 비로서 성공의 빛을 조금 보는가 싶더니...
판을 다 벌려놓고 주인공이 이제 와서 갑자기 빠져버리겠다고 통보해버리면
우리보고 이제 어쩌라는 건지...
제자들은 심한 배신감까지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발전한 공동체입니다.
예수 없는 예수 공동체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스스로 종이라 자처하며 따랐습니다.
주인과 종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주인이 빠져버리면
공동체의 심리적, 사회적 문제가 심각할 것은 너무나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올인했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엄청난 불안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오히려 가족들과는 자발적인 의지와 결단으로 이별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억울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갑작스런 통보로 인해 생기는 공동체의 해체위기는
제자들을 ‘공황’ 상태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뒤에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계속 이어줄 것이라는 뜬금없는 고별사를 하십니다.
지금의 우리들은 이미 성령님을 경험하고, 알고있기에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어이없고 무책임한 말로 들렸습니다.
오히려 “미안하다. 모두 내 책임이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
이런 사과 한 마디라도 하셨으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성령이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을 무시하고 놀리는 것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갑자스런 통보도 당황스럽지만,
마지막 남기는 고별사마저도 무책임하고 너무 성의없이 던지는 말같이 들렸습니다.
현실성 없이 터무니 없는 말만 내뱉는 예수님이 너무도 야속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이 고별사는 제자들을 위한 가장 큰 배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없는 제자 공동체가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제자들과 자신을 이어줄 매개체를 소개해 주십니다.
14장에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때까지도 여전히 성령은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친절하게,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를 빗대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 안에서 예수공동체를 잘 이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친구’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의 정체성을 통해 해체 위기에 있는 공동체가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주십니다.
이제는 종과 주인이라는 주종관계에서 친구라는 우정 관계로의 전환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주인과 종으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주인이 떠나면, 그 공동체는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처음부터 친구라는 우정의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에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멤버라 할지라도 친구 한 사람과 헤어졌다고 해서,
남겨진 친구들이 갈 길을 찾지못해 해메는 경우는 드뭅니다.
왜냐하면 친구는 짐을 나눠지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시켜서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종이 지닌 한계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그들이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층 더 새롭고 두터워진 우정 공동체를 만들어 가십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가족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혈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가족 공동체는 외부적, 내부적으로
많은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한가족이라는 개념으로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가족들을 해체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많이 고독하셨습니다.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너무 무거웠지만, 그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홀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령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털어놓는다 해도, 언제나 반대에 부딪힐게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랜 시간을 고독하게 보내시다가,
생애 마지막을 며칠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은 오직 예수님만 모든 것을 알고, 제자들은 그냥 따라가는 종과 주인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삼아, 그들에게 모든 비밀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친구로서의 자유를 부여하십니다.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니 나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
마음껏 떠나도 좋다. 돌아볼 필요도 없다.”
여러분,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시기가 보통 어느 때일까요?
아마 자녀를 키워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청소년 시기가 되면, 아이들은 부모보다도 친구를 더 많이 의지합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 하면서 부모님 뒤만 쫄쫄 따라다니던 아이들이
청소년 시기만 되면, 부모님을 쳐다도 안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모두 친구에게 쏟아 붓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갑자기 변한 태도에 적잖히 당황하고, 어려워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들만 청소년 아이들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서가 청소년부입니다.
청소년 아이들은 예배시간에 절대 고개를 들지 않습니다.
그러다 설교시간에 갑자기 게임얘기, 연예인 얘기 등 자신이 관심있는 얘기를 하면
갑자기 고개를 들지만, 결국 예수님 얘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다시 고개를 떨굽니다.
저도 예전에 중등부를 5년간 맡아서 사역했었습니다.
그때 청소년 아이들과 함께 예배하면서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에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어느 부활절 주일날 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중등부에서 아이들에게 모두 삶은계란 2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는 예배를 마치고 찬양팀 아이들과 함께 예배 뒷정리를 하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어떤 아이가 제 머리에 계란을 툭 치고는 계란을 까먹으면서 해맑게 웃고 가더라구요.
알고 보니 성가대를 하는 남자아이였습니다.
그녀석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말도 없고, 성가대도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서
연습시간에 졸다가, 성가대 찬양할 때도 립싱크만 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보일 때마다 말을 걸고, 챙겨주었지만, 한번도 대답을 하거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 순간 친구들하고 친해지더니 저하고도 가깝게 느껴졌던지
제 머리에 계란을 깨고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아프거나,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제 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저는 절대 사이코패스가 아닙니다.
이 아이가 드디어 나에게 마음문을 열었구나. 이런 생각에
머리가 아프거나, 기분 나쁜 것이 싹 사라졌습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그 사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저희 부교역자들에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명한 청소년 사역자 홍민기 목사님의 책에 나오는 말인데요.
청소년들은 10을 주면 1을 돌려준다. 100을 줘도 1을 돌려주고, 1만을 줘도 1을 돌려준다.
그런데 10만을 주면 100만, 1000만을 돌려준다.
아이들마다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임계점을 넘지 못하면, 아무리 퍼줘도 아이들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임계점을 넘는 순간 아이들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친구의 관계가 이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사랑의 임계점이 넘도록 퍼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종으로 매여서 어쩔 수 없이
의무감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받은 사랑의 감격으로,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그 자유를 사랑을 위해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친구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큽니다.
심지어 피로 맺어진 가족의 사랑보다도 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인과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과 분노보다는
친구가 부탁한 마지막 과제를 완수해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친구의 사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자기에게 속한 종을 구하겠다는 주인의 의무감이 아니라,
친구로서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의 우정은 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도 이제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롭게 주어진 친구로서의 자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사랑을 불태울 것입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의 사귐은 삼위일체의 사귐과도 같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
이 세 위격은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종속하지 않고, 서로 동등된 자격과 인격으로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마치 친구처럼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성령님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삼위일체의 사귐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아직 죄인의 연약함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리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지도하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옛사람이 내 안에 존재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전부를 내어 던지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단순해집니다. 고민의 방향이 바뀝니다.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고민에서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는데, 나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으로 바뀌게 됩니다.
고민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예수님은 친구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삼위일체의 사귐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친구로 부르신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경험했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삼위일체의 사귐을 통해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교제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요한복음의 기록시기를
1세기 말, 대개는 A.D 70년 전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당시 기독교는 외부적으로 로마제국의 억압을 받기 시작했고,
내부적으로는 유대 회당과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이런 시기에 예수님의 고별사를
13~17장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다뤘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별사가 바로 교회 공동체가 앞으로 격게 될 박해와 분열의 위기를 극복할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친구로서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삼위일체의 사귐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그 옛날 핍박과 환난의 위기에 직면했던 요한복음 공동체가
친구의 사랑을 통해 해체의 위기에서 자신들을 지켜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수많은 요인들 속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친구의 사랑을 통해 이겨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자녀세대는 아마도 지금의 가족, 교회 구조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영적인 성숙을 경험하고, 영원한 기쁨을 지켜나갈 수 있는 비결은
피로 맺어진 가족관계도, 바른 삶을 가르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아닌
오직 친구의 우정과 삼위일체 사귐의 영성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친구의 사랑과 영성으로 더 끈끈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마치 바람 앞에 놓인 등불같은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한다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경제, 정치, 문화, 코로나 펜데믹 등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러 공동체들이 분열되거나, 사라져 갑니다.
또한 새로운 모양의 교회공동체, 가족 형태가 재탄생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공동체의 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주변에 많은 성도들, 이웃들이 있습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친구의 사랑에는
이들을 가족으로 품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신 그 명령에 따라
그 사랑을 우리 주변에 힘들어하는 많은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나눠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서로 사랑하여 든든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감으로
지역교회에, 주변의 많은 이웃들에게 본이 되고, 삶에서 열매를 맺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라는 찬양을 함께 부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 찬양은 원래 빠른 곡인데,
빨리 부르다보면 분위기에 취해 가끔 가사를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이 찬양의 가사에 참 많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가사에 집중해서 부르려고 느리게 불러봤는데요.
괜찮더라구요. 너무 은혜롭더라구요.
그래서 오늘은 평소에 그렇게 안부르셔서 좀 어색할 수 있지만,
가사에 집중하면서 함께 찬양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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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1.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종의 고민에서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친구의 영성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2.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예수님의 삼위일체 사귐을 본받을 수 있도록
3. 서로의 짐을 함께 지고가는 친구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군산삼학교회가 되어질 수 있도록
이 3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시고, 각자 주기도문으로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안수 기도를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기도방석으로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 한번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귀한 말씀 주셔서, 우리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마음과 삶에 새겨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고, 귀한 사명에 자발적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마음과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종이 주인을 따르는 의무적인 책임감으로 나아가지 않고, 맡겨주신 사명에, 받은 사랑의 감사함으로 반응하며 나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기쁨과 감격으로 시작했던 그 첫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매일 주님과 나누는 사랑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헌신의 농도도 짙어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계산과 예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