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에서 내려와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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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에서 내려와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뉴퀴즈보니까 역도선수 장미란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역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것보다 더 무거웠던 것은 삶의 무게였다고 말이죠.
우리는 살면서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나 실수로 인해 돌이키기 힘든 피해를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불행의 문에 들어섰다고 느낍니다.
한 순간의 잘못이나 실수였는데 그것의 대가가 너무 큰 경우 감당하기 힘듭니다.
최근 어떤 트로트하는 친구는 어린시절 폭력을 저지른 일이 들통나서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야 말았습니다.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또다른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 잘못이나 실수가 아닌데도 고통과 고난이 찾아올 때입니다.
원인모를 질병으로 갑자기 삶이 무너진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부주의로 사고가 나서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중에 최악은 죽음일 것입니다.
날벼락처럼 자연재해나 사고로 죽게 되거나 갑자기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옛날 흑사병이 그리스도인들을 피해가지 않았고, 코로나가 그리스도인들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신학대 교수님은 아들이 어려운 탈북친구 도와주다가 그 친구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얼마나 하나님이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이런 불행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나온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 무슨 이야기가 있습니까?
16장 13절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침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지만 항상 믿음이 부족하고 제대로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놀라운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대답보다 완벽한 대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듣고 싶으셨던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고백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인것은 알겠는데 어떤 메시아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말씀이 16장 21절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고난받고 죽어야만 하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입장에서 메시아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그런 영웅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영웅이 힘없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면 그들의 기대와는 한참 빗나가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로 불러서 강력히 항의합니다.
16장 22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얼마나 싫었으면 예수님께 대들었겠습니까?
바로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를 그렇게 칭찬하시던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에게 육체적 편안함, 인기, 성공 이런거 다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고통과 고난을 인내하며 주어진 사명을 다하면서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고난받고 십자가지는 게 신앙생활의 전부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실망한 제자들을 격려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17장 변화산 사건이 등장한 이유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 3명만 데리고 어떤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곳에서 예수님이 변화되어 모세, 엘리야와 영광의 빛 속에서 이야기하시는 신비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이 산 이름을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산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사건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이 사건이 왜 제자들에게 격려와 소망이 될까요?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3절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먼저 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나타난 것일까요?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인물로서 율법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모두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인물들로 알려진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종말의 메시아가 나타날 때가 되면 하늘에서 그 두 사람이 먼저 나타나 사람들을 준비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의 두 대표선수들과 만나신 것입니다.
원래 그들은 하늘에 있어야할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땅에 내려와 제자들 눈 앞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을 눈 앞에서 본 것보다 더 큰 황홀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예수님과 그들은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마태복음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입니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이뤄질 회의가 땅 위에서 이뤄지는 모습을 제자들이 두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회의한 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에 대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결국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아입니다.
한마디로 메시아가 죽는 것이 구약성경의 핵심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자 계획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도 알지 못한채 베드로는 예수님께 뭐라고 말합니까?
4절입니다.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위해 초막 세개를 지어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산에서 세분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탄이라고 예수님께 꾸지람을 받은게 며칠전인데 천상의 영광을 맛보니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도 예배때 엄청난 은혜를 받으면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최근에 유튜브를 보니 에즈베리라는 곳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신학교 채플에서 시작되었는데 일주일 내내 찬양이 그치지 않고 간증과 회개기도가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세계 수만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와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흥의 징조중 하나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하니 영원히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5절입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있으니 너희들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에 대한 순종일까요?
고난받고 십자가를 짊어질 메시아를 부정하거나 가로막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베드로에게 아무리 이 환상이 좋아도 그만 산에서 내려가라는 말입니다.
산에서 내려가 현실의 수많은 벽에 부딪히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변화산에서 그만 내려와 갈보리산 십자가로 올라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영광은 황홀한 것이지만 현실의 고통을 도피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영적 체험을 한후 그곳에만 머무르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예배나 기도를 통해 황홀경을 경험했다며 끊임없이 예배와 기도만 합니다.
미국에 가면 24시간 찬양과 예배만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면 찬양폐인, 예배폐인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마약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피해버린다면 영광은 그 빛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듯이 우리 역시 그 분의 제자로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둘째, 십자가 뒤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여기서 예수님이 ‘변하였다’는 말은 영어로 change가 아니라 transform입니다.
마치 씨가 성장해 꽃이 되는 것과 같이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외모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롭게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16장 28절에 보면 제자들중 몇몇은 죽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 왕권을 차지하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씀이 6일뒤 변화산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 메시아 왕의 영광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신 때는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입니다.
그 하늘의 모습이 이 땅 위에서 먼저 예고편처럼 보여진 것입니다.
어쩌면 높은 산에 오르신 것도 이런 왕의 모습을 보이기 위한 것일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6절에 보면 사도 요한의 눈이 열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3명의 제자들이 보는 장면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보고있는 장면은 하늘에서 일어날 일인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스러운 일을 이 땅에서 보았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커튼 뒤에 숨겨진 은밀한 천상의 모습을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살짝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이것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앞서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 뒤에 있을 부활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예고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결국 이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예고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가운데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소망입니다.
[성경적 연결]
골로새서 3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번데기가 나비로 변화하듯, 씨앗이 꽃이 되듯 우리의 부활이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번째 열매가 되셨기에 그 뒤를 이어 우리도 그 분의 모습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소망때문에 지금의 고난을 인내하며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설교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굳이 신앙을 위해 겪는 고난이 아닐지라도 큰 틀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이기에 겪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을 일인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겪는 일들이 있습니다.
내 안의 욕망과도 싸워야 하고, 세상 죄의 유혹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것때문에 때로는 내 삶이 불편해지더라도, 때로는 내가 불이익을 받더라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또한 제자는 자기 십자가, 즉 죽음도 각오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배운 제자도 말씀처럼 제자는 육체적으로 순교하지 않더라도, 삶의 안락함과 편안함에 대해서 죽어야 하고, 개인적 야망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물론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게 아무런 불편함도 없고, 아무런 고민과 마음의 갈등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신앙이 자라나면 분명히 이런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삶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주님이냐 세상이냐 선택해야만 하는 불편한 순간들이 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런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주님과 관계없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인내를 주며 그 인내가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 하나님의 소망을 붙들게 합니다.
그러나 고난과 죽음이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과 죽음 뒤에 놀라운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너가 내 제자가 되면 고난을 겪게 될텐데 너는 어떻할래?
너가 내 제자가 되면 힘들고 좁은 십자가의 길이 가야하는데 너는 어떻할래?
여전히 고난이 두려워 제자의 길목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래?
이렇게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에 ‘만사형통하고 편안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매일 배부르고, 등 따뜻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행복입니까?
설교 처음에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지, 그 불행을 어떻게 해결할지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아니 제자에게 불행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반전시킬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뒤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뒤에 진정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부활로 인해 우리가 누리는 세가지 복을 말했습니다.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실수는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다,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불행이 불행이 아닙니다.
죽음조차도 생명으로 가는 길이니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영광의 그 날을 바라보며 매일 고난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는 저와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