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8. 수련회 셋째날.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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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3:1–3 NKRV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람을 선택하셔서 세우실 때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을 말한다.
왕, 제사장, 예언자, 기술자 등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름부어 세워진 자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타낸다.
출애굽기 35:30–36:1 (NKRV)
30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31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2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34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35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36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이슬, 강물, 비와 같은 이미지는 성령의 임재와 되살아나고 생명이 충만해지는 역사를 상징한다.
호세아 14:5 (NKRV)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영생은 단순히 우리가 사는 날이 영원히 길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되어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영생
하나님은 하나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하나님의 충만함이 부어지도록 정하셨다.
"예수 안에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
승동교회를 설립한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의 말이다. 당시 백정들이 많이 다니는 승동교회에 양반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예수 안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하자 양반들이 따로 교회를 세웠는데 홍문삿골교회다. 연동교회에서는 장로선거에서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따로 교회를 세웠는데 묘동 교회다. 이렇듯 초대 한국 교회에 신분의 차이로 인한 갈등들이 표출되고 있을 때 전라도 김제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의덕 선교사(L.B.Tate)
전라도 지역에 선교하던 최의덕 선교사(L.B.Tate)는 김제지역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 전도한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 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다. 1907년 장로 선거가 있었다.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고,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네 많은 사람이 조덕삼의 소작농이었다.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은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외지인이었다. 조덕삼(1867~1919)은 41살이었고, 그의 집 머슴인 이자익(1882~1961)은 26살이었다. 17살 때부터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하고 함께 신앙생활도 하였다. 공교롭게도 둘은 장로 후보에 나서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고, 지역 차별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금산교회 내부
그건 그냥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다. 조덕삼은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었다. 1909년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1910~1915)도 모든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다 지원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어 섬겼다. 조덕삼 장로의 가정은 지금 삼대째 금산교회를 섬기고 있다.
전신학대학교에 가면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인 고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이 목사는 가난한 고아요 머슴이었다. 밑바닥 인생을 극복하고 분열 이전의 장로교단 총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한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이 목사는 1882년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떠돌며 행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떠돌이 소년이었다. 이 목사가 인생 역전의 동반자인 전북 김제시 대지주 조덕삼(조세형 전 주일대사의 조부)씨를 만난 것은 17세 되던 해였다.
조씨는 자신의 집에서 마부馬夫로 일하며 틈틈이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공부를 하는 이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봤다. 이들 사이의 인연이 더욱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면서부터다. 최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이들은 미륵불교의 본산이자 증산교의 발생지인 모악산 기슭 김제 금산(팟정이) 마을에서 1905년 10월 11일 집주인 조덕삼과 머슴(마부) 이자익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곳에 이 두 사람이 합심하여 1908년에 세운 27평짜리 금산ㄱ자 예배당이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이 한날한시에 세례 받고, 같이 성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창립멤버가 되고, 같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1907년, 두 사람은 함께 교회의 영수(집사급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 집사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보다 이 장로를 집사의 직분으로 잘 섬겼던 것이다
실제로 조덕삼 영수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로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에 충성하였다. 교인들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조덕삼 장로의 이런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이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왔을 때에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 물론 이자익 목사가 신학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물질적으로 도운 것은 조덕삼 장로였다.이 조덕삼 장로가 바로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이다.
조덕삼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민족 교육을 위해 이듬해 유광학교를 설립한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금산교회 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만세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으며,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을 때 이자익 목사를 비롯한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장로 등은 신사참배를 거부해 고난을 받았으며 급기야 교회가 폐쇄당하기도한 민족의 시련과도 함께한 교회였다.
마부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역임(13·33·34대)했을 뿐 아니라, 장로교(통합) 노회장을 수차례 지냈으며, 20여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말년에는 대전시 오정동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대전노회를 신설하여 대전신학교 초대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오정교회 초대당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고 연약한 시골교회를 지켰던 농촌목회자였으며, 입각(入閣)을 권유하는 친구 목사 함태영 부통령의 제의를 “장관보다는 목회자로 종신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목회자로 종신할 것을 선언했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진 목사였으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고 창씨개명에도 불참했던 지도자였으며, 정치흥정에 흔들림 없이 교회헌법과 회의규칙에 정통한 깨끗한 교회정치가였다. 이자익 목사는 인생을 정리해야 할 70세의 고령에도 대전노회와 장로회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교)를 설립한 열정의 목사였다.
대전신학대 총장이었던 문성모 박사는 이자익 목사에 대해 “한국 교회 120년 역사를 통틀어 명예나 권력,일신상의 유익을 위한 신앙의 변질이 전혀 없었던 제일의 거목”이라고 칭송하였다.
도대체 이 두분의 놀라운 섬김과 사랑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분명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을 믿는 확고한 창조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수년전 과학자요 교수가 된 이 이자익 목사 후손(이규완 대전제일교회 장로)과 조덕삼 장로의 후손인 전 국회의원 조세형 장로가 서로 만났다. 그리고 두 후손은 서로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제 고인이 된 조세형 장로는 아마 하늘나라에서 이자익, 조덕삼 두분과 함께 웃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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