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요나가 화가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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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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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하나님은 나를 아끼신다! / 나와 다른 의견도 수용하자!
헌금 :
먼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주옵소서. 또한 우리의 가장 값진 물질을 봉헌합니다. 주님 받으시고 기쁘게 흠향하여 주옵소서. 이 드림이 우리의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 우리 모두 양과 같이
본문 : 요나 4:1-11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가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배신하셨어요.
요나 입장에서는 배신이죠.
믿었던 하나님이 배신했는데,
당연히 심판해야 할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우리도 그렇잖아요.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면
화나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은 거에요.
1절을 보세요.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기서 ‘싫어하다’라는 단어는 2절에 ‘재앙’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유사합니다.
요나는 매우 싫었는데,
재앙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이 너무 싫었던 거에요.
우리는 어때요?
요나는 니느웨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어요.
*분노가 무엇인가요?
분노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감정’이다. 라는 정의가 있습니다.
실제로 잘못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내가 생각하기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은 나타나는 것이 바로 ‘분노’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10분만 지각해도 화가 나는데,
어떤 사람은 30분을 늦어도 화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회의에 3분 정도만 지각해도,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든지 해야 하는 분위기죠.
그런데
아프리카 가나 같은 경우에는, 대통령도 제 시간에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지 않죠.
이게 뭡니까?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감정.
실제로 잘못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 풍습, 각 개인의 특성에 따라 ‘화’가 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요나가 화가 났는데,
화가 나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화가 나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따지듯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말했잖아요.
당신은 성격이 너무 좋기 때문에,
내가 니느웨로 가면,
당신이 니느웨를 반드시 용서하실 거라고 제가 말했잖아요.
당연히 니느웨는 심판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다니...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감정.
잘못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화 내기를 더디하시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나가 화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못 참겠는데,
하나님은 참으시기 때문이죠.
나는 못 보겠는데,
하나님은 두고 보시기 때문이죠.
이게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당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다니는 사람이 저럴 수 있어?
예, 저럴 수 있는 것이죠.
저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아?
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이죠.
세상이 교회를 욕하는 이유는,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멀쩡히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줄 수 있어?
그런 하나님이 정의로운 하나님이야?
저런 사람도 용서하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저런 교회는 다니지 않을 거야.
이게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게 욕을 먹어도,
계속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고,
계속해서 죄인을 받아주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욕먹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는 환대 받고, 칭찬 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 생각해보세요.
사람들 죽여서,
해골로 무덤 만들고,
피라미드 만들고,
끔찍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인데,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고, 심지어는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깝대요.
니느웨 사람들이 너무 아깝대요.
죄인이고,
끔찍하고 잔인한 살인마들이고,
이웃 나라를 괴롭히는 원수들인데,
하나님이 ‘아깝대요’
10-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과 같은 동정심이 있느냐?
아깝다!
내가 저 친구를 보니까 아깝다!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지는 몰라도,
저 친구 예수만 믿으면 좋을텐데!
이런 동정심이 교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깝다고 합니다.
내가 수고해서 기른 자식들이다.
내가 애써서 기른 자식들이다.
니가 비난하고 욕하고 손가락질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가 눈여겨 보는 아까운 자녀들이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화가 났어요.
요나는 동정심 따위 없었습니다.
그는 분노했고, 화가 났죠.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로 결정합니다.
그게 5절입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우리가 축구 경기 관람하듯이,
지금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를 바라보며,
동쪽 언덕에 앉아서,
초막을 짓고,
그 성읍을 관찰하고 있었던 거에요.
자기가 구원받았을 때는 굉장히 기뻤어요.
요나서, 2장을 보면 그렇습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고 주께 서원을 갚겠습니다.
자기가 구원받았을 때는 굉장히 기뻤어요.
그랬던 요나가 4장 1절에서,
“매우 싫어하고 성내”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망했으면 좋겠다.
진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으면 좋겠다.
그들을 구원하지 마시고 그들에게 합당한 재앙을 내리셨으면 좋겠다.
여러분,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구원은 ‘관계 회복’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왕과 백성’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목자와 양’
등 관계적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죠.
그런데 요나는 분명
구원 받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신
그 성품은 닮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가 많아요.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9절에도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너울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화가 너무 많아요.
자기가 확실히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분노’의 감정이 가득했던 것이죠.
*그런데 요나의 분노는 굉장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요나가 화를 내는 장면이 본문에 2번 나오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재앙을 돌이키셨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그게 2절이죠.
그리고 두번째는, 자기 머리를 가려주던 박넝쿨이 말라버린 것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그게 8절이죠.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자기 머리가 뜨겁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통스러우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분노가 아니라,
자기 기분 나쁘고,
자기 뜻에 안 맞고,
자기 머리가 뜨거워져서 나는,
오로지 자기를 위한 분노였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분노는,
하나님을 위한 분노가 아니라,
우리 자신,
자기 중심의 분노일 뿐입니다.
이건 잘못되었어.
이건 고쳐야 해.
그런데요,
그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처럼 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자비롭지도 않고,
하나님처럼 오래 참을 줄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4절에서 하나님이 물으셨죠.
“네가 성내는 것이 정당하냐?”
그러니까, 요나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정당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 했습니다.
내가 옳습니다!
내가 하는 분노는 올바른 분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우리는 우리는 압니다.
요나는, 자기를 위한 분노를 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는 은혜롭지 않았고,
자비롭지 않았고,
쉽게 화를 냈으며,
심지어 하나님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고 재앙을 당하기를 바랬다는 것을요.
*말씀을 적용하며 마칩니다.
첫째, 분노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정당하고 올바른 분노보다는,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분노가 더 많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분노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지만,
대부분의 분노가 나 중심의 분노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 가족, 내 직장, 내 이웃,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는 화가, 정말 하나님을 위한 분노인가?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끔찍하고 잔인한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서,
“아까운 자식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비난할지라도,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못 가는 사람을,
교회는 데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으면 기쁨이 넘치지만,
교회 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지치고 활력이 없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품만큼, 내 품이 넓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화가 안 나요.
자기를 비난하고 따지고 드는 요나에게도 화를 안 내세요.
마음이 평안하십니다.
왜요?
하나님 품이 그만큼 넓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품만큼 품을 넓혀야 하는데, 우리 평생의 숙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시는 성도님들 중에,
인상이 좋고, 온화하신 분들은,
교회가 편해서,
교회 안에 좋은 사람들만 있어서, 온화하신 것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기도하고,
치열하게 하나님 은혜를 구하고,
내가 품을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이미 품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담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되신 거겠죠.
교회는 하나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택대 전도를 가고,
주변에 전도를 가고,
교회 사람들 싫어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는데 나가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싫어하는 사람들 싫고, 불편하고, 우리도 멀리하고 싶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억지로 웃으면서 전도 안 해도 되요.
그냥 말씀만 전하면 됩니다.
내 기분을 억지로 좋게 안 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했으니까 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냥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자비가 많은 사람도 아니구요.
오래 참고 품이 넓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우리를 품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말 안 듣는 양들처럼,
제멋대로, 자기 가고 싶은대로 가던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아깝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니가 아깝다.
나는 니가 귀하다.
그러니, 너도 저 원수같은 친구 품어줄 수 있겠니?
우리 이 마음을 생각하며, 찬양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1.
2.
3.
관찰
1 매우 불쾌해하고(라아으), 크게 사악하고(라아), 화를 냈다.
2 그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말하기를, 바라건대, 여호와여, 내가 이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나의 아다마(땅, 영토)에 있을 때에. 그러므로 내가 서둘러서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나는 당신이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정이 많고, 분노하기를 느리게 하고, 은혜가 많으신. 돌이키 라아(재앙)을 내리지 않는.
요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싫어하였다.
하나님이 자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다는 사실이 불쾌하였다.
3 이제 여호와여, 당신은 취하소서, 원하건대. 내 생명을, 나로부터. 내가 죽는 것이 좋습니다!(토브). 내가 사는 것보다.
네페쉬 (생명)
1:14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2:7 내 영혼이
4:3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4:8 스스로(네페쉬) 죽기를 구하여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야타브(잘하다, 즐겨하다, 옳다, 기뻐하다)하냐? , 네가 화를 내는 것이,
네가 화를 내니까 좋으냐?
기쁘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분노’와 ‘옳음’의 관계
분노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반대’나 ‘비판’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것이다.
우리는 평생 ‘내가 옳다’는 확신과 싸워야 된다.
5 요나가 그 성읍에서 나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서(야샤브), 그를 위하여 거기서 숙카(장막, 원두막)을 만들어, 그 그림자(첼 / 그림자, 보호자, 그늘) 아래에 앉았다(야샤브).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야사브’가 반복된다.
3장에서 니느웨 왕은 ‘재’ 위에 앉았다.
요나는 그늘 아래에 앉았다.
축구 경기를 관람하듯이,
가장 관람하기 좋은 장소에 앉았다.
아마 요나가 덩굴을 보고는 ‘하나님도 심판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6 여호와 하나님이 마나(세다, 예비하다)하사, 키카욘(박 넝쿨)을, 요나 위로 올라가게 하셨다(올라), 그의 로쉬(머리)를 위하여 첼(그림자, 그늘)이 되게 하셨다, 그의 라아(사악한, 재앙)으로부터 나찰(구원을 얻다, 벗어나다, 피하다, 건지다)하게 하기 위하여. 요나가 사마흐(기뻐하다, 즐거워하다, 행복하다)하였다, 키카욘(박넝쿨)로 인하여, 큰 씸하(즐거움, 기쁨)으로.
2장에서 ‘올라’하신 하나님
4장에서 박넝쿨 위로 ‘올라’하셨다.
요나도 숙카로 첼을 만들었고,
하나님도 키카욘으로 첼을 만드셨다.
요나는, 2장에서 구원을 받듯이, 크게 기뻐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재앙’으로부터 그의 머리를 구원해주셨다.
그러자 요나는, ‘매우 크게 기뻐’하였다.
요나는 ‘자신’이 자비와 은총을 받을 때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방인’이 자비와 은총을 받을 때는 매우 ‘화’가 났다.
7 그리고 하나님이 마나(세다, 예비하다)하사, 톨라으(구더기, 지렁이, 벌레)를 샤하르(새벽, 아침)이 올라(올라가다, 오르다)하는 중에, 그 이튿날, 그 키카욘(박넝쿨)을 나카(치다, 죽이다, 벌하다)하시니, 야베쉬(부끄럽게 하다, 마르다, 수치를 당하다)하였다.
나카
7절에서는 ‘박넝쿨’을 치시고
8절에서는 ‘요나의 머리’를 치신다.
마나
6절에서는 ‘키카욘’을 예비하셨고
7절에서는 ‘톨라으’를 예비하셨다.
올라
6절에서는 ‘카키욘’을 ‘올라’하셨다.
7절에서는 새벽이 ‘올라’하는 때에 ‘박넝쿨’을 치셨다.
8 세메쉬가 자라흐(돋다, 일어나다, 뜨다, 떠오르다)할 때에, 하나님이 마나(세다, 예비하다)하셨다, 동쪽의 하리쉬(뜨거운, 폭력적인) 루아흐(호흡, 생기, 영, 바람)을. 세메쉬는 요나의 로쉬(머리) 위에, 그가 알라프(기절하다, 곤비하다, 약하다)되었다, 그리고 그가 샤알(묻다, 원하다)하였다, 그의 생명이 죽기를, 내가 죽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사는 것보다
해가 뜰 때 하나님이 마나하셨다.
동쪽의 뜨거운 바람을.
그리고 해는 요나의 머리 위에 있었고, 요나는 기절할 것처럼 되어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원했다.
요나는 ‘이방인’이 심판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뜨거운 고통을 당할 때에는 ‘불평’하였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화내는 것이 기쁘냐?(야타브 / 즐거워하다, 좋게 여기다, 합당히 여기다), 그 박넝쿨로 말미암아. 그가 말하기를, 내가 죽기까지, 화내는 것이 기쁩니다(야타브).
하나님은 화내는 것이 기쁘냐고 물었는데
요나는 ‘죽기까지 화내는 것’이 기쁘다고 말하면서 강조한다.
요나의 ‘의견’은 고쳐지지 않는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후스(불쌍히 여기다, 아끼다)하였다, 이 박넝쿨을, 네가 아말(노력하다, 수고하다)하지도 않았고, 네가 가달(기르다, 강하게 하다, 성숙하게 하다)하지도 않은, 그 밤에 생겼다가 그 밤에 아바드(멸망하다, 사라지다, 죽게되다)된.
후스
10절에서 이 박넝쿨을 후스하였다.
11절에서 하나님도 니느웨를 후스하신다.
너는 수고도 아니하고 노력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수고도 하였고 노력도 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노력하셨고, 하나님은 기르셨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수고하시고 기르신다.
그러나 요나는 이방인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견은 무엇인가?
하나님께는
요나도 자비의 대상이고
이방인도 자비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도 심판할 권리가 있고
이방인에게도 심판하실 권리가 있으시다.
11 내가(아니, 강조) 후스(불쌍히 여기다)하지 않겠느냐? 그 큰 성읍 니느웨에는 아담(인류, 사람)이 12만 명이요, 오른편과 왼편을 야다(알다)하지 못하는, 가축도 많이 있는데.
하나님은 가축도 신경을 쓰신다.
가축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수고하시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신다.
사람 12만 여명
오른편과 왼편을 알지 못하는
분별력이 없는.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는.
그리고 많은 가축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이다.
항상 ‘회복의 관점’에서 보신다.
연구
요나는 분노하지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거부하는 요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신다.
참으로 자비로우시다.
1절
싫어하고(라아으) / 재앙(라아)
발음이 유사하다.
요나는 ‘하나님이 재앙을 거두신 것’ 때문에 매우 ‘싫어하였다.’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이 ‘악’(라아)로 느껴졌다.
그래서 요나는 싫어(라아으) 하였다.
요나는 왜 그렇게도 니느웨의 ‘구원’을 싫어했을까?
그는 이스라엘의 잠재적 적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에 설치한 예언의 폭탄에 시한폭탄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준비한 ‘폭탄’이 터지지 않은 것이 화가 났다.
요나는 얼마 전까지(2장), 자신을 멸망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해 기뻐하고 있었다.
요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심판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시기를 원했기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2절
은혜롭고 긍휼히 여기며 ...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이 풍성하며 ...
요나의 다섯 가지 속성 목록은 구약에서 거의 신조처럼 여겨지지만(출 34:6, 느 9:17, 시 86:15, 욜 2:13), 요나가 불평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달랐지만’, 하나님과 ‘대화’(기도)가 가능하였다.
기도가 가능하다고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니다.
기도하는 요나의 성품이 긍휼이 많고 은혜로운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4절
“네가 화를 낼 권리가 있느냐”
“화를 내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가인’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셨다.
Genesis 4:6 NKRV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또는,
“화를 내는 것이 옳은 일이냐?” 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요나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5절
그늘(첼) / 면하게 하려 하심(6절, 나찰)
자음이 반복된다.
그늘은 - 구원하는 행위를 연상케 한다.
"피난처"를 뜻하는 히브리어 '수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위해 만든 나뭇잎으로 만든 구조물을 묘사합니다(레 23:40-42)
아마도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빨리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셔서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심판을 선포해 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요나는 아마도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하나님의 심판’을 멈추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직 저들은 덜 변했어. 더 변해야 해.’
우리의 교회 생활이 힘든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못 참겠는데,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6절
주님은 1장 17절에서 물고기 한마리를 준비하신 것처럼, 식물 하나가 자라나 요나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1:17과 여기에서 그리고 다음 두 구절에서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Jonah 1:17 NKRV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Jonah 4:6 NKRV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는 화가 났기 때문에 ‘니느웨 성’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그들의 멸망을 기대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에 앉았다.
7절
벌레(톨레앗) / 새벽에(알로트)
반대로 자음이 같다.
ㅌㄹㅇ / ㅇㄹㅌ
8절
티그리스 강 동쪽의 산들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주로 부는 바람은 북서쪽과 남동쪽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이 합리적이다 / 화를 낼 권리가 있다 / 화를 낼 이유가 있다 라고 말한다.
자신의 분노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니느웨’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머리를 가렸다가 말라버린 ‘박넝쿨’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
그의 태도는 ‘자기 이익’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뜨거운 동풍"은 무서운 시로코였습니다. (The “scorching east wind” that God provided was the dreaded sirocco. )
"시로코 기간 동안 기온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상승하며 평균보다 약 16~22˚F 높은 온도를 유지합니다 ... 때로는 공기에서 모든 수분을 빼앗긴 것 같아서 피부가 평소보다 훨씬 더 팽팽해진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시로코의 날은 유난히 성질이 급해져서 아무리 온화한 사람이라도 짜증을 내고 초조해하며 아무 이유 없이 서로를 헐뜯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나는 왜 도시로 이사하지 않고 그곳에서 살았을까?
요나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니느웨 사람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 주실지, 아니면 재앙으로 멸망시킬지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죽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상황이 불행했기 때문에 죽음을 갈망했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요나의 마음이, 그 자신을 ‘뜨거운 동풍’ 아래로 몰아 넣어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9절
하나님은 요나가 식물에 대해 "화를 내야 할" "합당한 이유" 또는 "정당화"가 있었냐고 물으셨습니다. 요나의 대답은 강한 최상급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강한 분노가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은 마치 ‘니느웨의 왕’이신 것처럼 그들을 대변하고 계시다.
10-11절
기원전 7세기 니느웨와 그 주변 지역의 인구는 30만 명이라는 숫자가 인용되어 왔습니다. 최근 다양한 문서를 사용한 추정에 따르면 이러한 숫자가 합리적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기의 12만 명이라는 숫자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요나 사이의 대화로 끝나는데,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로운 행동을 정당화하십니다. 이상한 식물과 그 식물을 죽인 벌레의 사건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마지막 말은 죽음에 대한 소원입니다(4:8-9).
요나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던 ‘식물’이 시들었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은 니느웨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으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고 있다.
아끼거든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는 ‘그 식물’이나 ‘니느웨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이제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순종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마음과 얼마나 일치하지 않았는지 요나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태도와 자신의 태도를 대조하셨습니다.
요나의 ‘신학’ (신론)은 옳았지만, 그의 ‘실천’은 옳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의 삶은 ‘용서’가 없고, ‘자비’가 없고, ‘오래 참지 못하는’ 삶이었다.
11절
"좌우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관용적인 표현으로, 지식이 부족하고 순진하다는 뜻입니다(삼하 19:35, 사 7:15-16 참조).
"오른손과 왼손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다는 신호입니다."
"그들이 '오른손과 왼손'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도덕적 무지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악행에 대한 책임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1:2 참조), 하나님의 도덕적 뜻에 관한 특별한 신적 계시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네가 가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길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에게 그들을 사랑하라고 한 적이 없고, 가라고 한 것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해서 가라고 하셨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요나,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가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두 가지 극단 중 하나를 택합니다. 동물을 무시하고 비인간적으로 대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동물을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인간에게 없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죠. 동물학대방지협회는 첫 번째 태도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동물 권리 운동"은 두 번째 태도를 장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물을 인간보다 낮은 수준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합니다(참조: 창 1:26, 28, 시 8:6-8).
요나가 받을 자격이 없는 포도나무 그늘을 제공받은 것처럼, 니느웨 사람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 구원을 제공받은 것은 그들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회개를 바탕으로 한 구원이었습니다."
요나서의 배경
기원전 790년에서 760년 사이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아모스와 호세아 직전 세대, 즉 이스라엘의 고전 예언이 시작되는 시기에 등장합니다.
요나 시대는 여로보암 2세(BC 793-753년)의 통치 기간으로, 이스라엘의 분열된 왕정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과 군사적 성공을 거둔 시기입니다.
쇠퇴기에 접어든 아시리아는 내부 안보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이 국제 정치의 영역에서 최하위가 아니라 최상위권에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763년에서 758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반란입니다. 이 반란은 왕의 특권을 빼앗겼다는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에서 니느웨의 멸망이 임박했다는 예언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요나서 연구에서 이 정보가 중요한 이유는 요나 당시 앗수르는 한 세대 동안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한 세대 동안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나가 니느웨로 보내졌을 때 그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가 아니라 고군분투하는 국가의 지방 중심지 중 한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요나서의 주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분명히 사건을 통제하십니다.
'지정하다'라는 단어가 이 점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주목하세요: 하나님은 큰 물고기(1:17 [2:1]), 이상한 식물(4:6), 벌레(4:7), 동풍(4:8)을 '지정'하셨습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주권자이지만, 이것은 저자와 독자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내용이며, 물론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 / 화가 나는 이유
자기중심적 사고
정신과 의사로서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를 많이 내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중심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것은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남성 대 여성, 노인 대 젊은이, 너무 심하게 편을 가르다 보니 마음속에 있던 공격성을 상대방에게 투사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불안해서 그런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공을 던지듯 공격성을 띠고 눈덩이 부풀리듯 부풀려서 “너 죽어라” 하고 던질 대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편 사람도 똑같이 나에게 화를 던지게 됩니다.
밖으로 향한 분노는 타인을 향한 육체적 언어적 폭력으로 나타나지만 나를 향한 분노는 무기력증과 우울증으로 표출됩니다. 사실 분노의 최고봉은 ‘자살’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를 13년째 유지하고 있고 분노조절장애가 많아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울증은 자신을 못 살게 굴며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분노입니다. 자살 또한 실제로 시도하는 것뿐 아니라 내게 이로운 일을 하지 않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졸음운전, 일중독, 성형중독, 미디어나 게임중독 등 자기파괴적인 행동 역시 분노의 표현입니다.
가치관이 다른 세대
화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의 질병으로 미국의 정신과 질환 진단 책에 “Hwa Byoung”이라는 정식 진단명으로 등록이 되어 있는데요. 화병이 왜 생겼을까요?
저는 유교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 살 차이만 나도 “감히 윗사람에게 어디서?”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며느리 문화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합니다. 저는 강연에서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시어머니에게 대들고 싶거든 독립투사가 돼라.”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보이지 않은 감옥에 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쉽게 자기주장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쌓인 화를 얼굴은 보지 않고 말만 하는 전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상대방의 가슴에 유리파편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는 이는 잘 모르고 말합니다. 분노를 표현할 때에는 차라리 만나서 상대방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보고 말해야 하고, 말할 준비와 연습을 충분히 하고 가야 합니다. 참고 억누르거나,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입장을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며느리 세대는 내 세대와는 다르구나.”
20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이 이처럼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도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화병의 속 풀이 처방전은 화나게 하는 사람과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것이 1번입니다.
“아,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 가정교육이 나와 달랐나 보다, 세대가 나와 차이가 많구나.”
성숙한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묵상
하나님은 니느웨의 피상적인 반응(회개)에도 응답하셔서 자비를 베푸신다.
요나의 분노는 ‘하나님의 자비’가 “과분”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당신의 자비는 너무 과분합니다!
요나의 ‘신학’ (신론)은 옳았지만, 그의 ‘실천’은 옳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의 삶은 ‘용서’가 없고, ‘자비’가 없고, ‘오래 참지 못하는’ 삶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의 삶은, ‘자기가 옳다는 확신’으로,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도 신앙고백은 옳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만큼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거래적 사랑’
부모도 거래적 사랑을 한다.
부모가 ‘긍휼’을 가지고 있으면, 자녀도 ‘긍휼’의 사람이 된다.
부모가 ‘거래적 사랑’을 하면, 자녀도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정말 이런 나를 사랑하실까?’ 가,
‘하나님은 정말 이런 나를 사랑하신다!’로 성장해야 한다.
그만큼, 우리는
‘헤세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도 들으신다.
분노에 가득차서, 불평하는 기도도 들으신다.
기도가 들려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닮는 것은 더 중요하다.
적용/예화
나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뜻을 가진 사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자존감 / 자아상
수치심 / 부정적 표상
이기적인 ‘기쁨’은 이기적인 ‘분노’만큼이나 나쁘다.
자신을 위한 기쁨은 그만큼 자신을 위한 분노로 표출될 수 있다.
나한테만 잘 해주는 친구는 좋은 친구인데,
내가 싫어하는 친구에게도 잘해주는 친구는 어떻게 할 것이냐?
‘내편’ 안 들어주는 사람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품어야 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 이상이다.
내가 사랑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전도에 대한 본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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