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선택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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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2. 군중과 예수님 3. 반응 4.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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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어떻게 지난 주 함께 하자고 했던 미션 다같이 해봤나요? SNS에 ‘나는 복의 통로이다'라고 표현하기 그리고 버디방에 서로에게 힘내라는 인사해주기. 잘 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큐티 할 때 내용을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었는데요. 오늘 본문을 차분히 읽으면서 관찰하다 보면 예수님과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돼요.
예수님을 서서히 받아드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받아드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의심하도록 만드는 사람들. 두 부류가 등장해요.
하지만 딱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받아드리는 사람 혹은 받아드린 사람들 역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하거나 확신이 없거든요.
이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삶과 정말 놀라울 정도로 흡사해요.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도 있죠.
성경을 읽다보면 참 신기 할 때가 많아요. 시대와 환경이 완전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과 반응은 정말 똑같거든요.
(쉬고)
오늘 본문에는 크게 두 가지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요.
“내 눈 앞에서 저런 기적을 펼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던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인가?”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 속에 빠져 있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웅성웅성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생각들이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이런 기적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우리의 메시야 밖에 없다"
“정말로 이 사람은 우리의 메시야이다.”
하지만 이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받아드리고 이해한 것과 같아요. 정말로 마음으로 진심으로 받아드리지는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들이 이야기하며 고민하고 있는 대상. 예수님께서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라는 말을 지금까지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그들 떠들어도 그 스스로가 “맞다"라고 하지 않는 이상 추측에 불과한 것이죠.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머리로만 이해를 하고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머리로만 믿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타이밍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군중과 예수님

갈팡질팡하던 그들에게 바리새인들이 한 마디 던져요.
24절.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냈다!”
진짜 말도 안되는 이 한마디아직 믿음이 자라지 않은 그리고 이제 막 예수님을 받아드리기 시작한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기 시작했어요.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라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가능하다!’ 라고 인정하면 되는데 그 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왜 인정 할 수 없었을까요?
(쉬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부와 권력 그리고 인기를 예수님에게 빼앗길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 버린다 면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존경을 원천 봉쇄 해야 했어요.
여러분 혹시 바알세붑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나요?
아 저는 좀 이 부분에서 킹 받을 때가 있어요.
아니 그래도 명색이 예수님인데,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 그 자체인데, 많고 많은 신들 중에 왜 하필 바알세붑이었을까.
저는 여기에서 좀 킹받아요.
바알세붑의 뜻은 “파리 대왕"이에요.
그런데 더 킹 받는 포인트는, 예수님보고 파리 대왕!이라고 한게 아니에요. 아니 그래도 좀 왕이라고 해주지, 예수님보고 파리 대왕의 힘을 빌렸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거 좀 선 넘은거 아닌가요?
예수님보고 파리귀신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파리 귀신이라고 할 만큼 이들의 마음이 다급했던거에요.
파리 귀신이라고 할만큼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던 거에요. 그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하고 경쟁을 선택한 아주 못난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정말 충격적인 것은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거에요.
“그래 무슨 메시아야. 파리 대왕한테 붙어서 저런 것을 할 수 있었던거네!” 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을 하는 것이죠.
23절.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는 말은 “설마 아니지? 아닐거야" 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사람들이 실망하기 시작해요. “그래 예수는 귀신이나 쫓는 퇴마사야"라는 생각들이 그들의 머리속을 채우기 시작한거죠.
여러분이 만약 귀신을 쫓아내고 또 아픈 사람들이 낫고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고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 것 같으세요?
“이게 가능한가?”
“무슨 일이지? 내가 뭘 본거지?”
이런 충격적인 생각이 들고 그 상황을 부정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러 고민 속에 빠지겠죠.
저는 이런 장면을 직접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의 이 의심과 궁금증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요.
제가 청년 일 때 스리랑카로 단기선교를 갔던 적이 있었어요.
그 곳에서 도착을 해서 여러 일정을 소화하고 주일 새벽부터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만날 사람들을 기대하면서 신나게 풍선도 불고 음식도 준비하고 CCD도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한참 그러고 있는데 밖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나는거에요. 완전 기대를 했어요. 사람들이 왔다. 잘 준비하자. 그래서 예수님을 전하자! 라는 마음을 갖고 “심장아 나대지마" 라고 하면서 저를 다독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그 소리를 들어보니까 예배를 기대해서 온 사람들의 기대 섞인 목소리 들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 봤어요.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 마을에서 예배를 드리면, 본인들이 모시고 있는 신들이 화를 낸다. 우리는 그 진노를 받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당장 이 마을에서 나가라! 는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현지인 목사님께 여쭤보니 교회 지붕 위에 큰 돌을 던져서 지붕이 부서진 적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를 하고 있는데, 이번엔 스리랑카 경찰이 찾아왔어요. 저희보고 나가라고 하는거죠. 이 곳에 더 있다가는 폭동이 생길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우리는 모든 짐들을 들고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산 정상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어요.
산 정상에 버려진 것 같은 큰 건물이 하나 있었거든요.
우리는 그 곳에 올라가 예배를 준비했어요. 점점 저희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함이 가득 차기 시작했어요.
예배 장소를 옮겼다는 공지도 할 수 없을만큼 급하게 산을 올라왔던터라 얼마나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 할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평안함이 가득 차 있었어요.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라 휴대폰도 없었고 심지어 그 때는 카톡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산 꼭대기로 몰려들었어요.
설교 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 여성분을 데리고 나오는데 양쪽 팔을 잡고 있었어요. 알고 봤더니 이 분은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해서 이상한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하는 등 소위 귀신 들렸다는 이야기를 드는 분이었던거에요.
목사님은 그 것을 모르고 기도를 시작하셨어요. 머리에 손을 대는 순간 여성분이 내는 소리라고는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나게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자신을 잡고 있는 덩치 큰 남자들을 힘으로 밀어내기도 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그 분을 놓고 기도했고 목사님은 안수하며 기도를 하셨어요. 앉아있던 그 분이 갑자기 뱅뱅 돌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붙잡은 남자들이 그 도는 것을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막 돌았어요.
목사님의 기도가 딱 끝난 순간 그 분은 기절을 했어요. 그리고 2-30분 후에 깨어났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탁했던 눈이 맑아졌고, 이상한 목소리도 행동도 하지 않았어요. 원래 사람들이 알던 그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반응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놀라고 의심하며 갈팡질팡 하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시작해요.
“바알세붑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라는 바리새인들의 말에 허점을 하나씩 집어주세요.
26절.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여러분 마귀와 그가 부리는 수하들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들이에요. 무슨 짓을 해서든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떨어 뜨리고 싶어해요.
그런 그들이 왜 사람들을 풀어주고 자유를 주려고 하겠어요.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자 그리고 앉은뱅이들이 고침을 받은거에요.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평생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삶에 불평만 하던 그들의 마음 속에 평안이라는 감정이 생겼어요.
마귀는 절대 우리 마음 속에 평안을 주지 않아요.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집안 싸움. 팀킬 하는거죠.
팀킬하는 모임이 오래 지속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죠. 무조건 끝장나는거죠.
27절. 예수님께서 반문하세요.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럼 너희는 누구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가?”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퇴마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거에요. 그들에게 반문하고 있는 것이죠. 그럼 너희는 “어떤 힘과 권위로 귀신을 쫓았는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이 영적인 권위는 일반 퇴마사들과 달랐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제가 스리랑카에서 경험한 것처럼 진짜 귀신을 쫓아내고 자유와 평안을 주신 것이지만, 바리새인 퇴마사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쓴 책들 중 1세기 유대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둔 것이 있어요.
거기를 보면 고대에 그들이 귀신을 쫓아낼 때 썼던 방법이 나와있어요.
당시 사람들은 물고기의 간과 심장을 꺼내서 불에 태웠어요.
여러분 혹시 열대과일 두리안 냄새 맡아 본 적 있어요?
두리안 반입 금지를 적어놓는 숙도들이 있는만큼 냄새가 나는 것은 진짜 역해요. 먹으면 또 맛있기는 한데, 냄새 때문에 쉽게 도전 하기는 힘들어요.
물고기의 간과 심장을 태우면, 두리안 보다 더 역한 냄새가 올라온다고 해요. 이 역한 냄새가 귀신을 쫓아내준다고 그들은 믿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능력을 입은 것이 아니라 마술에 더 가까운 방법이었다는 것이죠. 미신적인 방법을 사용했었어요.
여러분 이런 역한 냄새가 악귀를 쫓아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역한 냄새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괴로웠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바리새인 퇴마사들의 퇴마 성공률은 그렇게 높지 않았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백발백중이었어요.
그 분의 손이 닿으면 모든 사람들이 회복되고 자유를 얻게 되었어요.
예수님의 권위는 그들의 권위와 완전히 달랐던 것이죠.
28절. “하나님의 성령은 마귀와 비교할 수 없다.”
29절.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말씀은 내가 스스로 “강한 자의 집에 잡혀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안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뜻이에요.
세상의 권세 잡은 자. 사람을 영원한 타락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는 마귀에게 잡혀 있는 가장 사랑하는 창조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내가 붙잡혀 이 곳에 온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오래 된 미드이긴 한데, 혹시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미드 알고 있나요?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석호필의 형이 감옥에 갇혀 있어요.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은 형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주인공은 꽤나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를 해요.
일부러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는데, 그 전에 자신의 몸에 많은 문신을 새겨요.
문신의 내용은 탈옥 시 필요한 암호들이었어요. 그리고 교도소의 설계 도면도 문신으로 새겼어요.
그리고 결국 그는 감옥에서 탈옥하는 것에 성공해요. 누명을 쓴 형을 구하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 그 안에서 나오는 것 외에 답이 없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것이죠.
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내부로 들어오신거에요.
“누구보다 능력이 있고 위대하신 분. 강한 자가 스스로 힘을 제한하고 봉인해서 세상에 갇히셨어요."
“말 한 마디로 마귀를 굴복 시키고 우리 인간들의 죄를 다 없애버릴 수 있으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으시고, 구원해주셨다면 우리는 무조건 또 똑같은 죄를 반복했을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또 악용해서 우리 인간들은 반드시 죄를 또 지었을 것이에요.
닥터 스트레인지가 도르마무랑 싸웠던 장면 기억하세요?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x 100” 무한 굴레에 빠지잖아요.
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주시면 우리는 모르니까 또 죄를 지었을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죠.
“내가 너에게로 갈게. 그리고 너를 그 곳에서 건져내 줄게"
그리고 진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주셨어요. 죽고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기준과 가치 그리고 마귀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리셨어요.
29절에서 말하고 있는 “강탈"이라는 단어는 승자만 사용할 수 있어요. 약자는 절대 강탈. 강제로 빼앗아 올 수 없어요. 강탈은 승자만 누릴 수 있는 권한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세상에서 강탈하겠다.”
“다시 되찾아서 너의 지위와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겠다.”
“너는 나의 것이다. 나도 너의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셔요.

선택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사람들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해요. 사람들을 선동하던 바리새인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해요.
정말 조용해진 모든 군중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세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자다.”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다.
나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다.
이 말씀. 무슨 뜻일까요?
그 앞에 있는 군중들에게 “이제는 선택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
“내 편에 서던 세상 편에 서던 둘 중 한 가지만 하라.”
“뜨겁던지 차갑던지 한 가지만 하라.”
“미지근한 것은 없다.”
“나와 함께 하던지 반대하던지 하나만 하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중간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셔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믿고 고백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섰었고, 그 질문에 대답을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을 했을거에요.
그 고백이 여전히 여러분의 삶에 중요한 고백으로 남아있나요?
예수님이 정말 내 삶을 구원해줄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분을 드러내는 삶.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반드시 살아내야 해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니면 “믿기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나요.”
우리는 이 질문을 매일 나 스스로에게 하고, 그에 대한 고백을 해야만 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 앞에 바로 “네"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 수 있어요.
“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앞으로 그 대답을 하기 위해 노력하면 돼요.
그 노력을 보기 위해, 마음의 고백을 듣기 위해 예수님은 기다리고 계실 거에요.
여러분 이번 한 주 우리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꼭 던져보길 바래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네"라는 열매로 맺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요.
바리새인들처럼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예수님과 삶의 주도권 경쟁하지 말고"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내가 온전히 믿고 신뢰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꼭 던지고 답해보는 가온누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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