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9_주일예배_눅6: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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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넘어서는 윤리

제목: '우리'를 넘어서는 윤리   본문: 누가복음 6:27-36
Luke 6:27–36 NKRV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오늘 말씀은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소위 황금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이어지는 말씀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서 이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평지설교와는 구별하여 평지설교로 일컫습니다. 그 구체적 내용과 어투를 비교하자면,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로 시작하는 반면 마태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그 산성설교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의 병행구를 보아도 다소간의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예컨대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청중들 곧 제자들과 대비되는 부류를 '죄인들'이라고 일컫는 반면 마태복음의 본문은 '이방인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상 어구상의 차이점이 의미상 어떤 차이를 가져 오는지 함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그 차이점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큰 뜻에서 한 가지라는 전제하에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자 합니다. 산상설교 또는 평지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최고의 윤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윤리'라는 말을 오늘 말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윤리란 인간들 사이의 상호적 삶의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는 데 반해, 오늘 말씀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원리를 뛰어넘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산상설교/평지설교와 오늘 말씀은 윤리 이상의 어떤 내용을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인 윤리를 뛰어 넘어 서기는 하지만, 인간관계를 떠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관계의 원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윤리'라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를 일러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 일컫기도 하고, 현대의 사상가들과 실천가들은 그 말씀을 현대적인 평화운동의 교범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일반의 상식적인 윤리와 예수님께서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의 질적 차이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일반의 상식적인 윤리는 호혜적인 쌍방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윤리는 일방적인 베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이해하면 일반적인 윤리란 저쪽에서 해 준만큼 이쪽에서도 당연히 갚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면, 예수의 윤리는 너희가 원하는 만큼 저쪽에 먼저 베풀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일반의 윤리가 '최소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면(저쪽에서 해 준 만큼 '최소한'), 예수의 윤리는 '최대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네가 원하는 만큼 '최대한')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일반적인 윤리가 대가를 서로 주고받는 관계의 차원인 반면, 예수의 윤리는 대가 자체를 파기하고 어떠한 상황에든 / 어떠한 사람에게든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도 일반의 윤리란 흔히 우리가 행하는 축의금/부의금을 주고받는 차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절대적 베품의 윤리란, 오늘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나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해는 비추는 곳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저 그런 대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한 확언으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거라."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요구로 결론을 내립니다.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요구입니다. 실로 엄청난 요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과연 어떻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윤리의 바로 이와 같은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지레 겁을 먹거나 지레 이 요구를 체념하고 맙니다. 그리고 여전히 기존의 최소한의 윤리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거 참 좋은 말씀이고 옳은 이야기이기는 한데, 우리가 어떻게?' 또는 '현실은 엄연한 현실 아닌가?' 하는 핑계로 도망치고 맙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 수없이 많은 종교인들, 수없이 많은 설교가와 교사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선생님이 있어 날마다 날마다 윤리와 도덕을 외치고 있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의 한 단면이 바로 근원적이고 / 보편적인 윤리 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없이 '우리'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우리'라는 말만큼 이중적이면서 그러기에 동시에 미묘한 말이 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본래 '우리'라는 말은 한국인의 공동체적 유대성과 그에 따르는 역동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너와 나를 뚜렷이 구별하지 않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우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내 아내' '내 아들/딸' 해야 할 것도 우리는 '우리 집 사람' '우리 아들/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서는, 이 유대관계가 깨질 때, 너와 내가 우리로 있지 못하고 너와 나로 분리될 때 한이 생깁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실상 관계의 유대와 정서적 유대를 나타내 주는 정말 우리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 말이 우리와는 다른 이들을 배타적으로 배제하는 맥락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는 불행한 상황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우리끼리는 잘하고, 또 우리끼리는 관대하고 공평하지만, '우리의 경계를 넘어서면 그 관계는 무너지고 마는 현상을 너무나 쉽게 경험합니다. 특별히 선거 때만 되면 떠오른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이 한마디면 정견이고 정당이고 인물이고 없습니다. 그저 우리 고향 사람에게, 우리 동문에게, 우리 친척에게 표를 던지고 맙니다. 선거 때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직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음주운전하다 경찰의 단속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특효약이 뭔지 아십니까? 저는 입증해 볼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만, 통계상 '같은 식구끼리 왜 이래?' 점잖게 한마디 하면 무사통과한다고 합니다. 경찰 행세를 하면 된다는 거죠. 이와 비슷한 의식의 단면을 보여 주는 예는 허다하게 많습니다. 자기 자식이 부엌에 들어가면 못난 놈이 되고, 사위가 부엌 일 잘 해 주면 우리 딸 시집 잘 갔다고 합니다. 또 깡패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의리', 폐쇄적인 자기집단 내에서의 '윤리'에 불과합니다. 우리 사회에 왜 이와 같은 이중적인 윤리 의식이 팽배해져 있을까? 이를를 두고 사람들은 그 연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이중윤리의 저변에 있는 '우리' 의식의 실체는 가족과 마을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윤리의식이 다른 가족 다른 마을과의 관계, 혹은 더 큰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굳어진, 나쁜 말로 하면 '패거리 의식'이 아니겠느냐고 진단을 합니다. 그리고 그 연원은 잦은 전란 속에서 국가 혹은 관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백성들이 자구책으로 가족 단위로 뭉치고 마을 단위로 뭉치고 하면서 험난한 삶을 헤쳐나갔던 데서 바로 그와 같은 폐쇄적인 이중적 윤리의식이 강화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그 연원이 어찌되었든 오늘 우리 사회는 이중적 윤리의식의 심각한 폐해를 극복하지 못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중적 윤리의식은,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편의적인 이중 잣대를 남발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내부에서는 엄격하고 윤리적인 반면 외부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부정을 일삼는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정반대로 내부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반면 오직 외부를 향해서만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아내와 자녀들을 위하여 품위 있고도 고상하게 여행하면서 마구잡이로 운전하면서 다른 운전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정권을 향해서는 권위주의의 청산을 요구하고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그 요구를 외치는 교회나 단체는 스스로 권위주의를 청산하지도 개혁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때로는 정치권의 부정을 그대로 닮는 현상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엄격함이든, 자애로움이든 자기들끼리는 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행하지 못하는 현실, 더 근본적으로는 뭔가 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행할 줄은 알면서 뭔가 대가가 없을 경우에는 마땅히 해야 할 바마저도 팽개쳐버리는 현실, 그 현실을 오늘 본문 말씀은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그 정도는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깡패들도 의리는 지킨다 이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내 제자이거든,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를 원하거든 그 폐쇄적 윤리의식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듯이, 해가 비추는 곳을 가리지 않듯이, 너희는 누구에게나 / 어떤 상황에서나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하나님 나라 윤리의 실현 원리를 말합니다. '내가 말한 이것이 그렇게 실현 불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너희가 원하는 만큼 타인들도 원한다. 너희가 먼저 그것을 행하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너무나도 평범한 말씀이 성서의 정신을 집약한 '황금율'로 받들어져 온 데에는 다 그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가 행하는 것'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이루는 첫걸음이요, 하나님 나라는 다른 먼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는, 주께서 명하신 조건없는 베품의 윤리를 체현하기 위해 다짐하는 복된 기회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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