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5_주일예배_고전11: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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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주안에서 하나되는 길

1 Corinthians 11:17–26 NKRV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올해는 매달 성찬식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교회들의 전통에서 볼 때 각 교회들은 이 성찬의 의의는 조금씩 다르게 이해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행할 때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대목에서, 가톨릭교회는 '화체설'(化體說) 곧 축사하고 그 음식을 몸에 모시는 순간 그것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반면에 종교개혁자 루터는 화체설의 주술적 성격을 경계하면서 '임재설'(臨在說) 곧 빵과 포도주를 드는 순간 그것과 더불어 주께서 함께 임재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떤 전통에 있을까요? 우리 장로교회의 뿌리를 일군 칼빈은 '상징설'(象徵說) 곧 빵과 포도주는 사람들과 더불어 실제로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함과 아울러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피로 맺은 계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하고 그 계약을 되새기는 기념의식이라고 이해함으로써, 성만찬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마다 그 강조점이 달라 뭐가 진실된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종교개혁기에 이 문제는 중요한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였고 오늘날에도 그 논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세계의 여러 교회들은 성찬 역시 말씀에 이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며, 또한 여러 강조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서로 일치되는 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더 중요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다시 말해 '성만찬에 참여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보여 주셨던 삶과 그 계약에 따라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 /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느냐 하는 점에서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바로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교회는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는,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특별히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배, 우리의 성만찬 의식은 뜻도 의미도 모르며 행하는 주술적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예배에 참여하고 성만찬 의식에 참여하면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하기를 기도하여야 할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저는 이 답을 오늘 본문 말씀을 실마리 삼아 찾아봄으로써 여러분과 함게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찬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해 주는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이며, 아까 말씀드린 우리 장로교회의 전통이 성찬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계약을 기억하는 기념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근거가 되는 본문입니다. 즉 23절이하의 말씀에서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고 함으로써 성찬의 의미를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는 것'의 실질적 의미는,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하게 된 배경이 되는 앞 부분 곧 17-22절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말썽많은 고린도교회의 상황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룬 공동체 치고 어떤 경우든 문제 없는 경우가 없지만, 아마도 교회사적으로 볼 때 고린도교회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도 드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고린도교회 안에 여러 파당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분열상황이 성찬을 둘러싸고 심각한 사태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온 교우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예식인 성찬을 본래의 그 뜻에 어긋나게 '하나가 될 수 없는', 더 나아가 '더욱 분열을 조장하는' 의식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찬은 각기 집에서 음식을 준비해 와 그것을 골고루 나누며 다같이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방식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 일부 -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 가 자기 집에서 가져 온 음식을 먼저 먹어치워 버려 변변한 음식을 준비할 형편이 못되었던 한편의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준비해 온 호화로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아예 술에 만취해 곯아떨어졌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추태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고 사도 바울이 분노합니다. '아니 우리가 집이 없어서 굳이 교회 안에 와서 먹고 마시는 것이냐?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창피를 줘도 유분수지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진정한 성찬을 회복하라는 말씀이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우리가 각기 집이 없어서 그래서 먹고 마실 곳이 없어서 굳이 교회에 나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교회에 나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하는 행위이며 그 계약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실질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되는 삶을 보여 주셨듯이 너희도 진정으로 하나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 안에서만 의의를 지니는 성찬의 뜻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성찬의 참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나눈 시점이, 세상의 분열을 마침내 종식시키기 위한 십자가 위에서의 피의 계약 직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를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 성찬에 참여한 너희들이 가는 곳마다 너희는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되는 삶을 보여 주라는 주님의 준엄한 명령을 다시 되새기는 것이 성찬의 참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교회공동체 안에서마저 이와 같이 하나되는 일이, 더욱이 바로 그 하나됨의 예식을 거행하는 순간마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가 누리는 삶의 조건과 자기가 지켜온 의식과 통념을 버리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기가 자기 집에서 가져 온 음식을 자기가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세상의 통념으로 당연해 보이며, 또 이들이 특별히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악의를 지닌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당연해 보이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상대방에게는 남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자기가 늘 해왔던 대로 행동하는 방식, 그것이 문제입니다. 타인을 생각하지 않기에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세계에 안주해 있기에 자신도 변화할 수 없고 또 더불어 그가 속한 공동체도 하나로 되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파당으로 나누어져 있는 현실 자체를 곧바로 문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분열 자체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갈라져 있는 현실을 어떤 면에서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출신배경이 다르고 물질적 조건이 다르고 생활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물질적으로 베풀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역으로 베품을 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는 모습이지만, 오늘 말씀의 참뜻은 그런 조건을 뛰어넘어, 아니 설령 그런 조건 때문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고 생각하는 것도 서로 다르더라도, 상대방/타인을 생각함으로 하나되는 노력을 하라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서로 다르지만 그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획일적으로 '똑같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됨의 참뜻입니다.   (똑같이된다는 것과 하나된다는 것의 사전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지만) 똑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기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자기들끼리만 먹어치운 사람들이 사실은 이와 같은 발상을 자신의 행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당연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연할 수 있고 또 당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사람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획일성을 강조하는 생각이요, 그러한 생각은 거꾸로 끊임없는 분열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획일화된 기준은 차별을 낳게 되어 있고, 차별은 곧 분열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와 같은 생각이 고질적인 병폐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기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태도가 우리의 삶 가운데 너무나 깊숙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 일상적인 삶에서도 그렇지만 거시적 안목에서 볼 때 그와 같은 생각이 우리 역사를 망쳐 놓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거철만 되면 기승을 부리는 소위 '색깔론'과 '지역주의'는 그러한 병폐의 단적인 예입니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듯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관점도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도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삶의 부분에서 모두가 똑같을수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문제는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결코 모든 사람에게도 당연한 것이 아니요, 따라서 다른 사람을 생각함으로써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숙한 문화의 척도는 차이('차별'이 아니라!)를 어떻게 수용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식탁을 마주하여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 그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갈라진 인간들 사이를 화해시키고 하나되게 만드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서로의 조건이 다르고, 일상을 살아가는 데 많은 점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식탁을 대할 때도 그와 같이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또한 주의 식탁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이 사회와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데 헌신하기를 다짐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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