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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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
제가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위로 누나가 세명, 아래로 여동생이 1명 그리고 제가 넷째입니다.
귀한 아들이죠?
우리 가족들은 모두 복음을 들었습니다.
수년전 제가 결혼할 때 우리 목사님에게 복음을 들었습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기독교 장례를 치뤘기 때문에 그 때도 복음을 들었습니다.
물론 부모님 기일에도 매번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복음을 계속 듣는 중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 누나 세명 모두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첫째 누나는 젊을 적 힘을 다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돈 버느라고 교회 다닐 여유가 없습니다.
그나마 제 설교는 시간날 때마다 듣는 게 제게는 위로가 되는 상황입니다.
둘째 누나는 힘들 때 교회를 나간 적이 있었지만 목사님이 헌금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시험들어서 교회를 안나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누나는 잘 나가다가 코로나 이후로 흐름이 끊겨서 안나가게 되었습니다.
순천에 있는 몇몇 교회를 추천해줬는데 말로는 나가겠다고 하고는 안나갑니다.
다행히, 제 여동생은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신앙을 갖게 되어 요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식이 아직 없지만 제게는 8명의 조카들이 있습니다.
큰누나, 둘째누나, 셋째누나, 여동생이 2명씩 낳아서 8명인데 큰누나, 둘째누나, 셋째누나 조카 6명이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모두 순천에 있어서 제가 지금까지는 좀 방치했는데 앞으로 조카들을 전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 가족 이야기를 자세히 한 이유는 복음에 대한 반응들이 다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본론]
우선 마태복음은 나무만 봐서는 전체적인 숲의 지형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주제별로 길을 내놓았기 때문에 드론을 통해 숲을 봐야 우리가 어느 길에 들어섰는지 알수 있습니다.
1-4장은 예수님의 탄생과 등장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5-9장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이 등장합니다.
10장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 세상에 파송됩니다.
11-12장은 예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거절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13장에는 무슨 내용이 등장할까요?
13장에는 그럼 사람들이 왜 이런 반응들을 보이는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우선 하나님 나라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 통치받던 나라에서 의와 생명,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로 우리를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는 이런 나라로 들어오라는 주님의 부르심과 초대장입니다.
그럼 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원래 비유란 사람들이 잘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친절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는 불친절합니다.
알아듣는 이와 못 알아듣는 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라는 단어는 원래 수수께끼라는 말과 더 가깝습니다.
수수께끼는 그것의 감춰진 실체를 맞추기 위해 계속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맞춘 사람은 그 실체를 더 깊이 깨닫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음악에 눈을 뜨지 못하면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 음악을 들어도 그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마치 창과 커텐의 이중 역할을 합니다.
복음에 올바로 반응하는 제자들에게는 더 잘 들어다보도록 창 역할을 하는 것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무리들에게는 아에 닫아버리는 커텐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무리들에게는 그 비밀을 아에 감추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는 부분이 예수님이 비유를 해설해주실 때는 무리들은 사라지고 제자들만 등장합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님이 못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못 알아들은 일차적인 책임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보고, 듣고도 믿지 않기 때문에 커텐으로 아에 닫아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첫번째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네가지 밭 이야기를 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과 씨앗은 동일한데 유일하게 다른 것은 네가지 종류의 땅입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땅입니다.
이러한 밭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냥 하나님 말씀을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두가지 종류로 나누면 되는데 왜 이렇게 네가지로 분류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과 그 원인을 설명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도 삶에는 아무 열매가 없는지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 맺는 좋은 땅보다 열매맺지 못하는 땅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첫번째로 길가에 뿌려진 씨입니다.
이 씨앗은 흙이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싹도 틔우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새에게 금새 노출되어 새가 쪼아 먹어버립니다.
여기서 새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도 마음이 딱딱하여 깨닫지 못하자 사탄이 그 말씀을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는 그 사람들도 귀로는 복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이 경우는 아에 복음을 거부한 사람을 말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매번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 못해서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는 사람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왜 깨닫지 못할까요?
마음이 길가의 아스팔트처럼 딱딱하여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무관심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교회도 다니고 설교는 듣지만 마음에 말씀이 없으니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지난주 영적 세계에 눈을 떠야 한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순간에도 영적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 마음에서 가로채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돌짝밭에 뿌려진 씨입니다.
이 씨는 싹을 틔우지만 흙이 얕아 햇볕이 쬐면 뿌리가 금새 죽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돌밭 사이로 씨앗이 떨어지면, 흙이 얕아서 깊이 묻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흙이 얕다보니 빨리 싹을 냅니다.
문제는 땅 아래 묻힌 돌들 때문에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팔레스타인의 그 쨍쨍한 햇볕이 쬐면 수분부족으로 금새 싹들이 말라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싹이 나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면 결국 거기에 걸려 넘어져 버립니다.
21절 보시면 그 원인은 자기 안에 말씀이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을 더 기다려줘야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마음밭이 문제입니다.
뿌리깊은 나무가 흔들리지 않는데 마음에 자갈들이 많으니 말씀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라면 고난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의 길이 넓고 편한 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좁고, 험한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고난 앞에서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고난은 신앙의 장애물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제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불 속에서 금이 불순물을 벗고 진짜 본모습을 드러내듯 말입니다.
이제 세번째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입니다.
이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만 가시덤불이 식물의 성장을 방해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덤불은 자라나는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그만큼 식물이 가져갈 땅 속 양분을 가시덤불이 다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22절 ‘말씀을 막아’를 ‘초크 더 워드’, 즉 말씀을 질식시켜 버린다고 말합니다.
가시덤불이 식물의 생명력을 잠식하여 자라지 못하게 하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가시덤불처럼 말씀의 성장을 막아 하나님 나라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 돌짝밭에 해당되는 사람은 고난과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넘어졌습니다.
반면, 가시덤불에 해당되는 사람은 자신 안에 내부적 요인으로 실패한 경우입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기에 어쩌면 돌짝밭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세상 근심, 걱정, 재물에 대한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자녀 걱정, 직장 걱정, 건강 걱정 온갖 걱정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과 내 안에서 경쟁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됩니다.
그런 걱정들은 가시덤불처럼 스물스물 자라나 우리 마음에 잘 자라고 있던 하나님 나라 말씀의 목을 졸라 버립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분명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쌓는 것으로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재물이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질식시켜 버릴 것입니다.
재물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경쟁하게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걱정 또는 재물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누려야 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좋은땅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말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
여기서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지혜나 경험으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 “에이, 이렇게 어떻게 사나? 세상에서 호구되는 거 아냐?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은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아이들 얼마나 순수합니까?
말하면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습니까?
그런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라고 그냥 열매가 자라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잘 듣긴한데, 그것을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또한 흥미롭게도 사람에 따라 열매맺는 양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육십배, 어떤 사람은 삼십배의 수확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수확량의 차이가 아니라 모두 열매를 맺었다는 점입니다.
수확량의 차이는 주님이 결정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달린 게 아닙니다.
마치 사람들이 각자 다섯 달란트, 두달란트, 한달란트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이 더 있습니다.
농부가 왜 씨앗을 길가나 돌짝밭, 가시덤불에 뿌렸냐는 것입니다.
똑똑한 농부라면 좋은밭에만 뿌리지 않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농사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여러 종류의 밭이 섞여 있었기에 농부는 씨를 흩어서 뿌립니다.
그러다보니 씨앗이 임의로 때로는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돌짝밭,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라면 당연히 좋은 밭에 더 많이 뿌리려고 노력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농부가 똑같은 양의 씨앗을 네 군데에 뿌린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씨앗을 많이 허비한 것으로 볼 때 어리석은 농부같아 보입니다.
왜일까요?
놀랍게도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입니다.
4분의 3이나 되는 씨앗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밭의 비유’가 아니라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밭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 나머지 세 밭에서 허비한 모든 씨앗의 손해를 다 커버하고도 남게 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농부가 어리석어 보이고, 시간이 더뎌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전도하며 무관심한 사람, 넘어진 사람, 열매 맺는데 실패한 사람과 같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땅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모든 수고를 보상받을 만큼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는 자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지금 저에게도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비유에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비유를 들을 때 나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운명을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이 비유의 목적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좋은밭이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길가나 돌짝밭, 가시덤불밭이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이 비유를 듣고 예수님을 찾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물어본 제자들처럼 우리도 응답해야만 합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도전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꿈이자 비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모든 것을 걸고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꿈과 비전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길이 좁고 험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수의 사람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지금도 농부이신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그럼 지금 그 씨는 어디에 뿌려졌습니까?
길가입니까? 돌짝밭입니까? 아니면 가시덤불 밭입니까?
저를 포함한 우리 성도들 모두 좋은 마음밭을 가진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