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교회가 되려면(벧전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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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제 생각에는 크게 두 곳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또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과 교회 모두 마지막이라는 공통적인 요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동기와 목적은 확연히 다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배경설명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AD60-68년경 로마에서 쓰여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때 당시 교회는 폭정과 기독교 박해로 유명한 네로의 통치 가운데 있었고 스데반의 순교 이후부터 쭉 이어진 정치적, 군사적 박해와 탄압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해와 탄압으로 인해 교회는 로마에서 로마 제국 전역으로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쓰여졌고 그래서 저자 베드로는 수신자들인 교회를 향해 ‘흩어진 나그네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환란과 핍박 그리고 고난 가운데에 있는 교회들을 향해서 굳세게 믿음을 지키고 소망을 품고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을 요청합니다.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세상 가운데 흩어지고 나그네가 된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고자 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 베드로는 서신의 서두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교회의 정체성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권면과 격려는 오늘 본문 7절에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표현으로 나타나타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교회가 되고싶지 않은가?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 가운데에서 교회됨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만물의 마지막이 70년, 예루살렘의 함락을 말하고 있는지 혹은 이 세상의 마지막,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저와 여러분은 오늘 그런 주장들에 대해 다루기보다는 ‘마지막’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 대해서 좀 더 집중해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7절 말씀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가 바로 그 가까운 ‘마지막’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삶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이미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약속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완전히 임할 것입니다. 이미 온 마지막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만큼 오늘 본문의 상태를 잘 설명하고 있는 삶이 있을까요? 만물의 마지막은 언제 완성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처럼 긴장하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 또한 흩어진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믿음의 교제를 나누다가 세상 가운데로 흩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으로 흩어진 우리는 나그네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유 없는 박해, 고난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선한 양심과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 이 두 가지 선택지에서 갈등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먼 옛날 로마의 각지에 흩어진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느 때보다도 마지막이 가까운 때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는 소위 깨어서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이를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 사랑하라

깨어있는 교회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뜨겁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ektene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간절하게, 열심으로, 끝까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에도 사랑하며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을 때마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 사랑을 ‘서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넘쳐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Give and take라는 가치관과는 확연히 비교됩니다. 교회의 원리는 왼 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돌려대고 십리를 가달라 하면 백리를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해를 당해도 사랑으로, 욕을 당해도 사랑으로, 고난과 핍박을 당해도 사랑으로 복과 평안을 빌어주는 것, 축복해주는 것이 참다운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랑의 모습을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덮음에 대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허물을 덮는 것은 누군가의 잘못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얼버무리며 덮어버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한 사람이 이 말씀을 통해 아무 조건 없이 자유케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진리와 정 반대되는 일입니다. 허물을 덮는 사랑은 진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허물을 덮는 사랑은 바로 회개와 용서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을 당한 사람은 진심으로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그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잘 되기를 바래주는 것과 잘못이 있다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용서해주는 사랑이 마지막이 가까운 때에 교회다움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교회는 세상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는 교회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사랑을 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선포하실까요? 뜨겁게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두 번째 방법; 대접하라

두 번째 방법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 대접하는 것 역시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 없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이 원망 없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시 문화 안에서는 외부인을 자신의 집으로 들여 대접하는 일은 보통 3일 정도였습니다. 이 때에 대부분의 교회는 가정교회였기 때문에 나그네들이나 고난과 핍박을 피해 도망 온 성도들을 맞이해야 할 곳은 다름아닌 성도의 가정이었습니다. 내 집의 문빗장을 열어 나그네들을 맞아 그들을 대접하는 일을 불평과 원망 없이 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대접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하루 이틀은 즐겁고 기쁨으로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대접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원망 없이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을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이자 대접해야 할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에서의 도움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소외된 존재이며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주변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이 없는지 한 번 살펴보길 소원합니다. 초대교회처럼 나의 집 대문을 열고 그들을 맞아들이지는 못하겠지만 기꺼이 그들이 구하는 도움의 손길들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물질이 될 수도, 따듯한 말 한 마디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들을 보내어 주실 것입니다. 또 때로는 우리 자신이 외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때에 서로를 대가없이 원망과 불평없이 대접하며 그 대상을 따듯하게 품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서로를 소개해 보실까요? 내가 당신을 원망없이 대접하겠습니다.

세 번째 방법; 봉사하라

세 번째 방법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하는 것입니다. 이 봉사라는 단어에서 우리에게 ‘집사’라는 직분으로 잘 알려진 헬라어 diakonos가 파생되었습니다. 집사라는 직분의 뜻은 나누는 자, 봉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봉사함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은사를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옳지 않은 청지기입니다. 이야기의 말미에 청지기는 지혜있게 행동했다고 평가됩니다. 청지기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돈이 자신의 돈이 아니라 집주인의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유는 모두 집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찾아서 끊임없이 우리를 개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함이요, 서로 봉사하고 나누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이렇게 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은사로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결론; 예수를 의지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사랑하고 대접하며 봉사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는 마지막이 가까운 지금 이 시대 가운데 깨어있는 교회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며 잘 살아내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자신있게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님들은 저를 포함하여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항상 예쁘게 말할 능력도, 항상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늘 말미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어떻게 공급받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세 가지 방법들을 예수님의 생애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사랑할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그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았던 우리의 삶을 대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실 정도로 헌신하시고 섬기셨으며 또 봉사하셨습니다. 바로 이곳에 계신 저와 여러분의 존재가 바로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더러 이보다 더 큰 일들을 행하리라고 우리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사랑받지 못할 존재였고 고아였고 과부였으며 나그네였으며 봉사와 섬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품으시고 섬겨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도 사랑하고 대접하며 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 기도하며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함을 순종하며 실천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 말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기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가까워지는 만물의 마지막에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정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속에서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소망을 품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 가운데 흩어진 나그네된 교회는 끊임없이 도전받고 유혹당하며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마지막일수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듯이 교회는 서로를 사랑하고 대접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이고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이 교회된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세상을 이기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가오는 마지막 가운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십시오. 깨어 계시며 당당히 세상을 이기십시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럴만한 능력과 힘이 없으니 그럴만 한 능력과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며 힘을 받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힘을 받아 이 일들을 행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회된 우리가 서로 깨어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교회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받아 마지막 날이 이르기까지 세상 속에서 당당히 세상을 이기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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