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3_주일예배_고전9: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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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향한 달음질
목표를 향한 달음질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별도의 해석이 필요없을 정도로, 쭉 읽는 가운데 그 뜻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쉽고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유대 사람에게는 자신은 이미 혈통으로서의 유대 사람으로서의 귀속성을 벗어던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은 이미 율법의 굴레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고, 또 반대로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으며,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는 자신도 역시 약한 자처럼 행했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다고 집약합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고백을 보면서, 우리는 역시 탁월한 선교자로서 그리고 탁월한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면모를 다시 보게 됩니다. 바울은 확실히 탁월한 선교전략가였으며, 모든 시대를 통해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선교사로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사상가, 신학자로서 바울의 탁월한 점은 여러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저는 그 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이해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바울은, 팔레스틴이라는 한 지역에서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사건, 곧 1세기 팔레스틴의 한 농민 출신으로서의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모든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편적 사건으로 확대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었고, 또 오늘 우리들에게도 의미있는 사건이 되었을까 할 정도로 이 점에서 바울의 공로는 지대합니다.
다음 두 번째로 바울은 신앙과 윤리의 결합을 통해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도 궁극적인 신앙의 경지,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또한 탁월한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신학자들은 바로 이 두 가지 점 때문에 생동력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고 다소 가혹하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사에서 양 극단의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방금 말씀 드린 대로 바울의 그와 같은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쉽사리 전해지기 어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설령 오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더라도 의미있는 사건은 사건이고 그 사건 그대로 인류의 구원 경륜에서 비켜갈 수 없는 사건으로 여전히 의의를 지닐 수 있기는 하겠지만, 오늘 우리에게 의미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이 두 번째 차원과 관련하여 부연하면, 사도 바울은 곳곳에서 항상 신앙의 차원과 윤리의 차원의 결합을 강조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명제 때문에 바울이 윤리의 차원을 배제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바울 서신 곳곳에서 모범적인 교인으로서의 삶, 모범적인 시민으로서의 삶은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하고 저런 사람에게는 저렇게 대한다는 행위의 원칙은 곧 윤리적 생활방식의 기본 원리에 해당합니다. 상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최선의 태도 최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윤리적인 원칙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윤리적인 행동이란 어차피 상대적입니다. 그것은 절대불변의 진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의미할 뿐입니다. 불자들은 곧잘 이런 비유를 씁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은 버린다, 진리라는 궁극적 목적지에 도달하면 이제 더 이상 방편지(方便知)로서 뗏목은 필요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방편지, 뗏목은 중요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실상 신앙과 윤리의 결합을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은 그 자체로 진리이기에 솔직히 고백하건대 걸림돌이 되는 것이 많습니다. 걸림돌이 된다기보다는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주전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설교/평지설교의 의미를 함께 깨닫고자 하였지만,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경지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현실이요, 우리는 끝내 그 경지에 이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 경과적인 방편들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행했던 것은 바로 그 방편을 의미합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사는 우리로서는 그 방편의 유용성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 지혜를 깨우친 사람이며 그 지혜를 우리에게도 일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것이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빌러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선교사로서 그리고 설교자로서 위기의식 혹은 자의식까지도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내가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확인해나는 까닭은, 자신은 기껏 복음을 전하고 설교해 놓고도 정작 자신은 그 복음이 인도하는 구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불행에 에 빠지지 않을까를 걱정하며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심각한 위기의식을 드러내 줍니다.
설교자는 항상 '이 사람에게는 이런 소리가 듣기 좋을 것이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소리가 듣기 좋을 것이다' 하는 가정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 항상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바울이 처음 말한 것처럼 각 사람의 구미에 맞도록 최대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의 구미에 맞는 것, 그것이 전부가 될 때, 그 말을 전해들은 사람은 그 말이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어 그것으로 발판 삼아 궁극적인 구원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만 떠들어대는 설교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위기의식입니다. 그것은 방편일 뿐 내가 전하는 분명한 목적은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경계를 한시도 늦추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에서 오늘 말씀은 저 스스로에게 얼마나 경종이 되고 감동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복음의 전도를 외치며 교세의 확장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이 때 흔히 쓰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꿩잡는 게 매'라고, 좌우지간 교인 수는 많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이 말이 함축하는 뜻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국회의원 공천을 하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민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해야 할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좌우지간 당선가능성만 있으면 된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 안팍에 팽배해 있는 이와 같은 의식을 크게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왜 필요하고, 교인수가 늘어나서 어쩌자는 것인지 그 목표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받는 무리가 늘어간다는 것은 확실히 기쁜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 마찬가지 느낌일 것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교우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로 나오시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설교할 때도 훨씬 신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에만 만족하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며, 교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지 저나 여러분이나 한결같이 그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도 교회가 있어야 하는 이유이자 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체험과 확신을 세상에 펼치는 데,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데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전파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우리의 분명한 목표를 위하여 새롭게 다짐하는 복된 기회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