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그리고 십자가] 버림받은 임마누엘(마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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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2월 26일 주일 청년부
시리즈 : 가상칠언, 그리고 십자가
제목 : 버림받은 임마누엘
본문 : 마태복음 27장 46절 *신51
결단찬양 : 십자가를 참으신
[도입]
‘입양’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결혼 전부터 입양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왔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입양이라는 방법을 택해야겠다.’ 정도로 입양을 생각한게 아니라, 진중하게 입양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아엘이가 태어나보니 입양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있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머릿속에서 자연스래 ‘입양’이란 생각이 차츰 지워져 갈 때,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엘이가 아닌 입양된 아이를 지금 아엘이만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어서 든 생각은, ‘둘 다 내 자녀로 온다면, 누가 더 소외받았다 생각하게 될 것인가? 누가 더 버림받은 것 같은가?’
입양된 아이보다 내 자식이 더 사랑스러워 보일 수 밖에 없음은 부성애와 모성애를 지닌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방금의 질문에서 ‘버림’과 가까운 것은 입양된 아이가 가깝다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성애와 부성애에 따른 결과임도 분명 있지만, 이 시대 사회적 분위기가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레 입양된 아이가 버림과 더 가깝게 느끼도록 설계 되었습니다. 친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는 고아원에 가게 됩니다. 그렇게 그 아이들은 입양을 기다립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리도 고대하던 입양을 통해 새로운 가정으로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인이 사건’과 같은 양부, 양모의 아동학대 같은 일들이 빈번히 언론에 노출되며 우리는 자연스레 그렇게 인식하도록 학습되었습니다.
그러다 최근 입양에 대한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이 영상 속 아이는 분명 입양되었지만,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입양된 자신의 동생을 향해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시 흘려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다시 든 생각은, ‘진짜 버림과 가까운 자는 누구인가? 진짜 버림받은 자는 누구인가?’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들로부터 더 많은 버림을 받으며, 이들이 아파하는가. 사회에 노출된 기사로만 보면 당연히 입양된 아이들이 더 많은 버림 속에 놓여져야 하는데, 실상 아동학대의 72%는 친부모로부터 나오며, 이들이 더 큰 아픔과 외로움 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배불러 낳은 아이와 입양된 아이만이 버림과 외로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한 문제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평생 행복하게 살 것임을 약속했지만, 각종 이유로 이혼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 직장을 통해 내 꿈을 펼치겠다 다짐했지만, 공동체에 어울리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번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25살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전깃줄로 자신의 목을 메달고 추락사한 청년이 사망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떤 사유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청년이었지만, 너무 미안했습니다. ‘하루만 되돌이켜 그 친구를 만나볼 수만 있었더라면..’
점점 세상은 ‘버림’이라는 틀에 많은 이들을 내몰아 넣고 있습니다. 생존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버립니다. 가치가 떨어지면 매몰차게 버려버립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조금의 기다림도, 일말의 배려도 없이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달려갑니다.
[본문 속으로]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예수님 또한 버려졌음을 봅니다. 오늘의 본문을 우리 한 번 더 함께 읽어보길 원합니다.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오늘의 핵심 키워드 ‘버림’이라는 틀에 예수님도 예외 될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는 마치 친부모라 말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보았을 때, 예수의 이름을 보았을 때 그는 결코 버림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버림받으면 안되는 거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나타나 행하신 말씀이고 또 약속인데, 오늘 본문으로 와서는 어떤 모습이 담겨 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는 겁니다.
[본문 : 시편22편을 인용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버려짐’을 강조합니다. 읽어 나가는 우리로 하여금 눈치채도록 강하게 버려짐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버려짐 속 외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구약에 등장했단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시편 22편을 보면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편은 다윗이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난 중에 쓴 시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첫 고백이 예수님의 고통 중 외침과 비슷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22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7장 35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라고 기록하는데, 시편 22편 18절에서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라는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 마태복음 27장 39절에서 예수님은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라고 기록하며 모욕당하심을 기록하는데, 시편 22편 7절은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라고 기록하며 비슷한 표현이 등장함을 보여줍니다.
또 마태복음 27장 43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라고 기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암시했으며, 시편 22편 5절은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기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자 함을 소망합니다.
또 마태복음 27장 50절을 보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라고 크게 외치셨음을 기록하는데, 시편 22편 5절을 비롯한 24절에서 다윗은 부르짖었고, 울부짖었다고 기록합니다.
[본문 : 버림받은 임마누엘, 이뤄진 임마누엘]
고난이나 비애의 시라 알려진 이 시편 22편을 예수님은 인용하시며 자신의 고난을, 자신의 고통을 그리고 자신의 버려짐을 더욱 극대화 해나가십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버림받으신 것을 강조할까요? 마태복음이 이토록 버림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분의 버림받으심으로 ‘우리’가 버림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그냥 드러내는 수준이 아니라 아주 아주 극대화시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만큼 버림받지 않게 되었음을 돋보이게끔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버리셨습니다. 아니 버리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이를 다른 말로 ‘임마누엘’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 따라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그만큼 우리를 버리지 않고 함께하겠다는 하나님의 외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 아버지가 하나님으로]
예수님은 그런 임마누엘의 사역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늘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그는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임마누엘의 사역을 오차없이 행하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갑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버리는 것이 가슴 찢어지는 일이기에,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 되어 계획하신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시게끔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자신의 죽음보다 더 가치있던 일. 예수님 자신도 알았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눈 앞에 두었기에 그는 아버지라 부르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본문 :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대로]
그렇담 예수님의 바램은 없었을까요? 아니요. 예수님도 100%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에 고통과 슬픔과 아픔 모두 느끼셨지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9절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분명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도대체 이 잔에는 무엇이 들었기에 예수님께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 기도했겠습니까?
먼저 그 잔 안에는 ‘고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가 매 맞음과 살의 찢겨짐 속의 고통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고문의 시작부터 마지막순간까지 예수님이 느낀 그 고통의 모든 감각이 이제 예수가 마셔야 하는 그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에는 ‘수치’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고통보다 더 한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의 마음의 고통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붙잡히심으로 체포와 결박, 재판과 조롱, 비난과 비웃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옴을 보았습니다. 그 잔 속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이 피처럼 붉게 보여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에는 ‘무시’와 ‘무관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고통과 수치, 그리고 그 이상의 고통이 무시와 무관심 이었습니다. 차라리 악플이라도 달렸음 좋겠다 생각하는게 인간의 심리인 것처럼, 자신이 겪는 고통과 수치에 사람들이 무관심하다면 그것이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 될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분명 우리를 위함인데, 세상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외치시지 않겠습니까? ‘정령 너희와는 관계가 없느냐?’
또 그 잔에는 그가 담당할 ‘죄악’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무게 단위로는 감히 측정할 수 없는 무게가 될 것입니다. 당장 여러분들 몸 위로 1톤의 거대한 짐이 올려진다면 얼마나 버티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신 짐은 이보다 훨신 무겁고 거대한 짐이 됩니다. 그리고 잔에 든 죄악의 짐을 보고 계신 것이지요.
그리고 잔에 든 가장 쓴맛은 ‘하나님의 진노’ 였습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커피가루를 마시는 것이 가장 쓴것처럼 예수님이 마실 잔의 가장 밑바닥은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죄를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예수가 마셔야 하는 그 잔에 죄악이 가득하기에 그 잔을 곱게 지나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분개했고 분노 하셨습니다. 물론 이 진노는 예수를 향한 진노라기보다 그 잔 안에 담긴 죄악을 향한 진노였습니다.
고통과 수치, 무시와 죄악과 진노가 담긴 그 잔. 그 잔을 예수님께서는 ‘제발 나를 피해가게 해달라’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한 번 더 읽어 봅시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나의 뜻보다, 더 먼저 이루어져야 할 그 뜻, 그 계획을 향해 기도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그 뜻이 어떻게 실현됩니까?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내려진 계획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버려짐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자 하는 약속이 성취되게 했고,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며 나눌 때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심이 성취되도록 하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임마누엘의 뜻과 다르게 그의 삶이 버려진 것만 같았지만, 결코 그는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셨고, 또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노라 약속하심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을 위해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가상칠언과 또 예수 그리스도 시리즈에 있어 먼저는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또 이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승리를 허락하신 그 주님을 기억하며 고백하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Ⅰ 임마누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는 자 되길 소망합니다
Ⅱ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참으신, 그리고 승리로 이끄신 그 주님이 나의 삶의 주관자 되길 원합니다
[찬양 후 기도제목]
Ⅲ 청년 공동체가 예수로 살아내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Ⅳ 세상을 이끄는 우리, 소망이 되는 청년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겠노라 다짐한 자들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참으사 승리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무궁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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